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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환과 휴브리스, 네메시스: 그리스 비극을 가장한 살인자의 오만

김동환의 휴브리스와 네메시스는 살인이 어떻게 그리스 비극을 빌려 복수를 정의로 포장하고 피해자를 지우는지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오만의 언어를 뜻의 오용과 책임 회피의 문제로 읽고, 남겨진 사람의 목소리를 복원합니다.
김동환과 휴브리스, 네메시스 - 그리스 비극을 가장한 살인자의 오만 | 살인사건, 도덕적 망상, 정의의 언어

김동환과 휴브리스, 네메시스: 그리스 비극을 가장한 살인자의 오만

김동환은 범죄 혐의만 남긴 것이 아닙니다. 그는 한 문장도 남겼습니다. 부산에서 전 직장 동료였던 항공사 기장을 살해한 혐의 등으로 검찰에 송치되던 날, 여러 언론 보도에 따르면 그는 취재진 앞에서 “휴브리스”와 “네메시스”를 외쳤습니다. 교양 강의실이나 그리스 비극 해설에서나 들을 법한 말이 포승줄과 호송차 사이에서 튀어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장면은 더 섬뜩했습니다. 말이 너무 컸기 때문입니다. 경찰은 김동환을 살인, 살인미수, 살인예비 등 혐의로 구속 송치했다고 밝혔습니다. 보도에 따르면 그는 전 동료 여러 명에게 앙심을 품고 주거지를 파악했으며, 추가 범행 대상도 있었던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이 사실관계의 최종 판단은 사법 절차의 몫입니다. 그러나 그가 공적 공간에 던진 말의 문제는 이미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폭력의 피의자가 아니라, 어떤 우주적 응징을 수행한 사람처럼 말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윤리적 상처가 깊어집니다. 죽은 사람은 그 말을 반박할 수 없습니다. 유가족은 고전 용어로 치장된 가해자의 자기극화를 들어야 했습니다. 대중은 낯선 단어의 뜻을 검색하다가 더 평범하고 더 끔찍한 사실을 놓치기 쉽습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죽음을 자기 서사의 재료로 삼으려 했다는 사실 말입니다.

문제는 살인 혐의자가 휴브리스와 네메시스라는 단어를 알았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 단어들을 자신의 원한 앞에 세우려 했다는 데 있습니다.

휴브리스는 사적인 복수를 장식하기 위해 태어난 말이 아닙니다

휴브리스는 흔히 “오만”으로 번역됩니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의 휴브리스는 단순한 자신감 과잉이 아닙니다. 그것은 타인을 인간적 존중의 바깥으로 밀어내는 태도에 가깝습니다. 상대를 모욕하고, 수치심을 주고, 자신이 상대보다 위에 있다는 감각을 폭력적으로 확인하려는 행위입니다. 말하자면 휴브리스는 힘이 자기 한계를 잊는 순간에 생깁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에서 이 문제를 차갑게 설명합니다. 영어 번역본에서 “insolence”로 옮겨진 대목의 그리스어 배경에는 hybris가 있습니다.

오만한 모욕은 피해자에게 수치심을 주는 말과 행동입니다. 그것은 자신에게 어떤 이익이 생기기 때문도 아니고,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기 때문도 아니라, 그 행위 자체에서 오는 쾌감 때문에 이루어집니다.

— 아리스토텔레스, 『수사학』(기원전 350년경)

이 정의를 따르면 휴브리스는 복수자의 훈장이 아닙니다. 오히려 타인을 낮추며 자기 우월감을 확인하려는 사람을 향한 고발입니다. 그 말은 피해자를 심판하지 않습니다. 타인의 존엄을 자기 분노 아래에 둔 사람을 겨냥합니다.

네메시스도 마찬가지입니다. 대중적 의미에서 네메시스는 오만에 대한 응징, 혹은 천벌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이 말을 사적인 복수의 변명으로 끌어오면 위험해집니다. 그리스 비극은 “내가 고통받았으니 내가 벌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이 얼마나 쉽게 자기 상처를 법으로, 자기 분노를 진실로, 자기 몰락을 운명으로 착각하는지를 보여줍니다.

비극은 원한을 정의로 바꾸는 기계가 아닙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너무 크게 믿을 때 어떤 파국을 부르는지 보여주는 무대입니다.

김동환의 말은 사건의 윤리적 순서를 뒤집으려 했습니다

보도에 따르면 김동환은 “악랄한 기득권이 한 개인의 인생을 파멸시켜도 된다는 휴브리스”라고 말했고, 피해자의 죽음을 “네메시스” 또는 “천벌”로 표현했습니다. 이 말의 위험은 의미의 순서를 뒤집는 데 있습니다. 피의자는 자신을 벌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 벌을 내리는 자리에 세웁니다. 피해자는 살해된 사람이 아니라 응징당한 사람처럼 밀려납니다. 살인은 심판이라는 이름을 얻으려 합니다.

