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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브란트의 무릎, 바르샤바의 30초가 한 국가의 시간을 다시 썼다

1970년 12월 7일,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는 바르샤바 게토 추모비 앞에 갑자기 무릎을 꿇었습니다. 서독인 48%는 "과했다"고 답했습니다. 왜 그 30초의 침묵은 오늘날 우리가 보는 모든 연출된 사과보다 여전히 무거운가.
빌리 브란트의 무릎 - 바르샤바의 30초 | 기억과 사죄 그리고 정치적 책임

빌리 브란트의 무릎, 바르샤바의 30초가 한 국가의 시간을 다시 썼다

1970년 12월 7일, 바르샤바. 바르샤바 게토 영웅 기념비 앞은 회색 겨울빛에 잠겨 있었습니다. 서독 총리가 화환을 내려놓고, 한 걸음 물러서며 리본의 위치를 바로잡습니다. 국빈 방문의 동선은 본래 역사를 의례 안으로 흡수하는 정교한 기계입니다. 화환, 묵념 잠시, 인쇄된 일정표, 정시에 출발하는 차량 행렬. 그런데 그 기계가 그날 한 번 멈춥니다. 총리는 다시 차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는 젖은 돌바닥 위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 약 30초간 그 자세로 머무릅니다.

아무도 통보받지 못했습니다. 외무장관 발터 셸(Walter Scheel, 1919–2016)조차 사진기자들과 똑같이 충격을 받았다고 훗날 회고했고, 동방정책의 설계자이자 평생의 동지였던 에곤 바르(Egon Bahr, 1922–2015)는 군중 사이로 한마디 속삭임이 흘러갔다고 적었습니다. 그가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침묵.

이 글은 정치적 제스처에 대한 회의를 학습한 독자, 즉 연출된 사과와 홍보 컨설턴트가 조율한 카메라 앵글,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는 참회의 의례를 너무 많이 목격해 온 분들께 건네는 한 편의 초대입니다. 바르샤바의 무릎 꿇기, 독일어로 크니팔(Kniefall)이라 불리는 이 사건은 그러한 회의가 쉽게 처리하지 못하는 질문을 던집니다. 어떤 조건에서, 차가운 돌 위에 30초간 내려앉은 한 사람의 몸이 수만 페이지의 조약문이 해내지 못한 일을 해낼 수 있는가. 그리고 그 사실은, 사과는 폭증했지만 책임은 희박해진 오늘의 정치 질서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는가.

1. 침묵의 공화국, 보지 않기로 한 21년

그 30초가 왜 폭발했는지 이해하려면 먼저 그 30초를 둘러쌌던 침묵을 복원해야 합니다. 1970년의 서독은 건국한 지 스물한 해째였습니다. 콘라트 아데나워(Konrad Adenauer, 1876–1967)는 경제를 일으켰고, 나토에 닻을 내렸으며, 1952년에는 이스라엘과 배상협정을 맺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주재한 전후 합의는 역사가들이 훗날 긴 침묵이라 부르게 되는 토대 위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자기 부모와 이웃이 무엇을 했는지를 너무 깊이 들여다보지 않기로 한, 그렇게 함으로써 폐허에서 다시 일어서기로 한 암묵의 사회계약 말입니다. 아우슈비츠 생존자들이 옛 수용소 간수들과 같은 거리에서 살았고, 제3제국에 복무했던 판사들이 다시 법정에 앉았습니다. 1963년부터 1965년까지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아우슈비츠 재판이 그 침묵을 비로소 비집고 나오기 시작했지만, 막 시작된 균열에 불과했습니다.

한편 폴란드는 모든 거리에 파국의 기하학이 새겨져 있는 나라였습니다. 6백만의 폴란드 시민이 살해당했고, 그 절반이 유대인이었습니다. 바르샤바 게토는 흔적도 없이 파괴되었고, 1944년 봉기 이후 수도 자체가 집단 응징의 대상으로 철거되었습니다. 두 나라 사이의 국경—오데르–나이세 선—은 어느 서독 정부도 공식 인정한 적이 없었습니다. 옛 동부 영토에서 추방된 약 천이백만 명의 독일계 실향민들은 영토 회복을 요구하며 정치적으로 결집해 있었습니다.

이것이 빌리 브란트(Willy Brandt, 1913–1992)가 해체하기로 결심한 부정(否認)의 건축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국가적 참회자 역할에는 가장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가해자도 아니었고, 수동적 방관자조차 아니었습니다. 본명 헤르베르트 프람(Herbert Frahm)으로 태어난 그는 1933년 독일을 떠나 나치 시기 내내 노르웨이와 스웨덴에서 망명 생활을 했고, 저항 언론에서 활동했습니다. 의미 있는 차원에서 말하자면, 브란트는 사적으로 사죄해야 할 이유가 가장 적은 독일인이었습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가 사죄할 수 있었습니다.

2. 같은 날의 두 개의 무게: 조약과 몸

크니팔은 진공 속에서 발생한 사건이 아닙니다. 브란트는 그날 바르샤바에서 바르샤바 조약, 즉 서독이 오데르–나이세 선을 폴란드의 서부 국경으로 공식 인정하는 조약에 서명했습니다. 이는 상징이 아니라 법적 행위였습니다. 훗날 가까스로 의회를 통과한 이 조약을 통해 서독은 슐레지엔, 포메른, 동프로이센 등 전쟁 이전 영토의 약 4분의 1에 대한 미래의 모든 영유권 주장을 포기했습니다. 폴란드 측에서는 아우슈비츠 생존자이기도 한 총리 유제프 치란키에비치(Józef Cyrankiewicz, 1911–1989)가 책상 맞은편에서 서명했습니다.

