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ersian Civilization and Iran: How History Resists Modern Imperialism
페르시아 문명과 이란: 역사가 현대 제국주의에 맞서는 방식
페르시아 문명과 이란은 오늘의 국제 뉴스에서 너무 자주 하나의 위기 이미지로 줄어듭니다. 제재, 핵 협상, 미사일, 성직자, 석유, 호르무즈 해협, 강대국의 경고. 세계의 뉴스 화면은 이란을 오래된 문명으로 만나기보다 관리해야 할 문제로 호출하는 데 익숙합니다.
하지만 이란을 진지하게 읽는 일은 바로 그 축소를 거부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그렇다고 오늘의 이란 국가가 비판에서 면제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어떤 국가도 그런 특권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권력자가 고대의 영광을 방패처럼 들고 시민의 자유, 여성의 몸, 노동자의 삶, 소수자의 권리를 가로막는다면 그 영광은 시민의 것이 아니라 권력의 장식품이 됩니다.
문제는 더 날카롭습니다. 한 정권을 비판하는 일과 한 사회의 역사적 깊이를 지워버리는 일은 전혀 다릅니다. 정부는 임시적입니다. 문명은 시간을 오래 통과한 대화입니다. 페르시아는 정복당했고, 이슬람화되었고, 튀르크계 왕조와 몽골의 충격을 지나왔고, 근대에는 열강의 간섭과 석유 정치, 쿠데타, 혁명, 전쟁, 제재를 겪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국경의 형태로만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언어, 시, 의례, 종교적 상상력, 행정의 기억, 굴욕을 견디는 자존감으로 되돌아왔습니다.
그러므로 질문은 페르시아가 한때 위대했는가가 아닙니다. 그런 질문은 박물관 유리장 앞에서 끝납니다.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왜 이토록 많은 파열을 겪은 문명이 현대 패권주의의 압박 앞에서도 역사적으로 얕아 보이지 않는가.
페르시아는 위기 이전에 이미 오래 버티는 정치의 문법을 만들었습니다
기원전 6세기 키루스 대왕이 세운 아케메네스 제국은 에게해 세계에서 인더스강 쪽으로 뻗어간 거대한 제국이었습니다. 물론 규모만으로 문명의 생명력이 설명되지는 않습니다. 세계사에는 넓은 영토를 차지한 제국이 많았습니다. 군대도 있었고, 도로도 있었고, 궁전도 있었습니다. 페르시아의 특이성은 차이를 완전히 없애기보다 통치 가능한 조건으로 다루려 했다는 데 있습니다.
이 말은 조심해서 읽어야 합니다. 아케메네스 제국 역시 제국이었습니다. 조공을 거두었고, 위계를 만들었고, 군사력을 행사했습니다. 고대의 관용을 오늘의 평등과 같은 말로 바꾸는 것은 역사에 대한 예의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페르시아는 지배받는 지역의 언어, 종교, 관습, 엘리트를 일정하게 활용하며 넓은 세계를 묶었습니다. 다양성이 없는 척한 것이 아니라 다양성을 다루는 통치 기술을 발전시킨 셈입니다.
페르세폴리스의 부조는 그래서 단순한 왕권의 과시만은 아닙니다. 물론 왕권의 과시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여러 지역의 사절, 의복, 동물, 예물, 몸짓이 한 장면 안에 모이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돌은 권력의 기록이지만, 그 권력 아래 모인 복수의 세계도 함께 기록합니다. 페르시아의 기억은 이 장면에서 시작됩니다. 하나의 중심이 여러 차이를 지우지 않고도 자신을 상상할 수 있다는 오래된 감각 말입니다.
바빌론에서 발견된 키루스 원통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을 현대 인권선언의 원형처럼 과장하는 해석은 피해야 합니다. 고대 왕의 정치문서를 오늘의 도덕 언어로 곧장 번역하는 일은 매혹적이지만 위험합니다. 다만 이 유물이 보여주는 점은 분명합니다. 페르시아 왕권은 파괴만이 아니라 회복, 합법성, 신성한 질서의 복원을 통해 자신을 설명하려 했습니다. 제국도 이야기 없이는 오래 버티지 못합니다.
