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토피아가 제 새끼를 삼킬 때: 유니버스 25의 섬뜩한 예언
너무 완벽해서 살아남을 수 없었던 낙원
1968년, 미국의 동물행동학자 존 B. 칼훈(John Bumpass Calhoun, 1917–1995)은 그 어떤 쥐도 거부할 수 없는 세계를 지었습니다. 메릴랜드에 자리한 국립정신건강연구소(NIMH) 실험실에, 가로세로 약 120센티미터 크기의 정육면체 우리를 설치했습니다. 256개의 개별 아파트, 무한한 먹이와 물, 풍부한 둥지 재료, 완벽한 온도 관리. 질병은 사전에 차단되었고, 포식자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굶주림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했습니다. 칼훈은 이 장치를 “사망 억제 환경(Mortality-Inhibiting Environment for Mice)”이라 불렀습니다. 사람들은 그냥 “쥐의 천국”이라 불렀습니다.
칼훈은 수컷 네 마리와 암컷 네 마리를 이 낙원에 넣고 기다렸습니다. 이후 5년에 걸쳐 펼쳐진 것은 번영의 서사가 아니라 슬로 모션으로 진행된 절멸이었습니다. 단 한 마리도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그의 스물다섯 번째 설치류 유토피아 실험, 이른바 “유니버스 25(Universe 25).” 그 안에 묻힌 교훈은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 문명의 자신감을 갉아먹고 있습니다.
풍요의 곡선, 그리고 균열
처음 몇 달은 생물학 교과서 그대로였습니다. 창시 개체들은 적응기를 거치고, 교미하고, 석 달 만에 첫 새끼를 낳았습니다. 개체 수는 55일마다 두 배로 불어났습니다. 315일째, 약 620마리. 이상적 조건에서의 지수적 성장을 보여주는 교본 같은 풍경이었습니다.
그러나 칼훈은 이미 스물네 번의 선행 실험을 거친 사람이었습니다. 변곡점이 올 것을 알고 있었고, 그것이 결핍에서 오지 않으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이 우리는 이론적으로 4,000마리를 수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개체 수는 그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 약 2,200마리에서 정점을 찍었고, 560일째를 기점으로 다시는 회복하지 못할 하강을 시작했습니다.
위기는 생물학적 신호가 아니라 행동을 통해 자신을 알렸습니다. 한때 영역을 지키던 지배적 수컷들은 끊임없이 밀려드는 도전자들에게 지쳐 나갔습니다. 싸움에서 진 수컷들은 밀폐된 공간 안에서 도망칠 곳이 없었습니다. 칼훈이 “낙오자(dropouts)”라 부른 이 쥐들은 우리 중앙의 개방된 공간에 모여들었고, 온몸에 상처투성이인 채로 간헐적으로 목적 없는 폭력을 분출했습니다. 수유 중인 어미들은 반복적으로 침입하는 수컷들에 시달리다 새끼를 운반하던 도중에 버리기 시작했습니다. 일부는 자기 새끼를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포유류의 삶을 가능하게 만드는 사회적 직물이 한 올 한 올 풀려 나가고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자들”과 욕망의 소멸
등골이 서늘해지는 세대가 등장한 것은 그다음이었습니다. 이 혼돈 속에서 태어난 쥐들은 사회적 유대를 형성하는 법 자체를 배우지 못했습니다. 암컷들은 빈 아파트에 틀어박혀 구애를 거부했습니다. 수컷들은 강박적인 자기 그루밍에 빠져들었습니다. 몇 시간이고 자기 털을 핥고 다듬어 윤기가 흘렀지만, 다른 쥐들의 몸에 새겨진 상처나 오물은 그들의 몸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칼훈은 이 쥐들에게 아이러니가 뚝뚝 떨어지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아름다운 자들(the beautiful ones).”
털은 흠잡을 데 없이 깨끗했습니다. 눈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싸우지 않았고, 교미하지 않았으며, 어떤 형태의 사회적 교류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먹고, 자고, 몸단장을 했습니다. 연구자들이 이 쥐들을 꺼내 정상적인 개체군 속에 넣어 보았을 때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복잡한 사회적 행동 능력이 억압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아예 발달한 적이 없었습니다. 몸은 성체였지만, 사회적 동물로서의 모든 자질에서 이 존재들은 영구적으로 미성숙한 상태에 갇혀 있었습니다.
칼훈은 이 집단적 현상을 “행동의 수렁(behavioral sink)”이라 명명했습니다. 사회적 행동의 중력 붕괴이자, 어떤 회복도 불가능한 추락이었습니다. 600일째, 새끼는 태어나도 며칠을 넘기지 못했습니다. 1973년 봄, 유니버스 25는 텅 비었습니다. 같은 해 발표된 논문 «Death Squared»에서 칼훈은 이 절멸을 육체적 죽음이 아닌 “영적 죽음”이라 규정하면서, 성경 요한계시록의 “둘째 사망” 개념을 빌려 왔습니다. 의미의 소멸이 생물학적 종말에 앞서 도래한다는 선언이었습니다.
모두가 자기 것이라 주장한 실험
유니버스 25는 그 시대의 불안을 비추는 로르샤흐 검사지가 되었습니다. 1970년대 환경주의자들은 폴 에를리히의 «인구 폭탄»과 나란히 놓으며 인구 과잉의 종말론적 증거로 활용했습니다. 보수 논객들은 아름다운 자들을 복지 국가가 만들어낸 수동성의 상징으로 읽었습니다. 진화심리학자들은 자연선택의 부재가 초래한 “돌연변이 붕괴”를 주장했고, 문화전쟁의 전사들은 전통적 성역할의 붕괴에 관한 우화를 발견했습니다.
