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taraxia Explained: Epicurus and the Philosophy of Pleasure
아타락시아란 무엇인가: 에피쿠로스와 쾌락의 철학
아타락시아는 흔히 마음의 평정, 동요 없음, 불안에서 벗어난 상태로 풀이됩니다. 맞는 설명입니다. 그러나 조금 더 깊이 들어가야 합니다. 아타락시아는 기분 좋은 휴식이나 부드러운 위로의 이름이 아닙니다. 에피쿠로스(Epicurus, 341–270 BCE)의 철학에서 아타락시아는 거짓된 두려움과 끝없는 욕망에 휘둘리지 않는 마음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리스어 ataraxia는 흔들림이나 동요를 뜻하는 말에 부정의 의미가 붙은 표현입니다. 말 그대로 하면 ‘동요 없음’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무 감정도 없는 무감각이 아닙니다. 에피쿠로스가 말한 아타락시아는 삶을 마비시키는 평온이 아니라, 불필요한 공포가 힘을 잃은 뒤에 찾아오는 맑은 안정입니다. 아타락시아는 쾌락이 소란을 버리고 제자리로 돌아온 상태입니다.
이 지점에서 많은 오해가 생깁니다. 우리는 쾌락이라는 말을 들으면 더 맛있는 것, 더 비싼 것, 더 강렬한 자극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시장은 매일 그렇게 속삭입니다. 더 사면 더 행복하고, 더 보이면 더 존재하며, 더 많이 누리면 더 잘 산다는 식입니다. 에피쿠로스의 쾌락은 이 상식과 반대편에 서 있습니다. 그는 쾌락을 방탕의 허가증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욕망을 줄이고, 두려움을 걷어내며, 몸의 고통과 마음의 동요가 사라진 상태를 가장 안정된 쾌락으로 보았습니다.
아타락시아는 잠든 마음이 아니라 덜 끌려다니는 마음입니다
아타락시아는 세상일에 무심해지는 태도가 아닙니다. 감정을 죽이고 아무 일에도 반응하지 않는 냉담함도 아닙니다. 에피쿠로스가 겨냥한 것은 마음을 지배하는 불필요한 소음입니다. 남보다 뒤처질지 모른다는 불안, 죽음 뒤의 처벌에 대한 공포, 끝없이 더 가져야 안전해진다는 믿음, 인정받지 못하면 무가치해진다는 압박이 그 소음입니다.
에피쿠로스 윤리학에서 아타락시아는 아포니아, 곧 몸의 고통이 없는 상태와 함께 행복한 삶의 조건을 이룹니다. 몸은 괴롭지 않고, 마음은 겁에 질려 있지 않은 상태입니다. 얼핏 빈약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행복을 끊임없는 흥분이나 특별한 사건으로 생각하는 시대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에피쿠로스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오래 지속될 수 있는 쾌락은 무엇입니까. 잃어버릴까 봐 매 순간 불안해지는 쾌락은 정말 쾌락입니까.
목마를 때 마시는 물, 배고플 때 먹는 빵, 믿을 수 있는 친구와 나누는 대화, 죽음과 신의 처벌에 대한 공포에서 조금씩 벗어나는 마음. 에피쿠로스에게 이것들은 초라한 대체품이 아닙니다. 삶을 지탱하는 충분함의 질서입니다. 그는 좋은 음식이나 세련된 즐거움을 모두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것들이 없으면 자신을 잃는 상태를 경계했습니다.
아타락시아는 삶의 움직임이 사라진 상태가 아닙니다. 삶을 미치게 몰아가는 거짓 주인이 물러난 상태입니다.
에피쿠로스는 쾌락을 과잉이 아니라 자유의 문제로 바꾸었습니다
에피쿠로스는 쾌락주의자입니다. 그러나 이 말을 너무 빨리 이해하면 거의 반드시 틀립니다. 그는 모든 생명체가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한다고 보았습니다. 그에게 쾌락은 선한 삶의 기준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는 잔치와 사치의 철학자가 아니었습니다. 아테네의 정원으로 알려진 그의 공동체는 호화로움보다 검소함으로 유명했습니다.
