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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라스콜리니코프의 공리주의와 소냐의 인간적 대답

죄와 벌은 라스콜리니코프의 공리주의적 셈법을 뒤집고, 소냐를 통해 인간의 존엄이 왜 숫자로 처리될 수 없는지를 보여줍니다. 살인의 논리와 구원의 언어가 충돌하는 자리에서 도스토옙스키의 질문이 오늘도 다시 살아납니다.
죄와 벌 - 라스콜리니코프의 공리주의 | 소냐와 인간의 존엄

죄와 벌: 라스콜리니코프의 공리주의와 소냐의 인간적 대답

가난한 청년이 전당포 노파의 방까지 가는 계단과 거리를 셉니다. 일곱백서른 걸음. 이 숫자는 사소한 장식이 아닙니다.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에서 살인은 도끼보다 먼저 계산으로 시작됩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거리, 위험, 돈, 효용, 인간의 값을 재려 합니다. 그는 괴물처럼 악으로 걸어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는 계산을 사유로 착각한 젊은 지식인으로 무너집니다.

스프레드시트가 노동자의 운명을 정하고, 정책 문서가 누군가의 고통을 감당 가능한 비용으로 처리하며, 한 가정이 누구의 희생을 먼저 견딜지 따져야 하는 장면을 본 사람이라면 라스콜리니코프의 차가운 유혹을 압니다. 고통은 표 안에 들어가는 순간 조금 덜 불온해 보입니다. 노파 한 명, 가능한 선행 다수. 범죄 하나, 미래의 선 하나. 인간의 얼굴이 합계로 대체되는 순간, 도덕은 조용히 망가집니다.

 

그는 공리주의자가 아니라 운명을 셈하는 열병 환자입니다

라스콜리니코프가 공리주의를 믿었고, 도스토옙스키가 그것을 반박했다고 말하면 간편합니다. 그러나 그런 간편함은 페테르부르크의 좁은 골목처럼 금세 나쁜 방으로 이어집니다. 벤담(Jeremy Bentham, 1748–1832)과 밀(John Stuart Mill, 1806–1873)로 대표되는 고전적 공리주의는 행위가 행복을 늘리고 고통을 줄이는지를 묻습니다. 그 가장 강한 형태는 잔혹한 관습과 쓸모없는 형벌을 의심한 개혁의 언어였습니다.

벤담의 원리는 살인자에게 사적인 위대함을 허락하려고 나온 말이 아닙니다. 법과 제도와 처벌이 실제로 감각 있는 존재에게 어떤 결과를 낳는지 따져보려는 시도였습니다. 그런데 라스콜리니코프는 결과를 따지는 사유의 껍데기만 빌려와 그 안을 열병, 자존심, 모멸감, 그리고 ‘비범한 인간’이 되고 싶다는 욕망으로 채웁니다. 그는 모두를 동등하게 세어야 한다는 부담은 피한 채, 숫자의 권위만 차지하려 합니다.

나는 다만 ‘비범한’ 인간에게는 어떤 장애물을 넘어설 내적인 권리가 있다고 암시했을 뿐입니다. 공식적인 권리가 아니라, 자기 양심 안의 권리 말입니다.

— 도스토옙스키, 『죄와 벌』(1866)

여기서 결정적인 변형이 일어납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결과를 묻는 겸손한 태도가 아니라 예외가 되고 싶어 하는 허영을 실천합니다. 그는 역사에 이름을 남길 사람이기 때문에 피를 통과해도 되는지 묻습니다. 사실 그는 “어떻게 고통을 줄일 것인가”라고 묻지 않습니다. 그는 “나는 피를 지나갈 수 있는 특별한 인간인가”라고 묻습니다. 질문 자체가 이미 그를 배반합니다.

