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xistentialism vs Structuralism: Do Humans Choose, or Are They Chosen?
실존주의 대 구조주의: 인간은 선택하는가, 아니면 선택되었는가
실존주의 대 구조주의의 충돌은 오래된 철학사 교과서 안에 얌전히 누워 있는 사건이 아닙니다. 우리는 매일 그 충돌을 삽니다. 어떤 직업을 고를지, 어떤 말을 쓸지, 누구를 사랑할지, 어떤 정치적 입장을 취할지, 어떤 모습으로 남에게 보일지 선택한다고 믿습니다. 시대는 그 선택을 칭찬합니다. 시장은 취향이라고 부르고, 제도는 책임이라고 부르며, 자기소개서는 그것을 성장 서사로 포장합니다.
그런데 불편한 질문 하나가 남습니다. 내가 욕망한다고 믿는 그 욕망의 언어는 누가 주었습니까. 어떤 삶은 성공처럼 보이고, 어떤 삶은 실패처럼 보이게 만든 기준은 어디서 왔습니까. 내가 자유롭게 고른다고 믿는 순간에도, 이미 고를 수 있는 선택지의 모양은 누군가 먼저 접어 놓은 종이 같지 않습니까.
실존주의는 인간을 의미의 중심에 세웠습니다. 구조주의는 그 중심이 정말 인간 자신의 것인지 물었습니다. 이 논쟁은 단순한 학파 싸움이 아닙니다. 자유가 스스로 왕이라고 믿던 시대에, 구조가 조용히 왕관을 내려놓으라고 요구한 사건입니다.
실존주의의 자유는 폐허 위에서 태어난 고집스러운 존엄이었습니다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의 자유 개념은 한가한 서재의 관념놀이가 아니었습니다. 전쟁, 점령, 협력, 침묵, 비겁함, 저항이 뒤엉킨 20세기 유럽의 공기 속에서 나온 말이었습니다. 인간이 제도와 폭력 앞에서 얼마나 쉽게 부서지는지를 본 시대에, 사르트르는 인간이 그래도 자기 삶의 의미를 떠맡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 사르트르,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1946)
이 문장의 힘은 인간에게 미리 정해진 설계도가 없다는 데 있습니다. 칼이나 의자는 쓰임새가 먼저 있고, 그 쓰임새에 맞춰 만들어집니다. 그러나 인간은 먼저 세계에 던져지고, 그다음 자신의 행위를 통해 스스로를 만들어갑니다. 신의 설명서도, 본성이라는 안전한 대피소도, 운명이라는 면책 서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르트르의 자유는 가벼운 낭만이 아닙니다.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어떤 상황 속에서도 자신이 그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행위할지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뜻입니다. 노동자, 군인, 연인, 겁쟁이, 저항자 모두 자신이 만들지 않은 조건 안에 놓이지만, 그 조건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지는 행위 속에서 드러납니다.
이 사유가 강력했던 이유는 분명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직업, 계급, 성별, 국적, 병명, 성적표, 가족 내 역할로만 설명하는 세계에 지쳐 있었습니다. 실존주의는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당신에게 붙은 이름들의 합계보다 큽니다. 이 말은 많은 이들에게 해방처럼 들렸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지점에 약점도 있었습니다. 실존주의는 종종 인간이 이미 선택의 장면 앞에 서 있다고 전제한 뒤, 어떻게 선택할 것인지를 물었습니다. 구조주의는 질문의 시간을 더 앞으로 당겼습니다. 선택의 장면 자체가 이미 만들어져 있었다면 어떻게 됩니까.
구조주의는 결정이 아니라 체계에서 질문을 시작했습니다
구조주의는 인간의 경험을 무시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경험이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는 방식을 그대로 믿지 않았습니다. 말하는 사람은 자신이 언어를 사용한다고 믿습니다. 구조주의는 언어가 이미 세계를 나누는 방식 안에서 우리가 생각한다고 말합니다. 사회적 행위자는 자신이 관습을 따른다고 믿습니다. 구조주의는 관습이 개인의 의도보다 큰 질서를 이룬다고 말합니다.
소쉬르 이후 언어는 낱말 하나하나의 고정된 의미가 아니라 차이들의 체계로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의 말은 혼자 의미를 갖지 않습니다. 다른 말들과 구별되는 자리에서 의미를 얻습니다. 레비스트로스(Claude Lévi-Strauss, 1908–2009)는 이 문제의식을 친족, 신화, 문화의 질서로 확장했습니다. 사람들이 들려주는 이야기 아래에서, 그는 이야기를 가능하게 하는 배열과 반복을 보려 했습니다.
나는 사람들이 신화 속에서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아니라, 신화가 사람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그들의 마음속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주려 한다.