현대 패권은 훨씬 차가운 말을 즐겨 씁니다. 불량국가, 비합리적 행위자, 위협, 불안정의 원천. 이런 단어들은 세계를 설명하는 척하면서 세계를 줄입니다. 한 사회를 안보 파일 안에 가두고, 국민을 권력자의 그림자처럼 취급합니다. 그러나 페르시아 문명의 기억은 그 파일보다 넓습니다. 다스렸고, 번역했고, 흡수했고, 다시 나타난 문명은 최신 제재 목록보다 오래된 시간 속에서 자신을 이해합니다.
왕조가 아니라 언어가 기억을 지켰습니다
페르시아가 왕조에만 의존했다면 이미 여러 번 사라졌을 것입니다. 아케메네스 제국은 알렉산드로스에게 무너졌고, 사산 왕조는 7세기 아랍·이슬람 정복 이후 해체되었습니다. 이후에도 튀르크계 궁정, 몽골의 파괴, 티무르계 후원, 사파비 왕조의 재편, 카자르 시대의 굴욕, 팔레비의 근대화, 혁명과 전쟁과 제재가 이어졌습니다. 정치 형식은 반복해서 끊어졌습니다.
그런데도 페르시아어와 문학은 끊어진 시간을 다시 잇는 방식이 되었습니다. 제국주의가 쉽게 다루지 못하는 지점도 바로 여기입니다. 군대는 영토를 점령할 수 있습니다. 제재는 경제를 조일 수 있습니다. 외교 문서는 국가를 분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슬픔, 사랑, 왕권, 신앙, 풍자, 윤리를 품은 언어는 그렇게 간단히 점령되지 않습니다.
1010년 무렵 완성된 피르다우시의 『샤나메』는 이 문제의 중심에 있습니다. 『샤나메』는 역사 교과서가 아닙니다. 사실을 투명하게 보관한 중립 창고도 아닙니다. 그것은 시입니다. 신화와 역사, 영웅과 몰락, 왕과 배신, 운명과 명예가 뒤섞인 거대한 기억의 형식입니다. 이 작품의 힘은 이슬람 정복 이후에도 이란계 공동체가 이전의 기억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고 새 시대의 언어 안에서 다시 붙잡을 수 있게 했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부드러운 향수와 다릅니다. 패배를 자기삭제로 끝내지 않도록 만드는 문화적 생존술입니다. 『샤나메』는 옛 제국을 되살리지 않았습니다. 대신 더 오래가는 일을 했습니다. 무너진 사람들이 자신의 시간을 남의 시계에 전부 맡기지 않도록 언어를 제공했습니다. 정복자는 패배한 자가 정복자의 시간표를 받아들이기를 원합니다. 페르시아 문학은 그 곁에서 다른 시간이 계속 흐르게 했습니다.
페르시아어의 영향은 오늘의 이란 국경을 넘어 중앙아시아와 남아시아, 오스만 세계의 일부로 퍼졌습니다. 관료제, 궁정문화, 시, 신비주의, 교육의 언어로 이동했습니다. 정치적 지배는 사라졌지만 페르시아적인 문화 형식은 여러 지역에서 살아 움직였습니다. 권력은 이상하게 작동합니다. 직접 통치가 끝난 뒤에도 언어가 남아 사람들의 품격, 취향, 기억, 통치 방식을 바꾸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슬람은 페르시아를 지우지 않았고, 페르시아는 이슬람을 다시 빚었습니다
이란을 말할 때 흔히 보이는 게으른 도식이 있습니다. 하나는 이슬람이 페르시아를 완전히 대체했다는 주장이고, 다른 하나는 페르시아가 이슬람을 순수하게 거부했다는 주장입니다. 둘 다 너무 납작합니다. 더 어려운 진실은 페르시아 문명이 이슬람에 의해 변형되었고, 동시에 이슬람 문명도 페르시아의 언어와 관료제, 사유와 미학을 통해 다시 형성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랍·이슬람 정복 이후 페르시아 엘리트와 학자들은 이슬람 문명의 핵심 구성원이 되었습니다. 사상가, 관료, 시인, 신학자, 과학자가 이슬람 세계의 지적 장면을 풍부하게 만들었습니다. 페르시아어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문자와 어휘, 종교적 감각을 입고 되돌아왔습니다. 이것은 페르시아의 죽음이 아니라 조건이 바뀐 귀환이었습니다.
