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Jean-Paul Sartre: Existence Precedes Essence, Freedom, and Responsibility
장폴 사르트르: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자유와 책임의 철학
장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의 문장,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말은 이상하게 자주 오해됩니다. 마치 파리의 카페에서 태어난 문장이 자기계발 포스터 회사에 취직한 것처럼 말입니다. 너 자신이 되어라. 네 삶을 선택하라. 정체성을 만들어라. 듣기에는 산뜻합니다. 그런데 사르트르의 문장은 산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자유를 선물한 뒤, 그 자유를 변명할 통로를 닫아버리는 문장입니다.
이 말이 강한 이유는 오래된 사고의 순서를 뒤집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볼 때 먼저 정의하려 듭니다. 직업, 성별, 가족 안의 자리, 학벌, 병력, 소득, 평판, 나이, 출신 지역. 사회는 한 인간이 말하기도 전에 서류철을 먼저 펼칩니다. 사르트르는 그 서류철 앞에서 묻습니다. 사람이 먼저입니까, 분류가 먼저입니까?
평생을 역할과 책임 속에서 살아온 독자라면 이 문장이 결코 추상적으로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누군가는 가장으로, 누군가는 노동자로, 누군가는 부모로, 누군가는 실패자나 성공자로 불렸습니다. 이름보다 역할이 먼저 도착하는 삶. 사르트르의 문장은 그 익숙한 질서에 작은 균열을 냅니다. 그러나 동시에 불편한 요구도 건넵니다. 고정된 본질이 나를 완전히 규정할 수 없다면, 그 본질 뒤에 숨어 나를 완전히 면책할 수도 없습니다.
오래된 세계는 본질이 먼저라고 믿었습니다
사르트르의 도발을 이해하려면 그가 거슬러 올라간 오래된 생각을 먼저 봐야 합니다. 전통적인 형이상학과 신학에서는 대체로 본질이 실존보다 앞선다고 여겼습니다. 어떤 사물이 무엇인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어떤 성질을 가져야 하는지가 먼저 있고, 그다음에 개별 사물이 나타난다는 생각입니다.
사르트르는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에서 종이칼의 예를 듭니다. 종이칼은 장인이 먼저 용도와 형태를 생각한 뒤 만듭니다. 그러므로 종이칼의 본질은 그것의 실제 존재보다 앞섭니다. 종이칼은 어느 날 아침 눈을 뜨고 자신이 바이올린이 될지, 편지가 될지, 침묵이 될지 고민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기능 안에 조용히 갇혀 있습니다.
문제는 인간을 종이칼처럼 생각할 때 발생합니다. 전통적 유신론에서는 신이 인간의 본질을 먼저 알고 창조한다고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인간은 신의 정신 안에 이미 놓인 설계를 현실에서 구현하는 존재가 됩니다. 그런데 사르트르의 무신론적 실존주의는 바로 이 전제를 끊습니다. 신적 설계가 없다면, 인간에게 미리 주어진 보편적 본성도 더는 최종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물론 근대 세속 사회도 이 구조를 쉽게 버리지 못했습니다. 신의 자리에 인간 본성, 이성, 국가, 인종, 계급, 성별, 시장, 생산성 같은 것들이 들어섰습니다. 사람을 먼저 정의하고 그 정의에 맞춰 살라고 요구하는 장치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간판만 바꾸었을 뿐입니다. 사르트르는 말합니다. 인간은 먼저 존재하고, 세계 속에 던져지고, 자신을 만나고, 그 뒤에 자신을 규정한다고 말입니다.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인간이 먼저 존재하고, 자신을 만나며, 세계 속에 솟아오른 뒤에야 자신을 규정한다는 뜻이다.
— 장폴 사르트르,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1946)
이 문장의 힘은 짧음에만 있지 않습니다. 이 말은 철학의 질문 순서를 바꿉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보다 먼저, 아직 완성된 정의를 갖지 못한 이 존재가 자기 삶을 어떻게 감당하는가라는 질문이 등장합니다.
