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obbes’s Social Contract: The State of Nature and the War of All Against All
홉스의 사회계약론: 자연상태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홉스의 사회계약론은 희망보다 공포에서 출발합니다. 그래서 홉스는 여전히 불편하게 현대적입니다. 그는 시민들이 환한 광장에 모여 합리적인 국가를 설계하는 장면을 먼저 보여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약속을 지켜줄 힘도, 재산을 보호할 제도도, 폭력을 멈출 권위도 사라진 상태를 상상하라고 요구합니다.
그 세계에서 문제는 인간이 모두 괴물이라는 데 있지 않습니다. 더 차가운 문제가 있습니다. 서로를 믿을 수 없는 조건에서는 그럭저럭 평범한 사람들도 상대를 잠재적 위협으로 대하기 시작합니다. 의심은 신중함이 되고, 예방은 공격이 되며, 이웃은 더 이상 이웃이 아니라 언젠가 나를 해칠 수 있는 사람으로 보입니다.
이것이 홉스가 말한 자연상태의 입구입니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은 원시인의 난투극을 그린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의 취약함이 강제력 있는 공적 권위의 부재와 만날 때 어떤 정치적 공포가 생기는지를 설명하려는 개념입니다. 사회계약은 자유가 안전 없이 방치될 때, 그 자유가 오히려 덫처럼 느껴지는 지점에서 태어납니다.
홉스는 내전의 숨소리를 들으며 정치철학을 썼습니다
홉스(Thomas Hobbes, 1588–1679)는 영국 정치사의 격렬한 균열을 통과한 철학자입니다. 1642년부터 1651년까지 이어진 영국 내전은 그의 사유에 붙은 장식이 아니라, 그의 정치적 상상력을 만든 공기였습니다. 홉스가 본 것은 한 사회가 악인들 때문에만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서로 다른 권위가 동시에 복종을 요구할 때, 사람들은 같은 나라 안에서도 서로의 적이 될 수 있습니다.
1651년에 출간된 『리바이어던』은 편안한 독자를 위한 정부론이 아닙니다. 그것은 붕괴를 겪은 사람이 쓴 책입니다. 이 책의 질문은 냉혹합니다. 인간은 서로의 손에 자신의 생명을 맡기지 않기 위해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가.
그리고 인간의 삶은 고독하고, 가난하고, 추하고, 잔인하며, 짧다.
— 홉스, 『리바이어던』(1651)
이 문장이 오래 살아남은 까닭은 다섯 개의 형용사 안에 정치적 악몽이 응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문장은 자주 오해됩니다. 홉스가 모든 인간을 피에 굶주린 존재로 본 것은 아닙니다. 그가 말한 것은 공통 권력이 없을 때 평범한 욕망마저 위험해진다는 점입니다. 자기보존, 체면, 부족한 자원, 두려움, 서로를 해칠 수 있는 능력이 결합하면 평화는 쉽게 바닥을 잃습니다.
홉스는 여기서 따뜻한 도덕 교훈을 내놓지 않습니다. 그는 선한 시민, 이성적 유권자, 아름다운 공동체에서 출발하지 않습니다. 상처 입을 수 있는 몸, 깨질 수 있는 약속, 사람을 먼저 잔인하게 만드는 공포에서 출발합니다. 그의 철학은 어둡지만, 그 어둠 안에는 묘한 평등성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도 정치 질서 없이 완전히 안전할 만큼 강하지 않습니다.
자연상태는 장소가 아니라 안전이 무너진 조건입니다
홉스의 자연상태를 정부 이전의 먼 숲속처럼 떠올리면 핵심을 놓칩니다. 자연상태는 특정한 지리적 장소가 아닙니다. 분쟁을 판단하고, 계약을 강제하며, 사적 폭력을 막을 공적 권위가 충분히 인정받지 못하는 조건입니다. 그것은 국가 이전에도, 국가 사이에도, 무너지는 국가 안에도, 법이 실제 힘을 잃은 모든 곳에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 논리는 불편한 평등에서 시작합니다. 인간은 도덕적으로 똑같아서 평등한 것이 아닙니다. 가장 약한 사람도 은밀함, 동맹, 때맞춘 공격, 속임수를 통해 강한 사람을 해칠 수 있기 때문에 평등합니다. 이 취약성의 평등이 상호 공포를 낳습니다. 내가 당신을 해칠 수 있고, 당신도 나를 해칠 수 있으며, 우리 둘 다 믿을 만한 심판자를 기대할 수 없다면 불신은 어리석음이 아니라 합리적 태도가 됩니다.