16세기 초 사파비 왕조는 이 변형에 또 하나의 강한 형식을 부여했습니다. 사파비 왕조가 열두 이맘파 시아파를 국가 종교로 세우면서 이란은 수니파 오스만, 우즈베크 세력과 구별되는 종교적·정치적 정체성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순수한 신앙의 사건만은 아니었습니다. 국가 형성, 경계 설정, 엘리트 통제, 문화적 결속이 함께 움직인 사건이었습니다.
여기서도 낭만화는 금물입니다. 종교 정체성은 공동체를 보호하기도 하지만 배제를 굳히기도 합니다. 존엄의 언어가 될 수 있지만 몸을 통제하는 규율이 되기도 합니다. 억압받는 사람에게 순교와 정의의 상상력을 줄 수 있지만, 권력자에게 복종을 요구하는 말이 되기도 합니다. 오늘의 이란을 정직하게 읽으려면 시아파를 낯선 위협으로만 보거나 순수한 저항의 그릇으로만 보는 양쪽을 모두 넘어서야 합니다.
그럼에도 문명의 지속성이라는 관점에서 사파비적 전환은 중요합니다. 그것은 이란이 자신을 알아보는 또 하나의 오래가는 형식을 만들었습니다. 카르발라의 기억, 고통의 윤리, 부당한 권력에 대한 의심, 상처 입은 존엄의 감각이 정치적 상상력 안으로 깊게 들어왔습니다. 오늘의 반제국주의 언어가 종종 이 종교적 기억에서 힘을 얻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권력은 그것을 선전으로 이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전은 오래된 감각을 건드릴 때만 작동합니다.
1953년의 상처는 현대 제국주의의 언어를 의심하게 만들었습니다
현대의 압박이 왜 이란을 쉽게 꺾지 못했는지 이해하려면 20세기를 정면으로 보아야 합니다. 모하마드 모사데그 총리가 석유 국유화를 추진한 뒤 1953년에 축출된 사건은 이란 정치 기억의 깊은 상처로 남아 있습니다. 미국과 영국의 역할은 여러 기밀 해제 자료와 역사 연구를 통해 확인되어 왔습니다.
이 사건이 중요한 까닭은 그해의 권력 교체 때문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많은 이란인에게 세계 질서의 문법을 가르쳤습니다. 주권은 전략적 이해와 석유 이익을 건드리지 않을 때만 존중된다는 교훈, 민주주의라는 말도 냉전과 기업 이익 앞에서 쉽게 접힐 수 있다는 교훈, 굴욕이 외교 문서의 차가운 문장 속에서 시민의 감정으로 흘러들어올 수 있다는 교훈입니다.
굴욕은 위험한 역사 감정입니다. 그것은 정당한 존엄의 요구를 낳을 수 있습니다. 동시에 권위주의 권력자가 자신을 민족의 수호자로 포장하는 데 이용할 수도 있습니다. 이 두 사실을 함께 붙잡아야 합니다. 반제국주의 기억이 자동으로 정의로운 국가를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외세의 지배에 반대하는 정부도 자국 시민을 억압할 수 있습니다. 이란 시민들은 외부의 강압과 내부의 억압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잔인한 질문 앞에 세워져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도 바로 그 기억 때문에 외부 압박은 종종 자신이 약화시키려는 구조를 도리어 강화합니다. 제재가 권력층만이 아니라 보통 사람의 일상을 조일 때, 그것은 바깥 세계가 개혁보다 굴복을 원한다는 서사를 키웁니다. 군사적 위협이 반복될수록 사람들은 침략과 간섭의 오래된 기억을 떠올립니다. 그러면 국가는 문명의 존엄을 빌려 시민에게 고통을 견디라고 요구합니다.
이것이 제국적 정치의 냉혹한 효율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반대한다고 말하는 정권에게 감정적 자원을 공급할 때가 있습니다. 한 문명이 표적으로 취급될수록, 권력자는 역사적 생존의 천을 자기 어깨에 걸치려 합니다. 그 비용은 시민이 두 번 냅니다. 국내 권력 아래서 한 번, 그 권력이 저항의 언어를 독점하도록 돕는 외부 압박 속에서 또 한 번.
문화의 시간은 완전 통제의 환상을 이깁니다
현대 권력은 성급합니다. 협정문, 수치, 제재 효과, 군사 균형, 선거 주기, 시장 반응을 원합니다. 눈에 보이는 결과를 재촉합니다. 그러나 페르시아 문명은 더 긴 간격 속에서 움직여 왔습니다. 정복과 회복, 침묵과 발화, 번역과 갱신, 애도와 축제의 간격 말입니다.
