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he Minab School Strike: Trump’s False Peace and the Children Killed
미나브 초등학교 오폭: 트럼프의 거짓 평화와 죽어간 어린이들
초등학교는 미래가 작은 신발을 신고 들어오는 장소입니다. 출석을 부르고, 공책을 펴고, 아직 세상의 악의를 다 배우지 못한 아이들이 글자와 숫자를 배웁니다. 그런 곳에 미사일이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어른들은 곧바로 숫자를 다투기 시작했습니다.
이란 남부 미나브의 샤자레 타예베 초등학교 오폭 사건은 이미 여러 서사 속으로 끌려 들어갔습니다. 이란 당국은 높은 사망자 수를 발표했고, 로이터는 미군 조사관들이 미국 책임 가능성을 보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다만 최종 결론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고 밝혔습니다. 국제앰네스티는 이후 조사에서 사망자를 156명, 그중 어린이를 120명으로 제시했습니다. 앞서 160명대, 170명대 수치가 보도된 흐름도 있었습니다.
숫자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숫자가 중요한 이유는 통계표의 질서 때문이 아닙니다. 그 하나하나가 아이, 교사, 부모, 교실, 미처 끝내지 못한 하루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권력은 때때로 숫자를 흐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노할수록 더 정확해야 합니다.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1946– ) 대통령은 이 사건을 두고 근거를 제시하지 않은 채 이란이 한 일이라는 취지로 말했습니다. 그러나 팩트체크닷오알지는 영상, 위성사진, 전문가 분석, 여러 언론 보도를 종합하면 그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가 부족하며 미국 책임 가능성을 가리키는 정황이 적지 않다고 정리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오래된 정치 기술을 봅니다. 죽은 아이들은 미나브에 남아 있는데, 책임만 국경을 넘어 도망치기 시작합니다.
평화라는 말은 죽은 아이들을 문장 밖으로 밀어낼 때 거짓이 됩니다
트럼프는 자신을 거래와 종결, 강한 평화의 정치인으로 포장해 왔습니다. 그에게 평화는 정의의 상태라기보다 힘을 행사한 뒤 탁자 위에 올려놓는 전리품에 가깝습니다. 먼저 압박하고, 나중에 안정이라 부릅니다. 먼저 폭격하고, 나중에 질서라 말합니다. 먼저 민간인이 죽고, 나중에 전략적 필요가 등장합니다.
정치 지도자가 평화를 말하는 일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 문제는 평화가 압도적 폭력 이후의 침묵을 뜻하게 될 때 생깁니다. 휴전은 미사일을 멈출 수 있지만, 민간인의 죽음을 가능하게 만든 사고방식까지 멈추지는 못합니다. 협상은 전투를 줄일 수 있지만, 협상력을 만들기 위해 이미 부서진 삶을 설명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 평화는 전쟁의 반대말이 아닙니다. 전쟁이 옷을 갈아입고 돌아온 모습입니다.
미나브 사건은 이 거짓 평화의 작동 방식을 잔혹하게 보여줍니다. 로이터 보도에 따르면 학교는 이란 혁명수비대 관련 시설과 인접해 있었습니다. 국제앰네스티는 위성사진 분석을 통해 해당 학교 구역이 수년 전부터 군사 시설과 물리적으로 분리되어 있었으며, 미국이 낡은 정보에 의존했거나 표적 확인 의무를 충분히 수행하지 않았을 가능성을 제기했습니다. 이 설명이 맞다면, 이것을 그저 실수라고 부르기 어렵습니다. 날짜를 잘못 적는 일이 실수입니다. 학교로 쓰인 흔적이 여러 해 동안 드러난 건물을 미사일이 때렸다면, 그것은 하늘에서 난 오타가 아니라 제도의 실패입니다.