— 레비스트로스, 『날것과 익힌 것』(1964)
이 문장은 실존주의적 주체의 자신감을 정면에서 흔듭니다. 내가 문화를 이해하고 선택한다고 믿지만, 어쩌면 문화가 이미 나의 이해 방식을 짜고 있을 수 있습니다. 신화는 장식품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세계를 알아보는 깊은 문법입니다.
구조주의가 설득력을 얻은 이유는 사회적 반복을 잘 설명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왜 싫어한다고 말하는 규범을 계속 재생산합니까. 가족, 학교, 회사, 국가, 성별 규범, 전문가 제도는 왜 개인의 선언보다 오래 살아남습니까. 답은 사람들이 어리석어서가 아닙니다. 더 차갑고 더 유용한 답은 이렇습니다. 나는 선택한다고 말하는 주체조차, 이미 구조가 제공한 선택의 언어로 말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구조주의의 반박이 강했던 첫 이유는 의식이 언제나 늦게 도착한다는 점입니다
실존주의는 의식을 극적으로 만들었습니다. 구조주의는 의식이 뒤늦게 도착한다고 말했습니다. 한 사람이 자기 자신을 성찰하기 전에, 그는 이미 어떤 언어를 배웠고, 어떤 가족 질서 속에서 자랐으며, 어떤 계급적 감각을 몸에 익혔고, 어떤 국가의 역사와 학교의 규칙을 통과했습니다. 그는 빈방에 들어와 의미를 배치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이미 가구가 놓인 방에서 깨어나는 존재에 가깝습니다.
이 말은 의식이 거짓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의식이 왕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숙고하고, 후회하고, 저항하고, 수정합니다. 그러나 그 숙고의 재료는 순수하게 개인 내부에서 솟아오르지 않습니다. 자유라는 말조차 학교, 책, 법, 종교, 정치 투쟁, 광고 문구, 가족의 기대를 거쳐 우리에게 도착합니다. 자유는 맑은 공기가 아닙니다. 늘 역사라는 공기를 통과해 폐 속으로 들어옵니다.
두 번째 이유는 구조주의가 주체의 사회적 생산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알튀세르(Louis Althusser, 1918–1990)는 이 문제를 이데올로기의 작동 방식으로 설명했습니다. 이데올로기는 바깥에서 우리를 속이는 거짓말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를 특정한 주체로 알아보게 만드는 장치입니다.
모든 이데올로기는 구체적 개인들을 구체적 주체로 호명한다.
— 알튀세르,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1970)
누군가 거리에서 “거기 당신!” 하고 부르면, 우리는 돌아봅니다. 그 순간 나는 불린 사람으로 나 자신을 알아봅니다. 알튀세르가 말한 호명은 이보다 넓습니다. 학교의 성적표, 회사의 직급, 경찰의 서류, 가족의 기대, 병원의 진단명, 플랫폼의 프로필, 신용등급과 알고리즘 추천은 모두 우리를 어떤 자리로 부릅니다. 우리는 그 부름에 응답하면서 나를 이해합니다.
오늘의 삶에서 이 장면은 더욱 선명합니다. 사람들은 온라인에서 자유롭게 자신을 표현한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플랫폼이 준비한 형식과 지표 안에서 자신을 꾸밉니다. 직장인은 유연하다는 말을 자기 장점으로 받아들이지만, 그 말은 때로 조직의 불안정성을 개인의 성격으로 옮겨 적은 표현입니다. 학생은 경쟁력을 자신의 본성처럼 말하지만, 그것은 희소한 기회를 둘러싼 제도적 압박이 마음속으로 들어온 결과일 수 있습니다. 독재자가 무대 위에 올라오지 않아도 됩니다. 구조는 상식의 목소리로 말합니다.
세 번째 이유는 구조주의가 인간주의의 투명한 주체를 의심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투명한 존재라는 믿음은 20세기 사유에서 여러 차례 흔들렸습니다. 정신분석은 무의식을 통해 그 믿음을 건드렸고, 언어학은 의미가 개인의 의도보다 체계의 차이 속에서 생긴다고 말했습니다. 인류학은 한 사회가 자연스럽다고 부르는 것이 다른 사회에서는 낯선 배열일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는 이 흐름을 더욱 날카롭게 밀고 나갔습니다.
우리 사유의 고고학이 쉽게 보여주듯, 인간은 최근의 발명품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 끝에 가까워지고 있는 발명품이다.
— 푸코, 『말과 사물』(1966)
푸코가 생물학적 인간의 소멸을 말한 것은 아닙니다. 그가 겨냥한 것은 근대가 만들어낸 인간상입니다. 인간은 세계를 아는 주체이면서 동시에 지식의 대상이라는 그 독특한 자리 말입니다. 영원해 보이는 것도 역사적으로는 젊을 수 있습니다. 자연스러워 보이는 것도 특정한 지식 질서의 산물일 수 있습니다. 구조주의와 그 주변의 사유는 인간이라는 이름의 왕좌 밑에 날짜를 적어 넣었습니다.
