총알이 투표를 대신한 날: 4.19 혁명과 복종의 대가
바다가 거부한 은폐
1960년 4월 11일 오전,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한 구의 시신이 떠올랐습니다. 오른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두개골 뒤편까지 관통된 상태였습니다. 스무 센티미터짜리 쇳덩어리가 열일곱 살 소년의 얼굴을 갈라놓았습니다. 김주열. 스물일곱 일 전, 도둑맞은 선거에 항의하다 자취를 감춘 마산상고 학생이었습니다. 경찰은 증거를 바다에 수장시키려 했지만, 바다는 공범이 되기를 거부했습니다.
그 한 장의 사진—정권이 침묵을 지키기 위해 무엇까지 할 수 있는지를 증명하는 소년의 파괴된 얼굴—이 이승만(1875–1965) 12년 통치의 겉가죽을 갈랐습니다. 2주 안에 10만 명 넘는 시민이 거리를 메웠고, 16일 뒤 독재자는 호놀룰루로 달아나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66년이 지난 오늘, 4.19 혁명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단순히 무슨 일이 있었느냐가 아닙니다. 국민의 복종이 스스로를 억압하는 도구로 전환되는 정확한 순간은 언제인가—바로 이것입니다.
도둑맞은 선거의 설계도
이승만은 어느 날 갑자기 권좌를 찬탈한 것이 아닙니다. 개헌에 개헌을 거듭하며 민주주의의 내부를 조금씩 비워냈고, 헌법이라는 껍데기 안에 자신의 사적 의지만 남겨놓았습니다. 1960년에 이르러 그는 이미 두 차례 헌법을 고쳐 대통령 연임의 길을 열어놓은 상태였습니다.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는 민주주의 연극의 정점이자, 가장 조악한 공연이었습니다.
부정의 수법은 교묘하기보다는 노골적이었습니다. 자유당은 투표소가 열리기도 전에 전체 유권자의 40퍼센트에 해당하는 표를 투표함에 미리 채워넣었습니다. 유권자들은 당 관계자의 감시 아래 공개적으로 기표를 강요받았고, 야당 참관인들은 개표소에서 물리적으로 쫓겨났습니다. 이승만의 공식 득표율, 88.7퍼센트. 이 숫자는 누군가를 납득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굴복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3.15 부정선거가 평범한 권위주의와 구별되는 지점이 바로 이 과잉 연출에 있습니다. 유능한 독재자라면 그럴듯한 당선 격차를 조작합니다. 이승만은 터무니없는 숫자를 만들었습니다. 그 메시지는 «내가 이겼다»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해도 너희는 받아들일 것이다»였습니다. 선거는 정치적 사건이라기보다 한 국가 전체에 부과된 충성 심사였습니다.
국가가 «질서»라고 부르는 폭력
3월 15일 밤 마산 시민들이 부정선거에 항의하며 거리로 나서자, 경찰은 총을 쏘았습니다. 그날 밤 최소 8명이 숨졌고, 김주열도 그때 사라졌습니다. 정권의 대응은 권위주의적 위기관리의 상투적 문법을 따랐습니다—부인하고, 책임을 돌리고, 외부 세력을 탓합니다. 이승만 정부는 시위를 공산주의자의 침투 탓으로 돌렸는데, 이 반사적 반응은 시위대에 관해서보다 정권 자체의 상상력의 빈곤에 관해 더 많은 것을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바다가 증언을 보내왔습니다. 4월 11일, 최루탄이 박힌 채 부풀어 오른 김주열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 떠올랐을 때, 그 사진은 어떤 검열 장치도 막을 수 없는 속도로 전국에 퍼졌습니다. 그것은 어떤 정치 팸플릿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해냈습니다. «국가폭력»이라는 추상을 참혹하고 부인할 수 없는 구체로 바꿔놓은 것입니다.
4월 19일—혁명에 이름을 부여한 바로 그 날—10만 명이 넘는 학생과 시민이 서울의 경무대를 향해 행진했습니다. 경찰의 대응은 명확했습니다. 보건사회부 발표에 따르면 이날 186명이 사망하고 약 6,000명이 부상당했습니다. 초등학생도 희생자 가운데 있었습니다. 확인된 최연소 희생자는 하교 길에 광화문 근처에서 유탄에 맞은 수송초등학교 6학년 학생이었습니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는 다른 세기, 다른 대륙에 관해 쓰면서 폭력은 권력을 파괴할 수 있지만 결코 창조할 수는 없다고 통찰한 바 있습니다. 이승만 정권은 그 명제를 실시간으로 입증했습니다. 군중을 향해 발사된 총알 하나하나가 질서를 복원한 것이 아니라 정권에 남아 있던 정당성을 한 단위씩 깎아냈습니다. 제 나라의 아이들에게 총을 쏘는 국가는 이미 자신이 아무것도 통치하지 못한다고 자백한 것입니다.
