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he Burnout Society by Byung-Chul Han: Achievement, Self-Exploitation, and Fatigue
한병철의 피로사회: 성과, 자기착취, 그리고 피로
"할 수 있습니다"라는 말에는 이상한 폭력이 숨어 있습니다. 겉으로는 격려입니다. 따뜻하고 민주적이며, 누군가의 가능성을 믿어주는 말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말은 조용히 명령문으로 바뀝니다. 할 수 있으니 해야 합니다. 더 잘할 수 있으니 아직 부족합니다. 멈출 수 있으나 멈추면 뒤처집니다.
한병철(Byung-Chul Han)의 『피로사회』가 지금도 읽히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피로를 개인의 체력 문제로 다루지 않습니다. 우울과 번아웃을 마음 관리의 실패로 돌리지도 않습니다. 그가 묻는 것은 훨씬 불편합니다. 어떤 사회가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몰아붙이게 만들고, 그 결과로 생긴 탈진마저 자기 책임으로 받아들이게 만드는가.
퇴근 뒤에도 메시지를 확인하고, 쉬면서도 죄책감을 느끼며, 취미마저 성과의 목록으로 바꾸는 사람들은 이 책의 독자이기 전에 이미 그 책의 현장에 살고 있습니다. 휴식은 삶의 일부가 아니라 다음 노동을 위한 충전으로 축소됩니다. 침묵은 여백이 아니라 비효율처럼 느껴집니다. 인간은 어느새 전원이 꺼지지 않는 기계처럼 자기 자신을 관리합니다.
금지의 사회가 물러난 자리에 성과의 사회가 들어섰습니다
한병철의 핵심 진단은 근대 사회의 권력이 얼굴을 바꾸었다는 데 있습니다. 과거의 규율사회는 금지의 언어로 작동했습니다. 하지 마라, 들어오지 마라, 복종하라, 처벌받을 것이다. 감옥, 병영, 학교, 공장 같은 장치들은 개인을 외부에서 통제했습니다. 권력은 눈에 보였고, 명령은 거칠었습니다.
그런데 후기 근대의 성과사회는 다른 방식으로 움직입니다. 이제 핵심 언어는 금지가 아니라 가능성입니다. "너는 할 수 있다"는 문장이 사회 전체를 떠돕니다. 문제는 이 긍정의 언어가 해방처럼 보인다는 점입니다. 누가 가능성을 싫어하겠습니까. 누가 자유롭게 자기 능력을 펼치라는 말을 억압이라고 의심하겠습니까.
"성과사회는 우울한 사람과 낙오자를 만들어냅니다."
— 한병철, 『피로사회』(2010)
한병철은 바로 그 지점을 찌릅니다. 권력이 더 이상 바깥에서만 명령하지 않을 때, 사람은 자신이 자유롭다고 믿으며 스스로를 착취합니다. 상사가 퇴근 뒤 전화를 하지 않아도, 우리는 먼저 메일함을 엽니다. 누가 감시하지 않아도, 우리는 자신의 부족함을 기록합니다. 채찍은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스마트폰 알림과 자기계발식 문장과 평가표 안으로 이사했을 뿐입니다.
성과주체는 스스로의 주인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스스로의 피고인이기도 합니다.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보다 나아져야 하고, 내일의 나는 오늘의 나를 증명해야 합니다. 삶은 프로젝트가 되고, 인간은 관리 대상이 됩니다. 자기 자신을 경영한다는 말은 멋져 보이지만, 그 말 안에서 인간은 언제나 투자 대비 수익을 묻는 존재로 줄어듭니다.
자기착취는 자유의 감각을 타고 들어옵니다
『피로사회』의 가장 서늘한 통찰은 자기착취가 타자에 의한 착취보다 더 효율적일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왜냐하면 자기착취에는 자유롭다는 감각이 따라붙기 때문입니다. 누가 나를 억압한다고 느끼면 저항의 언어가 생깁니다. 그러나 내가 나를 몰아붙인다고 믿으면 저항은 죄책감으로 바뀝니다. "사회가 과도하다"가 아니라 "내가 부족하다"가 됩니다.
이 논리는 일상에서 아주 조용하게 작동합니다. 프리랜서는 거절이 곧 생계의 위험처럼 느껴져 일을 더 받습니다. 직장인은 밤늦은 답장을 성실함의 표시로 여깁니다. 학생은 취미를 포트폴리오의 재료로 바꿉니다. 중년의 노동자는 저녁 식사 뒤에도 새로운 도구를 배웁니다. 순수한 호기심만은 아닙니다. 고용 가능성이 개인에게 떠넘겨진 시대의 불안이 그 등을 밀고 있습니다.