실존은 생물학적 출생 이상의 사건입니다
여기서 오해를 피해야 합니다. 사르트르가 말하는 실존은 사람이 태어난 뒤 사회적 이름표를 받는다는 얄팍한 뜻이 아닙니다. 인간이 먼저 생물학적으로 존재하고 나중에 직업이나 성격을 얻는다는 정도라면, 굳이 한 시대를 흔들 문장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르트르에게 실존은 자기 존재와 관계 맺는 방식입니다. 돌은 있습니다. 탁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가 있다는 사실을 문제 삼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이렇게 살고 있는가. 나는 내가 맡은 역할과 같은 존재인가. 내가 해온 일이 정말 나인가. 이런 질문이 가능한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컵이나 의자처럼 완성된 물건이 아닙니다. 인간은 이미 있는 것이면서 아직 아닌 것, 지나온 과거이면서 앞으로 하려는 것, 타인이 붙인 이름이면서 그 이름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결정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사회가 아무리 한 사람을 고정하려 해도, 그 사람은 그 고정에 대해 다시 태도를 취해야 합니다. 여기서 사르트르의 자유가 시작됩니다.
그렇다고 사르트르가 인간을 사회 바깥에 둥둥 떠 있는 영웅으로 본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아무 조건 없이 태어나지 않습니다. 몸, 언어, 가족, 계급, 시대, 국가, 질병, 빚, 상처, 교육, 차별은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채 우리 삶에 도착합니다. 가난하게 태어난 사람이 가난을 선택한 것은 아닙니다. 가부장적 규범 속의 여성이 그 무대를 혼자 만든 것도 아닙니다. 식민지의 인간, 인종화된 몸, 나이 든 노동자, 알고리즘의 예측 점수로 먼저 분류되는 청년 역시 순수한 출발선에 서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조건과 응답 사이의 긴장입니다. 사르트르는 이를 사실성과 초월의 관계로 봅니다. 사실성은 이미 주어진 것입니다. 몸, 과거, 사회적 위치, 구체적 한계입니다. 초월은 그 주어진 것을 해석하고, 거부하고, 받아들이고, 다르게 의미화하려는 인간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태어난 날의 날씨를 고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날씨 속에서 누구의 손을 잡고, 누구를 방치하며, 어디로 걸어갈지는 여전히 우리 삶의 일부가 됩니다.
자유는 위로가 아니라 변명 없는 책임입니다
여기서 사르트르의 문장은 위험해집니다.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면, 우리는 자신을 기질, 운명, 사회적 역할, 본능, 명령, 상처만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런 것들은 삶의 장을 강하게 제한합니다. 때로는 잔인할 만큼 강합니다. 그러나 그 제한이 인간의 응답 가능성 전체를 없애지는 않습니다.
사르트르가 인간은 자유롭도록 선고받았다고 말한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 표현은 자유를 기분 좋은 독립으로 생각할 때만 역설처럼 들립니다. 사르트르에게 자유는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얻는 능력이 아닙니다. 나 대신 선택해줄 최종 권위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선고받았다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를 창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유롭다는 것은 세계 속에 던져진 뒤에는, 나에게 주어진 것들로 무엇을 할지 피할 수 없이 묻게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유롭도록 선고받았다. 그는 자신을 창조하지 않았지만, 일단 세계 속에 던져진 뒤에는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 장폴 사르트르,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1946)
이 말은 인간의 자존심을 달래지 않습니다. 오히려 불편하게 만듭니다. 많은 이데올로기는 인간을 무엇의 산물이라고 말해 안심시킵니다. 유전자, 트라우마, 계급, 시장, 당의 노선, 민족의 운명, 신의 뜻. 반대로 오늘의 상업적 낙관주의는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사르트르는 둘 다 거부합니다. 인간은 조건 지어진 존재이지만, 그 조건이 우리 대신 끝까지 선택해주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불안은 사르트르 철학에서 중요한 감정입니다. 불안은 사소한 걱정이 아닙니다. 내가 선택할 때, 나는 나만의 사적인 취향을 고르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나는 인간이 이렇게 살아도 된다는 하나의 이미지를 세상에 내놓습니다. 내가 외면하는 것, 참아 넘기는 것, 지키는 것, 배반하는 것, 침묵하는 것 모두가 나라는 인간의 윤곽을 만듭니다.