공범 관계의 붕괴
계엄이 선포되었습니다. 군인들이 서울 거리에 배치되었습니다. 잠시 동안 정권은 충분한 군사력의 존재가 정치적 권위의 대체물로 기능할 수 있다고 믿는 듯했습니다. 그럴 수 없었습니다. 4월 25일, 약 300명의 대학교수들이 «학생의 피를 보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서울 거리를 행진했습니다. 시위대를 해산하라는 명령을 받은 군대는 발포를 거부했습니다. 그 거부가 혁명에서 가장 결정적인 행위였습니다—영웅적이어서가 아니라, 모든 독재 정권이 궁극적으로 무너지는 메커니즘을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어떤 정권도 무력만으로 통치하지 않습니다. 수천 명의 평범하고 눈에 띄지 않는 순응으로 통치합니다. 부정 투표용지를 처리하는 관료, 발포 명령에 따르는 경찰, 기사를 묻어버리는 기자, 침묵을 유지하는 교수. 이승만의 권력은 탱크 위에 서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런 작은 항복들의 누적된 무게 위에 서 있었습니다. 교수들이 행진하고 군인들이 총구를 내렸을 때, 그들은 반대편에 새로운 힘을 보탠 것이 아닙니다. 정권에 빌려주었던 동의를 회수한 것입니다. 빌린 동의에 의존하는 정권은 그것이 반환되는 순간을 견딜 수 없습니다.
4월 26일, 이승만은 하야를 발표했습니다. CIA의 안내를 받아 대기 중인 비행기에 올라탄 그는 하와이로 떠났고, 5년 뒤 그곳에서 망명자로 죽었습니다. 그의 퇴장은 섬뜩할 만큼 조용했습니다—재판도, 청산도, 186명의 목숨에 대한 공적 해명도 없었습니다. 항구의 죽은 소년으로 시작된 혁명은, 비행기에 오르는 늙은 독재자로 끝났습니다.
죽은 자가 산 자에게 여전히 묻는 것
4.19 혁명은 경외와 아쉬움이 뒤섞인 목소리로 흔히 «미완의 혁명»이라 불립니다. 혁명이 열어놓은 제2공화국은 채 1년을 버티지 못하고 1961년 5월 16일 박정희의 군사 쿠데타에 무너졌습니다. 이승만의 독재를 가능케 했던 구조적 조건들—집중된 행정 권력, 순응적인 군부, 민주주의보다 안정을 우선시하는 냉전의 지정학—은 대부분 그대로 남았습니다.
그러나 미완이라고 부르는 것은 혁명을 오직 제도적 결과로만 측정하는 것이며, 그 시절이 실제로 성취한 것을 놓치는 일입니다. 4월 19일 거리로 나선 시민들은 더 나은 정치 강령을 갖고 있어서 독재자를 쓰러뜨린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의 복종이야말로 독재자의 가장 신뢰할 만한 무기였다는 사실을 집단적으로, 거의 동시에 인식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혁명은 저항을 선택한 순간이 아니었습니다. 복종하기를 멈춘 순간이었습니다.
그 구별은 66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합니다. 선거가 추인 의식으로 공동화되는 곳이라면, 안보의 언어가 이견을 잠재우는 데 동원되는 곳이라면, 시민들이 안정을 위해 침묵하라는 요구를 받는 곳이라면—이승만이 완성한 그 구조는 여전히 가동 중입니다. 독재자는 당신에게 그를 사랑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다만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요구할 뿐입니다.
김주열의 시신이 떠오른 것은, 바다가 그것을 가라앉혀 둘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66년이 흐른 오늘, 같은 거래—당신의 침묵과 당신의 안전을 맞바꾸는—앞에서 우리 안에 무엇이 떠오르는가가, 그 186개의 생명이 지속되는 무언가를 남겼는지를 가늠하는 척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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