성과사회의 잔인함은 탈진을 사회의 과잉 요구가 아니라 개인의 관리 실패처럼 보이게 만든다는 데 있습니다. 번아웃에 이르면 사람들은 구조를 의심하기보다 자신의 수면, 식단, 감정, 시간표, 의지력을 점검합니다. 사회적 모순이 개인의 생활 관리 문제로 포장됩니다. 참으로 세련된 폭력입니다. 피가 흐르지 않는데도 사람은 닳아 없어집니다.
한병철이 말하는 긍정성의 과잉도 여기서 중요합니다. 긍정성은 낙관주의의 다른 이름이 아닙니다. 그것은 거절, 멈춤, 거리두기, 낯섦, 한계의 감각을 밀어내는 사회적 분위기입니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사회에서 우울한 사람의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말은 개인적 패배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그 말은 어쩌면 너무 많은 가능성의 명령에 질식한 사람이 내는 마지막 신호일 수 있습니다.
피로는 누구에게나 같지 않게 도착합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한병철의 진단은 강력하지만, 피로의 사회적 분배를 더 물어야 합니다. 모두가 피곤하다는 말은 맞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피곤한 것은 아닙니다. 고소득 전문직의 번아웃과 불안정한 노동 조건 속에서 몸이 닳는 사람의 피로는 같은 이름 아래 놓일 수 있어도 같은 현실은 아닙니다.
누군가는 회복을 구매할 수 있습니다. 상담, 휴직, 조용한 공간, 유연근무, 좋은 식사, 긴 휴가를 선택할 여지가 있습니다. 다른 누군가는 아픈 몸으로도 출근해야 합니다. 성과사회는 모두에게 같은 구호를 외치지만, 그 구호가 몸에 닿는 압력은 계급, 성별, 나이, 장애, 가족 돌봄의 조건에 따라 달라집니다. 피로가 보편적이라는 말이 피로의 불평등을 가려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한병철의 자기착취 개념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오늘의 자본주의는 바깥에서만 명령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욕망을 통과해 들어옵니다. "나다운 삶"은 시장성 있는 삶으로 번역되고, "창의성"은 측정 가능한 결과로 호출됩니다. 쉬라는 말조차 더 오래 일하기 위한 관리 기술로 바뀝니다. 휴식이 생산성의 하청업체가 되는 순간, 인간은 쉬면서도 일의 언어 안에 갇힙니다.
그래서 오늘의 피로에는 특유의 부끄러움이 붙습니다. 사람들은 그냥 피곤한 것이 아니라, 피곤해하는 자신을 못마땅해합니다. 잠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유한해도 된다는 허락이 필요합니다. 예전의 고해성사가 종교적 죄를 고백했다면, 오늘의 생산성 다이어리는 시간 낭비의 죄를 고백합니다. 오늘 나는 무엇을 끝내지 못했나. 어디서 나를 허비했나. 왜 더 나아지지 못했나.
멀티태스킹은 깊이가 아니라 흩어진 경계 상태입니다
한병철은 『피로사회』에서 멀티태스킹을 문명의 진보처럼 찬양하는 태도도 의심합니다. 여러 일을 동시에 처리하는 능력은 멋져 보이지만, 그것은 깊어진 정신의 표시라기보다 위협에 계속 반응해야 하는 경계 상태에 가까울 수 있습니다. 늘 연결된 사람은 더 깨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한곳에 머무를 능력을 잃어가는 중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하루를 떠올려보면 이 말은 꽤 정직하게 들립니다. 글을 읽는 중에 메시지가 오고, 메시지를 확인하는 중에 뉴스가 뜨며, 뉴스를 보는 중에 누군가의 삶이 화면에 나타납니다.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하고 자꾸 끊깁니다. 깊은 사유는 즉각적인 결과를 내놓지 않기 때문에 비생산적으로 보입니다. 느림은 어느새 무능의 표정으로 오해받습니다.
한병철이 말하는 깊은 심심함은 게으름의 미화가 아닙니다. 그것은 사유가 자기 호흡을 되찾는 시간입니다. 심심함은 비어 있는 시간이 아니라, 주의력이 사냥당하기를 멈추고 다시 모이는 문턱입니다. 이 시간이 사라지면 인간은 반응은 잘하지만 숙고는 어려운 존재가 됩니다. 클릭하고, 비교하고, 조정하고, 적응하지만, 왜 이 속도를 따라야 하는지는 묻지 못합니다.