핵심은 쾌락의 종류를 구별하는 데 있습니다. 무언가 부족할 때 그것을 채우는 과정에서 생기는 쾌락이 있습니다. 배고플 때 먹고, 목마를 때 마시는 쾌락입니다. 반면 결핍이 가라앉은 뒤의 안정된 쾌락이 있습니다. 에피쿠로스는 후자에 더 큰 무게를 두었습니다. 욕망을 채우는 순간의 자극보다, 더 이상 끌려가지 않아도 되는 상태가 더 깊은 쾌락이라는 것입니다.
현대인은 이 말을 꽤 불편하게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강도가 높은 경험을 더 가치 있는 경험으로 착각하도록 길들여졌습니다. 더 빠른 기기, 더 넓은 집, 더 높은 지위, 더 많은 조회 수, 더 젊어 보이는 몸. 욕망은 목표를 달성할수록 잠잠해지지 않고 다음 목표를 내놓습니다. 끝이 없는 욕망은 사람을 계속 출발선에 세웁니다. 도착한 줄 알았는데, 안내판은 언제나 더 앞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에피쿠로스는 욕망을 나눕니다. 자연스럽고 필요한 욕망이 있습니다. 먹을 것, 거처, 몸의 안전, 우정이 여기에 속합니다. 자연스럽지만 꼭 필요하지 않은 욕망도 있습니다. 더 맛있는 음식이나 세련된 편안함이 그런 예입니다. 그리고 헛된 욕망이 있습니다. 무한한 부, 끝없는 명성, 타인 위에 서려는 권력욕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욕망을 증오하지 않습니다. 다만 어떤 욕망이 충족 가능한지, 어떤 욕망이 주인 행세를 시작하는지 묻습니다.
죽음의 두려움은 에피쿠로스가 가장 먼저 다루려 한 마음의 소란입니다
에피쿠로스가 보기에 인간은 쾌락이 부족해서만 불행한 것이 아닙니다. 불필요한 두려움이 마음을 점령하기 때문에 불행해집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죽음의 두려움입니다. 에피쿠로스는 영혼을 물질적인 것으로 보았습니다. 몸이 흩어지면 영혼도 흩어지고, 감각도 사라집니다. 그렇다면 죽음은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닙니다. 경험이 끝나는 자리입니다.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믿는 데 익숙해지십시오. 선과 악은 감각을 전제로 하는데, 죽음은 모든 감각의 상실이기 때문입니다.
— 에피쿠로스,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기원전 3세기경)
이 문장은 위로라기보다 훈련에 가깝습니다. 에피쿠로스는 사후 세계의 보상이나 재회를 약속하지 않습니다. 죽음 뒤에 심판이 기다린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더 차갑고 더 정직한 방식으로 묻습니다. 우리가 존재할 때 죽음은 아직 오지 않았고, 죽음이 왔을 때 우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죽어 있음 자체를 내가 겪을 고통처럼 상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 논증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을 없애지는 못합니다. 철학은 상실의 통증을 버튼처럼 끄는 장치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 논증은 죽음에 대한 상상을 조금 바꿉니다. 죽음은 우리가 어딘가에서 계속 겪어야 할 고문이 아니라, 감각과 의식의 끝입니다. 두려움의 많은 부분은 사실 죽음 자체보다 죽음에 대해 덧붙인 이야기에서 생깁니다.
신에 대한 두려움도 마찬가지입니다. 에피쿠로스는 신을 조롱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신들이 인간의 일에 분노하고 개입하며 벌을 내린다는 믿음을 거부했습니다. 참으로 복된 존재라면 인간의 사소한 일에 화를 내며 우주를 감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천둥은 처벌의 신호가 아니고, 병은 반드시 죄의 결과가 아니며, 불행은 신의 장부에 적힌 채무가 아닙니다. 이 생각은 고대인에게도, 오늘의 우리에게도 꽤 대담합니다.
평정은 혼자만의 안락함이 아니라 우정과 정의를 필요로 합니다
아타락시아를 개인적 안락으로만 이해하면 에피쿠로스를 너무 작게 읽는 셈입니다. 그는 정치적 야망을 조심하라고 말했습니다. 공적 명예와 권력 경쟁이 마음을 쉽게 뒤흔든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말한 삶은 자기만 챙기는 고립이 아닙니다. 에피쿠로스에게 우정은 행복의 필수 조건입니다.