여기서 언어는 현실을 밝히지 않습니다. 현실을 세탁합니다.

우리는 이 구조의 작은 형태를 일상에서도 봅니다. 누군가 자신이 무시당했다고 말합니다. 곧 배신당했다고 말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인생을 망쳤다고 말합니다. 말은 반복될수록 뜨거워지고, 세계는 어느새 하나의 법정이 됩니다. 그 법정에서 말하는 사람은 원고이자 증인이고, 판사이자 집행자가 됩니다. 보통의 삶에서는 이것이 인간관계를 망가뜨립니다. 극단으로 치달으면, 자기정당화의 언어는 폭력의 문턱을 낮춥니다.

이 말은 책임을 덜어주기 위한 설명이 아닙니다. 구조를 이해하는 일은 행위를 용서하는 일과 다릅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자기정당화의 언어를 생각하지 않는 사회는 다음 폭력이 더 그럴듯한 말투를 찾아낼 때까지 기다리는 사회가 됩니다.

김동환의 발화가 중요한 까닭은 폭력이 어떻게 오래되고 권위 있어 보이는 단어를 빌려 자기 얼굴을 가리는지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정의, 응징, 운명, 천벌. 이런 말들은 공적인 무게를 가집니다. 그래서 사적인 복수는 바로 그 무게를 원합니다. 원한의 심장을 숨긴 채 원칙의 옷을 입고 싶어 합니다.

폭력이 자신을 운명이라고 부를 때, 시민의 첫 대답은 분명해야 합니다. 아닙니다. 그것은 행위입니다.

가해자가 서사의 주인이 될 때 피해자는 사라집니다

이런 사건에서 또 하나의 폭력이 생깁니다. 관심의 배분이 뒤틀리는 폭력입니다. 피의자의 얼굴은 반복해서 노출됩니다. 그의 말은 인용됩니다. 그의 심리, 경력, 불만, 동기, 과거가 분석됩니다. 반면 피해자는 직업, 나이, 이니셜, 사건 시각으로 축소됩니다. 한 사람의 삶이 타인의 기이한 발언을 설명하는 배경처럼 밀려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언론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사회 전체의 습관입니다. 가해자의 드라마는 줄거리를 제공합니다. 피해자의 부재는 침묵을 남깁니다. 알고리즘은 침묵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댓글창도 침묵을 오래 견디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느새 피해자가 잃은 삶보다 가해자가 외친 단어를 더 오래 바라보게 됩니다.

바로 그래서 그리스 비극의 언어를 조심해서 다루어야 합니다. 그리스 비극에는 왕, 예언, 저주, 몰락, 깨달음이 등장합니다. 참극을 장엄하게 보이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의 살인은 장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엘리베이터, 복도, 현관, 일정표, 흉기, 주거지 같은 구체적이고 차가운 사물들 사이에서 벌어집니다. 그리고 돌이킬 수 없습니다.

그런 행위를 네메시스라고 부르는 것은 가해자에게 허락되지 않은 장엄함을 넘겨주는 일입니다. 피해자의 마지막 장면에 가해자의 자아를 끼워 넣는 일입니다. 정확한 윤리의 문법은 훨씬 차갑고 단호해야 합니다. 사람이 죽었습니다. 유가족은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었습니다. 경찰에 따르면 다른 사람들도 범행 대상으로 거론됐습니다. 법은 증거에 따라 판단해야 합니다. 시민은 피의자가 고른 배경음악을 그대로 틀어주지 않아야 합니다.

휴브리스는 그가 겨냥한 쪽이 아니라 그의 말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아이러니는 여기에 있습니다. 휴브리스라는 말은 그가 지목한 피해자보다, 오히려 응징할 권리를 자처한 그의 태도와 더 가까워 보입니다. 휴브리스는 인간이 자기 상처를 공동의 세계보다 크게 놓을 때 시작됩니다. 내 억울함은 너무 특별하므로 보통의 도덕은 나에게 적용되지 않는다고 믿는 순간, 타인의 생명은 자기 분노를 적는 종이처럼 취급됩니다.

이 오래된 단어가 오늘에도 필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휴브리스는 자아가 부풀어 타인의 현실이 들어설 자리를 없애버리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우리는 흔히 그런 오만이 권력자나 재벌, 독재자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곳에도 있습니다. 하지만 더 작은 방에도 있습니다. 실패를 모두 음모로 해석하는 직장인에게, 모욕감을 혐오로 바꾸는 시민에게, 잔혹함을 정의로운 비판이라고 부르는 온라인 군중에게, 집착을 진실이라고 믿는 고립된 사람에게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상처받은 사람이 위험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상처받은 사람은 폭력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억울함, 배제, 직업적 실패, 모욕감은 압력을 설명할 수는 있어도 피를 허락하지는 않습니다. 설명과 면죄 사이의 선은 선명해야 합니다. 인간다운 사회는 원한이 커지는 조건을 살펴야 합니다. 그러나 정의로운 사회는 죽은 사람에게 다른 사람의 자기서사를 대신 지불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이 구분은 철학자들의 취미가 아닙니다. 공적 삶을 지키는 최소한의 위생입니다. 이것이 무너지면 모든 원한은 심판의 옷을 입을 수 있습니다. 모든 폭력은 운명의 대리인을 자처할 수 있습니다. 모든 군중은 “피해자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보다 “가해자는 왜 그렇게 느꼈나”를 먼저 묻게 됩니다. 두 번째 질문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첫 번째 질문을 밀어내서는 안 됩니다.