주의력을 빼앗긴 사회는 산만한 사람을 만드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거부할 힘을 약화시킵니다. 멈추지 못하는 사람은 질문하기도 어렵습니다. 모든 틈이 알림과 비교와 평가로 채워질 때, 내면은 문을 잠글 수 없는 방처럼 됩니다. 누구나 드나들지만 정작 그곳에 사는 사람은 쉴 수 없습니다.
한병철의 아름다운 문장은 때로 구조를 흐릿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한병철의 문장은 짧고 강합니다. 바로 그 장점이 약점이 되기도 합니다. 그는 성과사회를 하나의 거대한 분위기처럼 그려냅니다. 그 결과 독자는 압도적인 인식의 쾌감을 얻지만, 때로는 구체적인 제도와 정책, 기업의 평가 시스템, 노동 계약, 교육 경쟁, 주거 불안, 채무 구조가 흐릿해질 수 있습니다. 피로사회는 공기처럼 퍼져 있지만, 공기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제도와 숫자와 계약과 관행을 통해 반복됩니다.
또 하나 조심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모든 성취가 억압은 아닙니다. 인간에게는 어려운 일을 해내는 기쁨이 있습니다. 숙련, 훈련, 창작, 야심, 책임은 인간을 깊게 만들기도 합니다. 문제는 노력 자체가 아닙니다. 문제는 노력이 삶의 의미와 관계를 떠나 끝없는 자기평가의 법정으로 바뀌는 순간입니다.
그러므로 한병철을 노력의 적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의미에서 떨어져 나온 성과, 관계를 소모시키는 효율, 한계를 부정하는 긍정성을 비판합니다. 일은 존엄을 줄 수 있습니다. 창작은 인간을 해방할 수 있습니다. 훈련은 자기를 단단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활동이 자기 가치 증명의 재료가 되는 순간, 기쁨마저 심사를 받기 시작합니다.
번아웃의 반대말은 더 높은 생산성이 아닙니다
『피로사회』가 열어주는 실천적 가능성은 거창한 구호보다 먼저 한계의 정당성을 회복하는 데 있습니다. 아니오라는 말을 게으름의 증거로 보지 않아야 합니다. 경계는 유연성 부족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으로 머무르기 위한 조건입니다. 거절할 수 없는 사람은 동의할 수도 없습니다. 모든 거절을 나약함으로 보는 사회는 이미 자유를 손상시킨 사회입니다.
물론 개인이 성과사회 바깥으로 훌쩍 떠날 수는 없습니다. 월세는 철학책을 읽고 감동하지 않습니다. 병원비는 아포리즘 앞에서 물러서지 않습니다. 그래서 과제는 더 어렵고 더 공적인 것이 됩니다. 퇴근 뒤의 상시 접속을 성실함으로 보상하지 않는 직장, 아이들의 시간을 끝없는 오디션으로 만들지 않는 교육, 휴식을 죄책감으로 만들지 않는 가족 문화, 시간의 불평등을 줄이는 정책이 필요합니다.
일상의 수준에서도 작은 균열은 가능합니다. 밤의 메시지를 아침까지 놓아두는 일, 모든 취미를 결과물로 바꾸지 않는 일, 식사 시간만큼은 화면에 양보하지 않는 일, 아무 성과도 없는 오후를 허락하는 일. 이런 행동이 곧바로 세계를 바꾸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세계가 우리 안에 설치해 둔 복종의 회로를 느슨하게 만들 수는 있습니다.
한병철은 책의 끝에서 다른 피로의 가능성을 말합니다. 고립시키는 피로가 아니라, 서로를 열어주는 피로입니다. 그것은 이렇게 말하는 피로입니다. 나는 유한합니다. 당신도 유한합니다. 나는 무한한 프로젝트가 될 수 없고, 당신에게도 그런 삶을 요구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포기가 아닙니다. 인간다운 척도를 다시 세우려는 시작입니다.
번아웃의 반대말은 더 높은 생산성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산출량으로 존재를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삶입니다.
긴 하루 끝에 『피로사회』를 읽는 사람에게 이 책은 이론보다 먼저 알아봄의 경험으로 다가옵니다. 우리가 너무 오래 개인의 약점으로 여겼던 피로가 사실은 사회의 언어를 품고 있었다는 사실. 그 깨달음은 불편하지만 필요합니다.
이제 남는 질문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내 피로 가운데 정말 나의 몫은 어디까지입니까. 그리고 어느 부분은 자유라는 이름으로 내 안에 설치된 성과의 명령입니까. 이 질문이 마음에 걸린다면, 사유는 이미 일을 시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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