여기에 세 가지 동기가 갈등을 키웁니다. 경쟁은 이익을 향하게 합니다. 불신은 안전을 위해 먼저 움직이게 합니다. 명예욕은 평판을 방패처럼 사용하게 만듭니다. 그 결과 자연상태는 매 순간 칼이 오가는 상태라기보다, 언제든 폭력이 터질 수 있는 지속적 긴장의 상태가 됩니다. 홉스에게 전쟁은 실제 전투만이 아니라, 평화를 믿을 근거가 사라진 상태까지 포함합니다.
사람들이 모두를 두렵게 할 공통 권력 없이 살아가는 동안, 그들은 전쟁이라고 불리는 상태에 있다.
— 홉스, 『리바이어던』(1651)
이 문장을 통해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의미가 선명해집니다. 그것은 끝없는 전투가 아니라 믿을 수 있는 평화의 붕괴입니다. 어떤 밤에 피가 흐르지 않는다고 해서 질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모두가 문밖의 발소리에 잠을 설치는 조용함도 전쟁의 일부일 수 있습니다. 평화는 침묵이 아닙니다. 침묵을 믿을 수 있게 만드는 질서입니다.
사회계약은 공포의 압력 아래에서 이루어진 정치적 거래입니다
홉스의 사회계약은 사람들이 여유롭게 앉아 도덕적 합의를 쓰는 장면이 아닙니다. 그것은 서로에게 노출된 상태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집단적 결단입니다. 각자는 자기 자신을 마음대로 다스릴 사적 권리 일부를 내려놓고, 모두를 보호할 수 있는 공통 권력을 승인합니다.
나는 나 자신을 다스릴 권리를 이 사람 또는 이 사람들의 회의체에 위임하고 넘긴다.
— 홉스, 『리바이어던』(1651)
홉스에게 주권자는 보통 의미의 계약 당사자가 아닙니다. 다수의 개인들이 서로 계약하여 주권자를 세웁니다. 이 차이가 중요합니다. 주권자가 다시 여러 세력 중 하나로 떨어지는 순간, 국가는 피하려 했던 자연상태로 되돌아갈 위험을 안게 됩니다. 그래서 홉스는 분열된 권위를 강하게 두려워했습니다.
이 대목이 자유주의적 감각을 불편하게 만듭니다. 홉스는 주권자에게 막대한 권한을 줍니다. 그는 권력 집중보다 권위 분열을 더 위험하게 보았습니다. 평화가 가능하려면 다수의 이름으로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인공적 인격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리바이어던은 괴물입니다. 다만 홉스에게 그것은 인간 안의 작은 괴물들을 억제하기 위해 만든 큰 괴물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홉스가 권력 자체를 숭배한 것은 아닙니다. 그의 논증은 보호를 중심으로 움직입니다. 국가는 안전 없는 삶이 견딜 수 없기 때문에 정당화됩니다. 국가가 보호하지 못하면 그 도덕적 권위도 흔들립니다. 자기보존의 권리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홉스의 엄격한 정치질서 안에도 끝내 희생물로만 남기를 거부하는 살아 있는 몸이 남아 있습니다.
평화의 대가는 복종이며, 그 대가는 지금도 우리를 불편하게 합니다
홉스 이론에서 가장 불편한 부분은 그의 비관주의가 아닙니다. 진짜 불편한 것은 그가 제시한 거래입니다. 평화를 원한다면 개인은 최종 판단권을 위로 넘겨야 합니다. 사적 양심, 사적 보복, 사적 해석이 곧 법이 되는 순간 갈등은 되돌아옵니다. 그러나 그 판단권의 이전은 정치권력을 무섭도록 크게 만듭니다.
이 지점이 현대 정치 안에 남아 있는 홉스적 상처입니다. 시민은 폭력, 범죄, 재난, 질병, 침략, 사회 붕괴로부터 보호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보호를 약속하는 제도는 감시, 경찰력, 비상권한, 행정 명령, 위험을 정의하는 권한도 함께 축적합니다. 국가는 자신이 명명한 위험보다 강해지는 방식으로 시민을 보호합니다. 그렇다면 보호자가 위협이 될 때 시민은 누구에게 보호를 요청해야 합니까.