도스토옙스키는 이 배반을 몸속에 넣어버립니다. 라스콜리니코프의 이론은 깨끗한 추상으로 남지 않습니다. 그것은 더위, 구역질, 헛소리, 실신, 신경질, 고립으로 변합니다. 페테르부르크도 그와 함께 열을 냅니다. 이 도시는 배경이 아니라 압력솥입니다. 가난, 오만, 지적 취기가 한꺼번에 끓습니다. 손의 떨림을 견디지 못하는 이론은 이미 인간이라는 생물과의 접촉을 잃은 것입니다.

 

한 사람이 ‘쓸모 있는 재료’가 되는 순간, 누구나 희생 가능해집니다

전당포 노파 알료나 이바노브나는 모질고 인색하며 사회적으로 기생적인 인물처럼 제시됩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바로 그 추함에 기대어 섭니다. 만일 노파가 다정한 인물이었다면 그의 셈법은 너무 빨리 무너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살인을 저지르기 전에 먼저 노파를 범주로 바꿉니다. 장애물, 이, 더 큰 구상을 위한 작은 비용. 인간을 이렇게 이름 붙이는 순간 폭력은 이미 시작됩니다.

하지만 도스토옙스키는 계산이 얌전히 끝나도록 놔두지 않습니다. 리자베타가 들어옵니다. 그녀의 죽음은 소설의 윤리적 균열입니다. 그녀는 계획 안에 없었습니다. 이론에 들어맞지 않습니다. 폭력적 추상이 늘 숨기려 하는 나머지가 바로 그녀입니다. 리자베타가 나타나는 순간, 도덕적 방정식은 공포의 장면으로 바뀝니다. 두 번째 살인은 첫 번째 살인이 이미 무엇이었는지 보여줍니다. 인간이 기능으로 축소될 수 있다면, 버려도 되는 사람의 범위는 언제든 넓어집니다.

이 대목에서 소설은 오늘의 현실과 불편하게 맞닿습니다. 우리는 도끼를 들고 계단을 오르지는 않습니다. 대신 더 부드러운 말에 익숙합니다. 감당 가능한 손실, 생산성 격차, 시장 조정, 불가피한 구조조정. 언어는 라스콜리니코프의 방보다 깨끗합니다. 그러나 결과는 종종 같습니다. 누군가의 상처가 다른 누군가의 미래를 위한 입장료처럼 취급됩니다.

가장 위험한 계산은 잘못 세는 계산이 아닙니다. 애초에 누구를 셈에서 제외할지 정해놓은 계산입니다. 그러므로 라스콜리니코프의 죄는 살인만이 아닙니다. 그는 인간의 가치를 자기 혼자 심사하는 사적 법정을 세우려 했습니다. 판사도 자신, 역사도 자신, 수혜자도 자신입니다. 이보다 더 외로운 오만이 있을까요.

 

소냐는 이론이 되지 않음으로써 대답합니다

소냐 마르멜라도바는 사회적 낙인이 찍힌 인물로 등장합니다. 그녀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성매매로 내몰렸습니다. 사회는 그녀를 타락한 사람으로 읽습니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는 그녀를 아직 볼 줄 아는 사람으로 씁니다. 이것은 감상주의가 아닙니다. 소냐는 강하지도, 많이 배우지도, 보호받지도 못했습니다. 그녀는 보통의 의미에서 논쟁으로 라스콜리니코프를 이기지 않습니다. 그녀는 망가진 삶이 쓸모없는 삶이라는 전제를 거부함으로써 그를 이깁니다.

이 거부가 중요한 이유는 라스콜리니코프의 셈법이 거리두기에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노파를 온전한 사람으로 마주하지 않을 때만 죽일 수 있습니다. 소냐는 그 거리를 무너뜨립니다. 그녀는 고백을 구경거리로 삼는 심판자처럼 듣지 않습니다. 상처 입은 한 사람이 또 다른 상처 입은 사람을 그의 거짓말 속에 버려두지 않겠다는 방식으로 듣습니다. 그녀의 연민은 봐주기가 아닙니다. 그녀는 진실, 공개적 고백, 예외가 되려는 환상에서 내려올 것을 요구합니다.