친구는 세상을 덜 위협적인 곳으로 만듭니다. 모든 것을 해결해 주기 때문이 아닙니다. 혼자 감당해야 한다는 공포를 줄여 주기 때문입니다. 믿을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말하고 기억하는 일은 마음의 평정을 지탱합니다. 그래서 에피쿠로스의 정원은 사유의 장소이면서 생활의 공동체였습니다. 평온한 마음은 혼자 머릿속에서 만들어지는 순수한 기술이 아닙니다. 그것은 관계, 습관, 말, 식사, 신뢰 속에서 자랍니다.
정의도 같은 이유로 중요합니다. 에피쿠로스는 정의를 서로 해치지도 않고 해를 입지도 않기로 한 약속으로 이해했습니다. 매우 현실적인 설명입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날카로운 통찰이 있습니다. 부정의한 삶은 마음을 시끄럽게 만듭니다. 남을 해친 사람은 발각될까 두려워하고, 보복을 걱정하며, 신뢰를 잃습니다. 더 많이 차지했더라도 더 많은 불안을 떠안습니다.
오늘의 현실과도 닿아 있습니다. 우리는 욕망을 필요보다 빠르게 키우는 경제 속에 삽니다. 불안은 수익이 됩니다. 비교하게 만들고, 클릭하게 만들고, 갱신하게 만들고, 더 사게 만듭니다. 이런 세계에서 에피쿠로스의 말은 조용하지만 꽤 위험합니다. 그는 묻습니다. 지금 원하는 것이 정말 필요한 것입니까. 지금 두려워하는 것이 실제 위험입니까. 아니면 누군가가 당신을 더 쉽게 움직이게 하려고 심어 놓은 이야기입니까.
아타락시아는 정치 없는 마음관리로 줄어들 수 없습니다
현대 사회는 아타락시아를 개인용 안정제처럼 소비하고 싶어 합니다. 숨을 고르십시오. 욕심을 줄이십시오. 휴대전화를 내려놓으십시오. 물론 이런 실천은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면 에피쿠로스는 불안을 만든 질서에 봉사하는 조언자가 되고 맙니다.
에피쿠로스의 질문은 더 까다롭습니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 중 무엇이 실제이고 무엇이 학습된 공포입니까. 우리가 원하는 것 중 무엇이 삶에 필요하고 무엇이 인정 경쟁의 의상입니까. 사회가 끊임없이 불안을 생산한다면, 평정은 개인의 성취만으로 설명될 수 없습니다. 집세, 건강, 노동, 존엄, 안전이 흔들리는 사람에게 그저 평온하라고 말하는 것은 철학이 아니라 예의 바른 잔인함입니다.
그렇다고 에피쿠로스가 모든 책임을 바깥으로만 돌리게 하지는 않습니다. 불완전한 조건 속에서도 우리는 욕망을 살필 수 있습니다. 필요와 과시를 구분할 수 있습니다. 과잉의 명성을 거절할 수 있습니다. 거래처럼 작동하지 않는 우정을 만들 수 있습니다. 더 많이가 아니라 충분히라는 말을 다시 배울 수 있습니다. 그것은 거창한 영웅주의가 아닙니다. 오히려 매일의 작은 불복종입니다.
아타락시아는 두려움을 배운 쾌락이 다시 정돈되는 순간입니다
아타락시아는 욕망의 완전한 소멸이 아닙니다. 욕망을 훈련하는 일입니다. 죽음을 부정하는 태도도 아닙니다. 죽음을 우리가 겪을 고통처럼 상상하는 오류를 줄이는 일입니다. 세계를 외면하는 냉담함도 아닙니다. 세계가 판매하는 두려움에 매번 자신을 내주지 않겠다는 결심입니다.
에피쿠로스의 쾌락 철학은 놀랄 만큼 검소합니다. 그는 박수보다 친구를, 사치보다 충분함을, 끝없는 획득보다 자연스러운 한계를 더 신뢰했습니다. 이런 철학이 작아 보인다면, 어쩌면 우리가 너무 오래 확장을 삶의 증거로 착각해 왔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아타락시아라는 오래된 말은 오늘도 우리를 찌릅니다.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얻었지만, 덜 흔들리는 법은 충분히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타락시아는 팔려 오는 모든 두려움에 더 이상 마음을 임대하지 않는 쾌락입니다. 삶이 고통 없어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고통에 붙어 다니는 거짓 해석자들에게 덜 복종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쾌락의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여전히 조용히 급진적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첫 번째 사치는 풍요가 아닙니다. 필요하지 않은 것에 지배당하지 않는 자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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