실존주의가 무너진 것이 아니라, 자유가 덜 순진해졌습니다
구조주의가 실존주의를 완전히 폐기했다고 말하면 너무 쉽습니다. 쉬운 승리는 대개 생각의 패스트푸드입니다. 더 정확한 말은 이렇습니다. 구조주의는 실존주의의 자유 개념이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 조건들을 집요하게 밀어붙였습니다. 사르트르에게도 상황은 중요했습니다. 그러나 대중적으로 소비된 실존주의는 종종 고독한 개인이 세계 앞에서 자신을 선택하는 장면으로 기억되었습니다. 구조주의는 그 상황이라는 말을 언어, 친족, 이데올로기, 담론, 제도, 무의식의 층위로 넓혔습니다.
그 결과 자유는 순수한 연극성을 잃었습니다. 고독한 주체가 세계에 맞서는 멋진 자세만으로는 부족해졌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발명하지 않은 말로 선택하고, 전부 스스로 만든 것이 아닌 욕망으로 움직이며, 계급, 성별, 인종, 국적, 학력, 법, 가족의 배열 속에서 다르게 배분된 가능성 안에서 삽니다.
그래서 구조주의의 비판은 오늘의 자기 책임 담론을 향해서도 날카롭습니다. 사회는 실패한 사람에게 더 노력하라고 말하고, 지친 사람에게 태도를 관리하라고 말하며, 가난한 사람에게 습관을 바꾸라고 말합니다. 선택의 언어를 빌려오면서 조건의 분석은 삭제합니다. 이때 구조주의는 묻습니다. 누가 메뉴를 만들었습니까. 왜 어떤 사람에게는 선택지가 많고, 어떤 사람에게는 견디는 일만 선택처럼 주어집니까.
물론 구조주의에도 위험은 있습니다. 모든 것을 구조로 설명하면 책임은 쉽게 사라집니다. 주체가 효과일 뿐이라면 저항도 체계의 부산물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 살 수 없다”는 외침이 하나의 증상으로만 분류될 때, 고통은 얼굴을 잃습니다. 구조주의는 주체의 오만을 낮추었지만, 때로는 너무 차가운 체계 앞에 인간의 떨림을 세워두었습니다.
왕좌에서 내려온 자유는 더 초라하지만, 더 정직합니다
이 논쟁 이후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결론은 실존주의를 원래 모습으로 복원하는 것도, 구조를 새 왕으로 모시는 것도 아닙니다. 왕좌는 사유에 썩 좋은 의자가 아닙니다. 남는 것은 더 겸손하고 더 어려운 자유입니다. 자유는 무에서 자신을 창조하는 힘이 아닙니다. 나를 만든 조건 안에서, 때로는 그 조건을 거슬러, 조금씩 다르게 말하고 다르게 사는 능력입니다.
이 자유는 화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더 정직합니다. 내가 왜 어떤 말을 자연스럽게 여기고, 어떤 삶을 부끄럽게 여기며, 어떤 욕망을 내 것이라고 믿는지 살피게 합니다. 성공과 실패를 개인의 성격으로만 돌리는 습관을 멈추게 합니다. 나 혼자 책임진다는 말과 전부 구조 탓이라는 말 사이에서, 더 까다로운 책임의 자리를 찾게 합니다.
구조주의는 자유를 죽인 것이 아닙니다. 자유의 왕관과 의전과 아첨하는 시인들을 치웠습니다. 그 뒤에 남은 것은 조건 속에서 계속 수정되는 노동으로서의 자유입니다.
실천의 자리는 자기비난이 윤리인 척하는 곳에서 시작됩니다
우리가 할 일은 체념이 아닙니다. 먼저 질문의 자세를 바꾸는 일입니다. 모든 실패를 개인 결함으로, 모든 성공을 순수한 능력으로 설명하는 습관을 의심해야 합니다. 학교는 자신감을 어떻게 나누어 줍니까. 회사는 복종을 어떤 말로 미화합니까. 가족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어떤 가능성을 접습니까. 언어는 불평등을 얼마나 자주 정상으로 바꾸어 말합니까.
구조주의 이후 자유롭게 산다는 것은 내 안의 문장을 점검하는 일입니다. 이 문장은 정말 내 것인가. 내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미래는 누가 당연하게 만들었는가. 나의 수치심과 야망은 어디서 배웠는가. 이런 질문은 핑계가 아닙니다. 더 정직한 책임으로 가는 길입니다.
선택의 고통을 느끼는 실존주의자는 틀리지 않았습니다. 선택 이전의 조건을 묻는 구조주의자도 틀리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이제 질문은 인간이 선택하는가, 아니면 선택되었는가가 아닐지 모릅니다. 더 어려운 질문은 이것입니다. 이미 선택된 존재가 어떻게 조금씩, 더듬거리며, 다시 선택하기 시작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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