지금 곧 네거리로 가세요. 사람들에게 절하고, 당신이 더럽힌 땅에 입 맞추고, 온 세상에 큰소리로 말하세요. ‘나는 살인자입니다!’라고요.

— 도스토옙스키, 『죄와 벌』(1866)

이 자비 안의 엄격함을 보아야 합니다. 소냐는 “스스로를 용서하고 지나가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흐릿한 위로를 건네지 않습니다. 그녀는 죄책이 다시 공동의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고 요구합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사람들이 들을 수 있는 곳에서 말해야 합니다. 그의 범죄가 다른 사람들을 열등한 재료로 치워버린 고립된 정신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고백은 후회의 장식이 아닙니다. 홀로 높아진 자아가 다시 인간들 사이로 돌아오는 첫 동작입니다.

그래서 소냐는 이성의 반대편에 있지 않습니다. 그녀는 취약함과 끊어진 이성을 바로잡습니다. 그녀의 대답은 반지성주의가 아닙니다. 오히려 라스콜리니코프의 이론보다 훨씬 정직합니다. 그 이론이 빼버린 것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의존, 수치, 굶주림, 다정함, 그리고 어떤 계산도 한 사람의 내면을 완전히 소유할 수 없다는 집요한 사실 말입니다.

 

실천의 문제는 숫자를 쓰되 사람을 숫자로 만들지 않는 일입니다

그렇다고 결과를 따지는 모든 사유를 버릴 수는 없습니다. 공적 삶에는 계산이 필요합니다. 예산, 병원, 기후 정책, 복지 제도, 법원, 학교는 모두 부족한 조건에서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계산 자체를 거부하는 태도는 때로 혼란의 비용에서 멀리 떨어진 사람들의 특권이 되기도 합니다. 문제는 라스콜리니코프가 셈을 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는 위에서, 혼자, 몰래 셈했습니다.

더 인간적인 도덕적 지성은 다른 자리에서 시작합니다. 누가 계산 안으로 들어오는가. 누가 비용을 치르는가. 약속된 미래는 누구에게 돌아가는가. 누가 낭비라는 이름을 받고 우리의 잠을 방해하지 않도록 치워졌는가. 숫자는 고통을 밝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통받는 사람의 의미를 다 담을 수는 없습니다. 존엄은 효율 뒤에 붙는 장식이 아닙니다. 효율이 더 세련된 잔혹함으로 바뀌지 않게 막는 조건입니다.

조직, 가정, 회사, 교실, 공론장 안에 서 있는 독자에게 소냐의 요구는 조용히 실천적입니다. 어떤 희생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받아들이기 전에, 그 주장 속에서 작아진 사람 앞에 잠시 멈추어야 합니다. 그 사람에게 다시 이름을 돌려주어야 합니다. 약속된 선이 누군가의 침묵을 요구하는지 살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 미래는 이미 어딘가에서 더럽혀졌을지 모릅니다.

 

아직 끝나지 않은 떨림

마지막에 라스콜리니코프는 논쟁에서 이겨서 구원받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 예외성의 성벽이 금이 갈 때, 소냐의 오래 견디는 현존이 그의 경멸보다 오래 남을 때 변하기 시작합니다. 도스토옙스키는 깔끔한 윤리 공식 하나를 건네지 않습니다. 그는 더 어려운 훈련을 남깁니다. 결과를 치열하게 생각하되, 눈앞의 사람 얼굴을 포기하지 않는 일입니다.

누군가의 계획 속에서 숫자로 처리된 적 있는 사람은 어떤 철학자보다 빨리 소냐를 이해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계획을 세워본 적 있는 사람은 라스콜리니코프가 생각보다 가까이 있다는 사실에 조금 불편해질 것입니다. 소설은 아직도 네거리 어딘가에 서서 묻습니다. 우리는 어떤 지성을 도덕적이라고 부를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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