오늘의 사회는 이 불안을 수치로 덮으려 합니다. 신용점수, 생산성 지표, 팔로워 수, 건강 위험도, 채용 알고리즘, 소비 패턴, 평판 점수. 관료제는 본질을 좋아합니다. 플랫폼도 본질을 좋아합니다. 광고 역시 본질을 좋아합니다. 본질은 예측하기 쉽고, 예측 가능한 인간은 팔기 쉽습니다. 사르트르의 문장은 이 장치 앞에서 말합니다. 어떤 프로필도 그 프로필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인간을 끝까지 설명하지 못한다고 말입니다.
자기기만은 역할 안에 숨어드는 기술입니다
사르트르는 자유가 너무 불편하기에 인간이 자주 그것으로부터 도망친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이 도망을 자기기만이라고 불렀습니다. 자기기만은 평범한 거짓말과 다릅니다. 거짓말은 진실을 알고 타인에게 숨기는 행위입니다. 자기기만은 의식이 자기 자신의 자유를 자기에게서 숨기려는 이상한 시도입니다.
『존재와 무』에서 사르트르가 든 유명한 예는 카페 웨이터입니다. 그는 지나치게 정확한 동작과 과도하게 매끈한 태도로 웨이터 역할을 연기합니다. 사르트르가 서비스 노동을 조롱한 것은 아닙니다. 요점은 그 사람이 사회적 역할과 자기 존재를 완전히 동일시하려 한다는 데 있습니다. 나는 웨이터일 뿐이다. 나는 절차를 따를 뿐이다. 나는 회사의 방침을 수행할 뿐이다. 이런 문장은 선택을 사물처럼 만들려 합니다.
우리는 이 자기기만을 너무 잘 압니다. 경영자는 주주가치를 따랐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공무원은 규정대로 했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시민은 정치가 더러워서 외면했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부모는 희생이 나의 전부였다고 말합니다. 냉소주의자는 어차피 바뀌지 않는다고 말하며, 그 냉소 속에 숨어 있는 게으름을 교양처럼 포장합니다. 모두가 선택을 선택이 아닌 것처럼 꾸밉니다.
자기기만은 반대 방향으로도 작동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을 순수한 가능성으로만 여기며 사실성을 부정합니다. 나는 언제든 새로 시작할 수 있다. 나는 과거와 무관하다. 나는 상처와 계급과 나이와 책임을 초월한 브랜드다. 이것도 사르트르가 보기에는 정직하지 않습니다. 나는 과거만은 아니지만, 과거에 대해 무죄도 아닙니다. 나는 사회적 위치만은 아니지만, 아무 위치도 없는 목소리처럼 말할 수는 없습니다.
사르트르의 힘은 이 두 감옥을 모두 거부한다는 데 있습니다. 인간은 완성된 물건도 아니고, 모든 조건을 마음대로 지우는 신도 아닙니다. 인간은 미완성이라는 사실을 타인들 사이에서 감당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사르트르가 피할 수 없었던 사회의 질문
초기 사르트르에게는 정당한 비판이 따라붙습니다. 그의 자유는 때때로 너무 고독하고, 너무 영웅적이며, 개인의 결단을 지나치게 크게 보이게 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사르트르는 마르크스주의 비판, 반식민주의 투쟁, 현실 정치와의 접촉 속에서 자유가 놓인 사회적 조건을 더 깊이 생각해야 했습니다. 자유는 진공 속에서 움직이지 않습니다. 굶주림, 경찰 권력, 인종 위계, 가부장제, 식민 폭력, 경제적 강제는 철학 바깥의 장식물이 아닙니다.
이 지점에서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 1908–1986)는 사르트르의 보조자가 아니라 필수적인 사상가로 등장합니다. 『제2의 성』에서 보부아르가 말한 사람은 여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자가 되는 것이라는 명제는, 지배의 조건 속에서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보여줍니다. 성별은 개인이 마음대로 고르는 의상이 아닙니다. 사회가 오랜 시간 여성을 운명으로 만들고, 그 운명을 자연이라고 부르는 과정입니다.