권력의 옹호자들은 곧잘 이렇게 말합니다. 아이들을 죽이려 한 것은 아니었다고. 그 말이 사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전쟁 윤리는 의도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국제인도법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존재합니다. 민간인은 악의만으로 죽지 않습니다. 부주의, 서두름, 낡은 정보, 느슨한 교전 규칙, 기관의 오만, 그리고 민간인 죽음을 행정 항목처럼 다루는 지휘 체계 때문에도 죽습니다.
부주의한 표적 판단으로 죽은 아이는 증오로 죽은 아이보다 덜 죽은 것이 아닙니다. 이 문장은 견디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곳에서 윤리가 시작됩니다.
오폭 이후 첫 번째 싸움은 사실을 둘러싼 싸움입니다
미나브 사건 뒤에 벌어진 일은 군사적 증거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이야기의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트럼프는 이란 책임을 말했습니다. 로이터는 미국 관리들을 인용해 미군 조사관들이 미국 책임 가능성을 보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국제앰네스티는 학교가 인접 군사 시설의 다른 구조물들과 함께 직접 타격을 받았으며, 미국산 토마호크 미사일이 인근 공격에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습니다. 유엔 관련 조사도 시작되었습니다.
아직 모든 불확실성이 사라졌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정치적 패턴까지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큰 민간인 피해가 발생합니다. 당국은 책임을 미룹니다. 조사가 진행 중이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진행 중”이라는 표현은 도덕적 판단을 조용히 대기실에 앉혀두는 데 자주 쓰입니다. 나중에 책임이 확인되면 언어는 다시 바뀝니다. 비극적 오류, 유감스러운 손실, 재발 방지, 교훈. 죽은 사람들은 어느새 회의록의 문장으로 이동합니다.
그래서 사실의 정확성은 차가운 행정 절차가 아닙니다. 그것은 죽은 이들에 대한 최소한의 충실함입니다. 애초에 사용자가 제안한 “175명의 어린이”라는 표현은 최종 검증 수치로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일부 정치권 자료와 초기 보도는 175명 사망, 그중 다수가 어린이라는 식으로 표현했습니다. 로이터는 이란 측이 어린이 168명이 숨졌다고 밝혔다고 전했습니다. 국제앰네스티의 최신 조사 수치는 156명 사망, 어린이 120명입니다.
분노는 가장 큰 숫자를 고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정의는 가장 정확한 문장을 요구합니다. 그렇다고 참사의 무게가 줄어드는 것은 아닙니다. 어린이 120명이 숨졌다면 그것은 충분히 압도적인 비극입니다. 더 큰 숫자를 빌려오지 않아도, 아이들이 교실에서 죽었다는 사실만으로 세계는 이미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전쟁을 뉴스 화면으로 접하는 사람들에게 “민간인 희생”이라는 말은 지나치게 깨끗하게 들립니다. 그 표현에는 연기 냄새가 없고, 콘크리트 아래 손가락이 없고, 부모에게 연락하려던 교사의 다급함이 없습니다. 국제앰네스티는 학교 직원들이 부모에게 아이들을 데려가라고 연락했고, 멀리 사는 가족들에게는 그 시간이 치명적 지연이 되었다는 증언을 소개했습니다. 이런 세부는 중요합니다. 피해자 수라는 말 앞에 있었던 하루의 순서를 되돌려주기 때문입니다.
정밀한 전쟁이라는 말은 위험을 아래로 떠넘길 때가 많습니다
현대 군사권력은 자신을 정밀하다고 설명하기 좋아합니다. 유도 미사일, 첨단 정보, 실시간 감시, 인공지능 보조 분석, 세밀한 표적 선정. 이런 말들은 통제의 느낌을 줍니다. 대중은 전쟁이 어디로 가는지 알고 움직이는 폭력이라고 상상하게 됩니다. 그러나 미나브는 그 자신감의 어두운 면을 보여줍니다. 기관이 자신이 충분히 보고 있다고 믿는 순간, 정말 충분히 보았는지 묻는 일을 멈출 수 있습니다.
