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더스와 아리스토텔레스 — 소유의 시대에 굶주린 손
손은 원래 움켜쥐기보다 닿기 위해 존재합니다. 빵을 들고, 타인의 어깨를 다독이고, 흙을 만지고, 누군가의 체온을 건네받는 기관입니다. 그런데 마이더스의 손은 그 가장 오래된 관계의 기관을 소유의 기계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닿는 모든 것이 황금이 되는 순간, 손은 풍요의 도구가 아니라 세계를 죽이는 장치가 됩니다.
오비디우스(Ovid, BCE 43–CE 17/18)가 전한 신화에서 마이더스는 처음에는 환호합니다. 그러나 곧 음식도 물도 손에 닿는 순간 금속으로 굳어 버립니다. 많아졌는데 먹을 수 없고, 가졌는데 살 수 없는 상태입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신화는 욕망의 도덕극을 넘어 존재론적 비극이 됩니다. 축적이 삶을 대신하는 순간, 풍요는 곧 기아가 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붙인 이름
화폐를 풍족히 가진 자가 정작 삶의 기본 양식조차 결핍할 수 있다는 것은 기이한 일이다… 전설 속의 유명한 마이더스처럼, 그의 채울 수 없는 탐욕의 기도 탓에 차려진 모든 음식이 황금으로 변해 버렸으니.
—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BCE 384–322)는 여기서 두 개의 경제를 구분합니다. 하나는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을 마련하는 경제이고, 다른 하나는 끝없이 더 많이 가지려는 축적의 기술입니다. 전자에는 ‘충분함’이라는 경계가 있지만, 후자에는 경계가 없습니다. 마이더스의 비극은 가난이 아니라, 무엇이 삶을 살게 하는 것인지 구분하는 감각 자체를 잃어버린 데 있습니다.
우리 시대의 황금 손
문제는 이 신화가 고대의 우화로 끝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오늘의 황금 손은 반짝이지 않고 빛납니다. 스마트폰 화면, 성과 대시보드, 조회수 그래프, 생산성 앱의 숫자로 말입니다. 산책은 기록이 되고, 우정은 네트워크가 되며, 휴식은 다시 자기계발의 연료로 계산됩니다. 손은 여전히 바쁘게 움직이지만, 더는 세계에 닿지 못합니다. 만지는 모든 것을 가치로 환산하는 습관이 이미 몸의 문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결핍은 가난의 다른 이름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데이터와 효율과 최적화로 가득 찬 궁전 안에서도 굶주릴 수 있습니다. 인정, 여유, 쓸모로 환산되지 않는 관계, 그냥 존재하는 시간에 대한 감각이 먼저 메말라 갑니다. 소유의 손은 많이 붙잡을수록 더 적게 살아갑니다.
충분함을 회복하는 일
오비디우스의 신화에서 마이더스의 저주는 씻겨 나갑니다. 이 대목은 중요합니다. 소유의 손은 운명이 아니라 습관이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거대한 영웅담이 아니라, 모든 접촉이 수익을 내야 한다는 강박을 거부하는 작은 훈련일지 모릅니다. 사진보다 식사를, 노출보다 대화를, 효율보다 돌봄을 잠시 앞세우는 일 말입니다.
충분함은 패배가 아닙니다. 그것은 삶을 다시 삶 쪽으로 돌려놓는 경계입니다. 손이 다시 붙잡기만 하는 기관이 아니라, 건네고 받아들이는 기관이 되게 하는 문명적 절제이기도 합니다.
마이더스는 황금을 몰라서 무너진 것이 아니라, 황금이 빵의 자리를 대신하도록 내버려 두었기에 무너졌습니다. 지금 우리의 손은 무엇을 살리기보다 먼저 값으로 바꾸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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