이 통찰은 사르트르의 문장을 값싼 개인주의로부터 구해냅니다. 본질이 사후적으로 만들어진다면, 우리는 누가 그 제작에 참여하는지 물어야 합니다. 가족이 만듭니다. 학교가 만듭니다. 법이 만듭니다. 회사가 만듭니다. 언론이 만듭니다. 국경이 만들고, 감옥이 만들고, 이제는 알고리즘도 차갑고 성실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 제작은 존재론적으로 최종적이지 않습니다. 사회 권력은 정체성을 생산하지만, 인간은 그것을 드러내고, 견디고, 거부하고, 수정하고, 때로는 그 무게에 짓눌립니다.
우리 시대에는 새로운 본질들이 넘쳐납니다. 데이터 기업은 당신이 패턴이라고 말합니다. 회사는 당신이 성과라고 말합니다. 민족주의는 당신이 피라고 말합니다. 시장은 당신이 취향이라고 말합니다. 치료 담론의 상투어는 당신이 상처라고 말합니다. 능력주의는 당신이 순위라고 말합니다. 사르트르는 여기에 가볍게 답하지 않습니다. 괜찮습니다, 당신은 자유입니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더 까다롭게 말합니다. 그 어떤 정의도 당신이라는 일을 끝낼 수 없다고 말입니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말은 정체성이 어딘가에 숨어 있는 물건처럼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행위 속에서 만들어지고, 방어되고, 배반되고, 수정되며, 끝내 평가된다는 뜻입니다.
선택을 숭배하지 않으면서 선택하기
그렇다면 이 문장은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합니까? 첫째, 사람을 듣기 전에 먼저 정의함으로써 이익을 얻는 제도들을 의심하게 합니다. 좋은 사회는 인간을 백지로 취급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이력을 감옥처럼 취급해서도 안 됩니다. 교육, 복지, 의료, 고용, 사법, 공론장은 상처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변화의 여지를 남길 때 더 인간다워집니다.
둘째, 이 문장은 우리의 사적인 변명도 단속합니다. 모든 실패가 개인의 잘못은 아닙니다. 많은 실패는 안전을 위로 올리고 위험을 아래로 떠넘기는 구조 속에서 만들어집니다. 그러나 구조를 본다는 일이 행동 회피의 부드러운 커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회가 나를 형성했다는 말은 필요합니다. 사회가 나 대신 전부 선택했다는 말은 또 다른 자기기만입니다.
셋째, 사르트르는 책임의 정치를 더 정직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책임은 약자에게 상처의 원인을 뒤집어씌우는 말이어서는 안 됩니다. 책임은 각자와 각 제도가 실제로 가진 힘의 무게를 제자리로 돌려놓는 말이어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이 가난에 책임지는 방식과, 입법자, 임대인, 고용주, 채권자, 상속된 특권이 가난의 재생산에 책임지는 방식은 같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상처 입은 사람도 상처보다 큽니다. 정의는 바로 그 초과분을 지켜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사르트르는 자유가 행위 속에서만 현실이 된다고 말합니다. 행동으로 들어가지 않는 가치는 무대 위의 안개와 비슷합니다. 사랑은 방치 뒤에 숨은 비밀스러운 본질이 아닙니다. 용기는 미리 소유한 신분증이 아닙니다. 연대도 기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결국 흔적을 남깁니다. 이론이 말을 끝내기 전에 삶이 먼저 대답합니다.
장폴 사르트르의 문장은 아직도 우리를 불편하게 합니다. 그것은 숙명론도 빼앗고, 순진한 무죄도 빼앗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완성된 의미를 품고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누르는 역사에서 완전히 풀려난 존재도 아닙니다. 그 두 부정 사이에서 삶은 시작됩니다.
어딘가에 내 진짜 본질이 숨어 있는지가 핵심은 아닐지 모릅니다. 더 조용하고 더 어려운 물음이 남습니다. 우리의 행동이 우리 대신 말을 마쳤을 때, 그것은 어떤 인간을 설명하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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