노루즈는 작은 예이지만 의미는 큽니다.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인정된 이 봄맞이 축제는 현대 이란 국경을 넘어 여러 지역과 공동체가 공유합니다. 조로아스터교적 흔적, 계절의 순환, 가족의 방문, 음식과 의례, 지역적 다양성이 함께 얽혀 있습니다. 노루즈는 지정학적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그래서 많은 지정학적 프로그램보다 오래갑니다. 매년 돌아오는 의례는 국가가 명령해야만 역사가 움직인다고 믿는 권력의 오만을 조용히 비웃습니다.
이것은 신비주의적 찬사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달력, 음식, 이름, 농담, 장례, 노래, 식탁의 이야기로 버팁니다. 제국적 권력은 항구, 송유관, 기지, 조약은 잘 읽지만 부엌과 무덤과 시의 세계는 종종 얕게 읽습니다. 그러나 문명은 바로 그 작은 장소에서 재생산됩니다. 오늘의 강대국이 하늘을 장악할 수는 있어도, 아이에게 그 하늘의 이름을 가르치는 것은 여전히 가정과 언어와 기억입니다.
물론 문명적 자부심도 감옥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위대함을 연기하라는 요구에 갇힐 수 있습니다. 과거는 현재의 고통을 침묵시키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권력자는 말합니다. 우리의 역사가 길기 때문에 너의 자유는 기다려야 한다고. 그래서 페르시아 문명을 옹호하는 일은 반드시 살아 있는 사람을 옹호하는 일이어야 합니다. 페르시아의 장엄함은 국가만의 소유가 아니며, 애국을 독점하려는 어떤 파벌의 소유도 아닙니다. 그것은 시인, 반대자, 노동자, 여성, 학생, 소수자, 신자, 회의적인 사람, 망명자, 그리고 보상받지 못한 채 기억을 이어가는 평범한 가족들의 것입니다.
현대 제국주의가 페르시아 문명을 무너뜨리지 못하는 이유는 이란이 상처받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지배는 제도를 빠르게 손상시킬 수 있지만, 오래 축적된 역사적 깊이를 같은 속도로 지울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가능성은 비판과 존중을 함께 붙잡는 데서 시작됩니다
실천적 결론은 이란을 서구에 맞서는 낭만적 상징으로 소비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페르세폴리스를 들먹이며 오늘의 억압을 덮자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서구가 이란을 위협으로만 줄이는 오류를 반대로 반복하는 일입니다. 정의로운 독해는 세 가지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제국주의적 압박은 현실입니다. 이란 국가의 폭력도 현실입니다. 페르시아 문명의 지속성 역시 현실입니다.
이렇게 읽을 때 비판의 윤리가 달라집니다. 어떤 정부를 비판하기 위해 그 사회의 역사를 모욕할 필요는 없습니다. 제국적 강압에 반대하기 위해 감옥, 검열, 젠더 통제, 경제적 무능에 침묵할 필요도 없습니다. 페르시아 문명을 존중한다는 말이 그 상징을 사용하는 정권 앞에 고개를 숙인다는 뜻이어서는 안 됩니다.
더 어려운 연대가 필요합니다. 사회를 표적으로 바꾸는 언어를 거부하는 연대, 헤드라인 아래의 깊이를 듣는 연대, 이란인의 존엄이 외부 지배에 맡겨질 수도 없고 국내 권력에 압수될 수도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연대입니다. 페르시아의 이름에 걸맞은 이란의 미래는 굴욕을 다른 옷으로 갈아입히는 방식으로 오지 않을 것입니다.
에필로그: 순간의 제국은 역사의 전부가 아닙니다
페르시아가 견디는 이유는 그것이 압박할 수 있는 국가, 협상할 수 있는 정권, 관리할 수 있는 파일만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페르시아는 언어, 의례, 문학, 종교적 상상력, 행정의 기억, 상처 입은 주권감이 쌓인 문명적 시간입니다. 현대 제국주의는 그것을 다치게 할 수 있습니다. 왜곡할 수도 있습니다. 권위주의 권력자가 그것을 이용하도록 도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이 살아가는 방식 전체를 지배하지는 못합니다.
순간의 제국은 언제나 자기 도구가 최종적이라고 믿습니다. 역사는 더 오래된 목소리로 대답합니다. 페르시아 문명은 그 대답 가운데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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