정밀함은 정치를 없애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치적 선택을 기술 절차 속으로 밀어 넣습니다. 누가 데이터베이스를 갱신했습니까. 누가 옛 군사 건물이 학교로 바뀌었는지 확인했습니까. 누가 아이들이 있을 시간대에 공격을 승인했습니까. 누가 취소 권한을 가졌습니까. 이 질문들은 부차적이지 않습니다. 모든 공격의 도덕적 골격입니다.
국제앰네스티는 분쟁 당사자가 군사 목표와 민간 대상을 구별해야 하며, 학교는 보호받는 민간 시설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동시에 이란 당국이 민간인을 군사 목표 인근에 두거나 희생자 가족과 생존 아동을 선전 목적으로 활용했다는 점도 비판했습니다. 이 대목은 중요합니다. 미국 책임을 묻는 일이 이란 국가를 미화하는 일이어서는 안 됩니다. 자기 국민을 군사 시설 가까이에 두고, 애도의 시간을 국가 선전으로 사용하는 권력 역시 비판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한 국가의 냉혹함이 다른 국가의 미사일을 면죄하지는 않습니다.
민간인은 종종 두 개의 권력 장치 사이에 갇힙니다. 한쪽은 군사적 필요를 말하고, 다른 쪽은 순교를 말합니다. 둘 다 아이들을 어른의 권력을 증명하는 자료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는 상징이 되겠다고 동의한 적이 없습니다. 아이는 학교에 있었습니다.
여기서 트럼프의 거짓 평화는 특히 해롭습니다. 그것은 힘을 먼저 풀어놓고 나중의 말로 도덕적 세탁을 할 수 있다는 환상을 줍니다. 전략적 이야기가 충분히 자신감 있게 제시되면, 인간의 잔해도 관리 가능하다고 믿게 만듭니다. 하지만 부인으로 시작해 평화 연설로 끝나는 정치는 폭력을 넘어선 것이 아닙니다. 폭력을 부드러운 언어로 다시 포장하는 법을 익힌 것뿐입니다.
불확실성이 책임을 취소하지는 않습니다
공적 논쟁에는 자주 쓰이는 속임수가 있습니다. 하나의 사실이 아직 불확실하니 모든 판단을 미루자는 태도입니다. 최종 조사 보고서가 나오지 않았으니 책임도, 분노도, 도덕적 판단도 유보하자는 말입니다. 이것은 권력에게 매우 편리합니다. 법적 신중함과 윤리적 마비를 혼동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물론 조사는 공정해야 합니다. 미사일 잔해, 표적 자료, 지휘 기록, 정보 갱신 내역, 위성사진 모두 확인해야 합니다. 그러나 한두 요소가 아직 불확실하다고 해서 이미 드러난 사실까지 지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학교가 타격을 받았습니다. 아이들이 죽었습니다. 미국 책임 가능성이 복수의 보도를 통해 제기되었습니다. 트럼프는 근거 없는 책임 전가 발언을 했습니다. 인권단체는 표적 확인과 민간인 보호 조치의 심각한 실패 가능성을 지적했습니다.
민주적 책임은 최종 보고서 이후에만 시작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권력이 미루고 싶어 하는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학교는 공격 금지 대상 목록에 있었습니까. 민간인 피해 완화 담당 조직은 작동했습니까. 인공지능 도구가 표적 선별이나 우선순위 결정에 쓰였습니까. 사람의 검토는 어느 단계에서 이루어졌습니까. 학교로 쓰인 사실은 마지막으로 언제 확인했습니까. 왜 아이들이 있을 수 있는 시간에 공격이 이루어졌습니까. 누가 승인했습니까. 가족들에게 어떤 배상이 이루어질 것입니까.
이 질문은 반미가 아닙니다. 반면책입니다. 책임을 묻는 일을 배신으로 여기는 공화국은 자신이 비판하는 권력의 얼굴을 조금씩 닮아갑니다. 해외 민간인의 존엄은 국내 민주주의의 부록이 아닙니다. 민주주의가 자기 이름값을 하는지 확인하는 시험대입니다.