모든 해석에는 통찰의 씨앗이 있고, 투사(投射)의 산맥이 있습니다. 환경주의적 독해는 단순한 사실 하나에 부딪힙니다. 쥐들은 자원이 부족해서 멸망한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 한 마리가 죽을 때까지 먹이와 물은 넘쳐났습니다. 복지 국가 비판도 마찬가지로 허약합니다. 행동의 수렁은 투쟁이 너무 적어서가 아니라 경쟁이 압도적이고 탈출 불가능했기 때문에 폭발했습니다. 낙오자 쥐들은 매일 싸움에서 졌습니다. 지배적 수컷들은 싸우다 남은 것이 없어질 때까지 싸웠습니다.
이 서로 충돌하는 해석들이 공유하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실험의 가장 불편한 함의를 정면으로 마주하기를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유니버스 25는 물질적으로 부족한 것이 있어서 붕괴한 것이 아닙니다. 구조 없는 풍요가, 의미를 생산하는 사회적 건축물 자체를 파괴했기 때문에 붕괴한 것입니다.
생존이 보장된 세계에서, 무엇이 할 만한 일로 남는가
여기서부터 이 실험은 쥐에 관한 이야기이기를 멈춥니다. 털과 정육면체 우리를 걷어내면, 철학이 수천 년간 완전히 해결하지 못한 채 맴돌아온 물음이 하나 드러납니다. 필요를 박탈당한 삶에서도 목적은 생성될 수 있는가.
유니버스 25의 지배적 수컷들은 더 강한 적에게 영역을 빼앗긴 것이 아닙니다. 아무도 사라지지 않는 시스템이 무한히 재생산하는 도전자들에게 기진맥진한 것입니다. 낙오자들은 무기력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역할을 박탈당한 것입니다. 아름다운 자들은 사회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사회가 이미 읽을 수 있는 관계의 문법으로 기능하기를 멈춘 세계에서 태어난 것입니다.
쥐가 곧 우리라고 주장하지 않더라도, 구조적으로 유사한 무언가를 동시대의 삶에서 관찰할 수는 있습니다. 선진국 전역에서 청년층은 전례 없는 연결성에도 불구하고 기록적인 외로움을 보고합니다. 물질적 풍요가 역사상 가장 높은 나라들에서 출생률이 추락합니다. 사회학자들이 “절망의 죽음(deaths of despair)”이라 부르는 현상—자살, 과다복용, 알코올 관련 사망—은 궁핍한 이들 사이에서만이 아니라 기본적 필요가 충족된 계층에서도 확산되고 있습니다. 유비는 정확하지 않지만, 그 공명을 온전히 무시하기도 어렵습니다.
다만 이 유비에는 경계가 필요합니다. 칼훈의 기록물을 집중적으로 연구한 의학사학자 에드먼드 램즈든(Edmund Ramsden)은 이렇게 지적합니다. 인간은 지능과 적응력, 그리고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재구성하는 능력을 통해 쥐에게는 불가능한 방식으로 과밀에 대처할 수 있다고. 심리학자 조너선 프리드먼(Jonathan Freedman)의 1970년대 실험에서도 밀도가 인간 피험자에게 눈에 띄는 부정적 영향을 미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쥐가 아닙니다. 제도를 만들고, 규범을 재발명하고, 연대의 새로운 형식을 창안합니다. 그러나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반드시 하게 될 것이라는 보장은 아닙니다.
의미의 건축학
칼훈 자신은 유니버스 25를 예언으로 읽기를 거부했습니다. 이후의 실험들에서 그는 쥐에게 추가적인 방과 새로운 터널 파기 기회를 제공하면 병리적 행동이 극적으로 줄어든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만년의 그는 더 나은 건축 설계를 옹호하는 데 헌신했습니다. 감옥, 병원, 도시를 위한 설계. 1979년 보고서에서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건조 환경의 더 나은 설계에 기여하는 것보다 인간 복지에 더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지적 노력의 영역은 없다.” 칼훈의 신념은 붕괴의 필연성이 아니라, 의미를 지탱하는 환경을 설계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있었습니다.
당겨볼 가치가 있는 실은 바로 이것입니다. 행동의 수렁은 밀도 그 자체가 아니라 기능적 사회적 역할의 파괴에 의해 촉발되었습니다. 모든 영역적 경계가 방어 불가능해졌을 때, 모든 양육의 노력이 침입에 의해 중단되었을 때, 모든 어린 쥐가 사회적 삶의 문법을 학습하지 못한 채 성체가 되었을 때, 개체군은 단순히 줄어든 것이 아닙니다. 개체군이 되는 법 자체를 잊어버린 것입니다.
여기서 전이 가능한 통찰이 있다면, 그것은 풍요가 우리를 멸망시킨다는 경고가 아닙니다. 풍요만으로는 사회를 지탱하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인식입니다. 그 너머에 무언가가 필요합니다. 상호적 의무의 구조, 개인이 서로를 인정하는 그물망 속에서 자기 자리를 찾을 수 있게 해주는 역할의 건축물. 그 건축물이 무너질 때, 물질적 풍요는 무의미해집니다. 아름다운 자들의 털은 흠잡을 데 없이 깨끗했고, 삶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유니버스 25가 텅 빈 지 반세기가 넘었습니다. 가로세로 120센티미터의 정육면체는 오래전에 해체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침묵 속 어딘가에서 하나의 질문이 남아 진동하고 있습니다. 쥐에 관한 질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위해 짓고 있는 낙원에 관한 질문, 그리고 그 문을 열고 들어갈 이유를 우리가 기억해 두었는지에 관한 질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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