홉스는 우리에게 쉬운 위안을 주지 않습니다. 그는 질서에는 비용이 따른다고 말합니다. 권리는 그것을 지킬 구조 안에서 현실의 힘을 얻습니다. 벽에 걸린 아름다운 문장만으로 권리는 지속되지 않습니다. 법원, 집행, 복종, 공적 승인, 제도적 신뢰가 필요합니다. 누구도 지켜주지 못하는 권리는 도덕적으로 아름다울 수는 있어도 정치적으로는 연약합니다.
하지만 반대편 위험도 분명합니다. 안전은 권력이 시민에게 끝없는 양보를 요구하는 언어가 될 수 있습니다. 비상은 습관이 될 수 있습니다. 공포는 복종을 성숙함처럼 보이게 훈련할 수 있습니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끝내기 위해 세운 국가가 어느 순간 반대를 사회 붕괴의 징후처럼 취급할 수 있습니다. 그때 리바이어던은 취약한 사람들을 보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조용함을 감사하라고 요구합니다.
홉스는 순진한 자유와 순진한 권위를 동시에 불편하게 합니다
홉스를 독재의 철학자로만 읽으면 너무 쉽습니다. 그는 그보다 훨씬 성가신 사상가입니다. 그의 사회계약론은 제도 없이 자유가 번성할 수 있다는 환상을 흔듭니다. 동시에 우리는 그의 논리를 읽으며, 일단 힘을 얻은 제도가 시민에게 얼마나 많은 신뢰를 요구할 수 있는지도 보게 됩니다.
순진한 자유를 향해 홉스는 말합니다. 문이 언제든 부서질 수 있고, 약속이 언제든 깨질 수 있으며, 이웃이 공포로 무장하는 곳에서 자유는 오래 버티기 어렵습니다. 순진한 권위를 향해 우리는 되물어야 합니다. 시민이 판단을 포기해 조용한 그림자가 되어야만 유지되는 평화라면, 그것은 과연 누구의 평화입니까.
그래서 자연상태는 과거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공적 신뢰가 무너질 때마다 우리는 그 조각을 봅니다. 사실이 자리 잡기 전에 온라인 군중이 먼저 처벌할 때, 공동체가 소문으로 무장할 때, 제도가 신뢰를 잃을 때, 국제정치가 다시 의심과 선제대응의 언어로 움직일 때, 사람들은 힘만이 힘에 답할 수 있다고 믿기 시작합니다. 자연상태는 우리 뒤에만 있지 않습니다. 정당한 권위가 약해지는 곳마다 기다리고 있습니다.
홉스는 공포가 국가를 세울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공포가 국가의 영혼으로 눌러앉아서는 안 됩니다.
실천의 지평은 우리가 어떤 안전을 사고 있는지 묻는 데서 시작됩니다
오늘 홉스를 읽는 가치는 그가 남긴 질문에 있습니다. 정부가 안전의 이름으로 더 많은 권한을 요구할 때, 시민은 유치한 불신이나 유치한 신뢰로 답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위험이 호명되고 있는지, 어떤 권한이 요청되는지, 누가 그것을 감독하는지, 언제 끝나는지, 그 부담이 누구의 삶에 가장 무겁게 내려앉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이것은 국가를 무조건 의심하는 낭만이 아닙니다. 질서가 무너질 때 가장 먼저 다치는 사람들은 대개 약자입니다. 가난한 사람, 이주민, 소수자, 어린이, 노인, 사적 보호수단이 없는 사람들이 공적 제도의 붕괴 비용을 먼저 냅니다. 안전을 조롱하는 정치는 종종 이미 안전한 주소지에서 말합니다. 홉스는 정치의 깊은 문법이 취약성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안전을 숭배하는 정치도 시민을 삼킬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은 두 가지 진실입니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막을 만큼 강한 제도가 필요합니다. 동시에 그 제도가 공포를 영구 위임장으로 바꾸지 못하게 할 만큼 깨어 있는 시민도 필요합니다.
홉스는 우리를 구호 속에서 편히 잠들게 하지 않습니다. 질서 없는 자유는 취약한 사람을 사적 폭력 앞에 방치할 수 있습니다. 한계 없는 질서는 취약한 사람에게 자신의 복종을 평화라고 부르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 두 위험 사이 어딘가에서 현대 시민은 여전히 리바이어던과 협상합니다. 누가 우리를 보호할 것인가만이 아니라, 보호가 정치의 가장 높은 말이 될 때 우리는 어떤 존재가 되는가를 물으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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