미국은 오랫동안 중동에서 해방, 억지, 안보, 안정, 평화라는 단어를 번갈아 사용해 왔습니다. 그 단어들이 언제나 거짓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단어들은 때때로 폭력을 행정 업무처럼 들리게 만드는 데 쓰였습니다. 미나브 초등학교 오폭은 그 긴 기록에 또 하나의 페이지를 더했습니다. 공식 유감은 늦고, 책임은 부분적이며, 정의는 서류가 되어 도착합니다.
진짜 추문은 학교가 타격받았다는 사실만이 아닙니다. 관들이 식기도 전에 정치 언어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평화는 전략가가 아니라 아이에게서 시작해야 합니다
평화가 홍보 문구 이상의 의미를 가지려면 군사 언어가 피하려는 자리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전쟁을 선택하지 않은 아이, 끝까지 아이들을 내보내려 했던 교사, 너무 늦게 도착한 부모, 위성사진에는 보였지만 공격 논리에는 보이지 않았던 학교 건물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정직한 정치는 죽은 아이들이 전략을 복잡하게 만들었는지 묻지 않습니다. 그런 죽음을 낳은 전략이 이미 문명의 기준에서 실패한 것은 아닌지 묻습니다. 이것은 순진한 평화주의를 요구하는 말이 아닙니다. 안보라는 말이 보호한다고 주장하는 생명들을 삼켜버리지 못하게 하자는 최소한의 품위입니다.
필요한 일들은 분명합니다. 미국의 조사는 공개적이고 구체적이어야 합니다. 결정 과정과 책임 계통을 밝혀야 합니다. 민간인 피해 완화는 사고 뒤에 켜는 홍보 장치가 아니라 사고 전에 작전을 멈출 권한을 가져야 합니다. 인공지능이 표적 판단에 쓰였다면 의미 있는 인간 통제와 확인 가능한 책임자가 있어야 합니다. 피해 가족에게는 배상과 진실이 함께 제공되어야 합니다. 돈은 진실의 대체물이 될 수 없습니다.
이란 당국 역시 민간인을 군사 시설 인근에 두었던 책임, 애도하는 가족과 생존 아동을 국가적 장면으로 끌어낸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미나브의 아이들은 두 번 이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한 번은 죽음으로, 또 한 번은 선전으로 말입니다.
미나브에서 멀리 떨어진 우리에게 남은 일은 화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작지 않습니다. “부수적 피해”라는 말을 들을 때 아이들을 떠올려야 합니다. “예비 조사”라는 말을 들을 때 어떤 증거가 아직 공개되지 않았는지 물어야 합니다. “평화”라는 말을 들을 때 누구의 무덤이 그 축하에서 빠졌는지 따져야 합니다.
권력으로 가는 길에서 죽은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는 평화는 평화가 아닙니다. 그것은 낮은 목소리로 말하는 전쟁입니다.
미나브 이후의 평화는 책임으로 측정되어야 합니다
미나브 초등학교 오폭은 우리에게 엄중한 의무를 남깁니다. 죽은 이들을 기리는 길은 숫자를 부풀리는 데 있지 않습니다. 어떤 숫자도 권력에 편리한 장식이 되지 못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최종 검증 수치가 어린이 120명이든, 168명이든, 또 다른 수치이든 도덕적 계산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학교에서 아이들이 죽었고, 대통령은 사실이 정리되기도 전에 책임을 다른 곳으로 밀어냈습니다.
트럼프의 평화가 거짓인 이유는 강함을 찬양하라고 요구하면서 그 강함의 피해자는 보지 말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정의로운 평화는 반대로 움직입니다. 잔해와 교실, 가족과 증거에서 시작합니다. 책임을 권력의 수치가 아니라 정치가 제정신을 되찾는 첫 조건으로 삼습니다.
미나브의 아이들은 자신들 위에서 오가는 연설에 답할 수 없습니다. 살아남은 우리가 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첫 문장은 분명해야 합니다. 책임을 부인한 채 세워지는 평화는 평화라는 이름을 가질 자격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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