고통은 타인의 몸 위에 왕좌를 세울 권리가 아닙니다

우리는 원한을 조롱해서는 안 됩니다. 사회에는 실제로 사람을 밀어내는 제도와 위계가 있습니다. 일터는 때로 잔인하고, 조직은 내부자를 보호하며, 약자는 말할 기회조차 얻지 못합니다. 진보적 사유는 억울함을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질서라는 이름으로 약자에게 침묵을 요구하는 일 역시 폭력의 세련된 형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해방의 언어도 넘어서는 안 되는 경계가 있습니다. 고통은 타인의 몸을 지배할 권리가 아닙니다. 배제는 살인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제도에 의해 상처받을 수 있고, 동시에 자신이 선택한 폭력에 대해 온전히 책임져야 합니다. 이 구분을 잃으면 연대는 돌봄이 아니라 자기 피해를 말할 수 있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위험한 허가증으로 변질됩니다.

그래서 “그리스 비극”이라는 표현을 낭만적으로 다루면 안 됩니다. 비극은 잔혹함 위에 드리우는 고급 커튼이 아닙니다. 그것은 한계를 배우는 학교입니다. 인간이 자신을 보통의 책임 바깥에 있다고 믿을 때 가장 위험해진다는 사실을 가르칩니다. 비극적 인물이 위대한 이유는 몰락해서가 아닙니다. 몰락하기 전까지 세계의 경고를 듣지 못하기 때문에 두려운 것입니다.

김동환의 발화를 두고 단어 뜻풀이 경쟁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더 중요한 문제는 살인 혐의자가 어떻게 카메라 앞에서 타인의 죽음을 자기 의로움의 증거처럼 바꾸려 했는가입니다. 그것은 비극적 지혜가 아닙니다. 고전 어휘를 걸친 도덕적 자기애입니다.

휴브리스는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행사했다는 힘이 아닙니다. 휴브리스는 자신의 원한을 법, 진실, 그리고 타인의 생명보다 높은 자리에 앉히려는 태도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피해자를 되돌리고 구경거리를 길들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말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요. 지워버릴 수는 없습니다. 그 발언은 사건의 기록에 속합니다. 피의자의 자기 이해를 보여주는 자료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말이 사건의 중심을 차지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휴브리스와 네메시스를 이국적인 장식처럼 반복하는 순간, 우리는 가해자가 펼친 무대 위로 올라가게 됩니다.

필요한 것은 작은 절제입니다. 먼저 혐의와 피해를 말해야 합니다. 그다음 발언을 설명해야 합니다. 피해자의 인간성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피의자를 어두운 유명인으로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동기를 다룰 때 동기가 정당화로 변하지 않게 해야 합니다. 원한을 말할 때 원한이 죽은 사람을 삼키지 않게 해야 합니다.

사법부의 일은 증거, 기소, 재판, 판결, 형량입니다. 공적 언어의 일은 따로 있습니다. 현실이 구경거리의 언어에 덮이지 않도록 지키는 일입니다. 범죄는 그리스어 단어를 외운다고 철학이 되지 않습니다. 고통은 흉기를 드는 순간 정의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 역시 작은 습관을 돌아봐야 합니다. 이 시대는 자기극화를 보상합니다. 누구나 상처의 주인공이 되라고 초대받습니다. 알고리즘은 얼굴 있는 분노, 짧은 구호, 선명한 악역을 좋아합니다. 그 분위기 속에서 절제, 비례, 확인, 책임, 잘못을 겪고도 집행자를 자처하지 않는 능력은 낡아 보입니다. 그러나 낡아 보이는 덕목이야말로 지금 가장 급한 덕목일 수 있습니다.

휴브리스와 네메시스는 인간이 자기 한계를 잊을 때 무엇이 무너지는지 두려워했던 세계에서 온 말입니다. 김동환의 발화는 교양 있는 인용으로 기억될 일이 아닙니다. 상처 입은 자아가 정의의 말을 배우고 책임의 훈련을 배우지 못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보여주는 경고로 남아야 합니다.

살인은 가해자가 비극이라 부른다고 비극이 되지 않습니다. 진짜 비극은 가해자의 말이 피해자의 생명보다 크게 들리기 시작할 때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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