같은 날 오후 브란트는 게토 영웅 기념비에 들렀습니다. 이 기념비는 1944년 폴란드 국내군의 바르샤바 봉기—시기와 성격이 다른 별개의 사건입니다—가 아니라, 1943년 게토 안에 갇힌 유대인들이 트레블린카 이송을 거부하고 무장 봉기를 택한 사건을 기리는 비석입니다. 약 45만 명에 달하던 게토 주민 중 살아남은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기념비는 사실상 거대한 무덤 위에 서 있는 셈입니다.

총리는 다가가, 화환을 내려놓고, 리본을 매만지고, 한 걸음 물러섰습니다. 그리고 정해진 묵례 대신 무릎을 꿇었습니다. 울지 않았고, 말하지 않았고, 카메라를 의식한 연출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곳에 카메라는 사방에 있었지만 말입니다. 훗날 자서전 『회상(Erinnerungen)』(1989)에서 그는 이 행위를 놀랍도록 절제된 한 문장으로 설명합니다.

독일 역사의 심연 앞에서, 살해당한 수백만 명의 무게 아래에서, 나는 인간이 말로는 더 이상 어쩌지 못할 때 하는 일을 했습니다.

— 빌리 브란트, 『회상』(1989)

이 문장에 남는 것은 연출로서의 참회가 아니라, 모든 연출이 실패한 자리로서의 참회입니다. 브란트는 자신이 가진 모든 어휘—조약의 잘 다듬어진 독일어, 외교의 신중한 독일어—가 너무 작은 그릇임을 입증하는 도덕적 실재 앞에 도착했던 것입니다. 그때 진실에 가닿을 수 있는 유일한 도구로 남아 있었던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한 사람의 몸이었습니다.

3. 48퍼센트, 사과를 원하지 않은 사회 속에서의 사과

반세기를 건너뛰어 회상하면 크니팔은 즉각적으로 감사히 받아들여진 행위처럼 기억되기 쉽습니다. 그렇지 않았습니다. 며칠 뒤 『슈피겔』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서독인의 48퍼센트가 무릎 꿇기를 지나치다(übertrieben)고 답했습니다. 적절했다는 응답은 41퍼센트, 무응답은 11퍼센트였습니다. 절반에 가까운 국민이 그 행위에 분개했거나, 적어도 동의를 표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 통계가 이야기에서 가장 자주 잊히는 부분이고, 동시에 가장 결정적인 부분입니다. 브란트는 국민적 합의의 흐름을 타고 무릎을 꿇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그 합의를 거슬러 무릎을 꿇었습니다. 서독의 절반이 명시적으로 거부했고, 자기 정당의 표심 상당수—옛 동부 영토에서 쫓겨난 실향민들—가 배신으로 받아들인 도덕적 입장을, 그는 연방공화국의 이름으로 떠맡았습니다. 18개월 뒤 기독민주당의 라이너 바르첼(Rainer Barzel, 1924–2006)은 건설적 불신임으로 그의 정부를 무너뜨리려 시도했고, 단 두 표 차이로 실패했습니다. 훗날 그 두 표는 동독 슈타지에 매수된 것으로 거의 확인되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슈피겔』의 헤르만 슈라이버는 한 문장을 적었고, 그 문장은 사진과 분리될 수 없는 주석이 되었습니다. 꿇을 필요가 없었던 그가, 꿇어야 했지만 꿇지 않은 모든 사람을 대신해 무릎을 꿇었다. 이 문장은 총리 본인이 시도하지 않은 정확성으로 그 행위의 구조를 명명합니다. 브란트의 무릎 꿇기는 대속(代贖)의 행위였습니다. 그것은 가해자의 사죄가 아니었습니다. 1970년의 가해자들은 대체로 침묵했고, 일부는 죽었으며, 일부는 여전히 공직에 앉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비(非)가해자가, 아직 자기 자신을 사죄할 방법을 찾지 못한 공화국을 대신해 떠맡은 사죄였습니다.

4. 기억의 정치학, 왜 몸은 여전히 말보다 강한가

왜 이것이 작동했을까요. 왜 55년이 지난 지금도 그 사진이, 이후의 수많은 의례적 참회—그동안 정말 많았습니다—가 결코 따라잡지 못한 무게를 여전히 지니고 있는 것일까요.

독일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Karl Jaspers, 1883–1969)는 1946년 『죄책의 문제(Die Schuldfrage)』에서 독일의 죄책은 결코 하나의 범주로 환원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네 가지를 구별합니다. 법정이 판단하는 형사적 죄, 한 국가의 시민으로서 집단적으로 떠맡는 정치적 죄, 자기 양심 앞에서만 답할 수 있는 도덕적 죄, 그리고 다른 이들이 죽어간 자리에서 살아남았다는 사실 자체가 묻는 형이상학적 죄. 야스퍼스의 핵심은 전후 독일이 이 네 범주를 끊임없이 서로에게 무너뜨려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죄를 자기 것이라 자처하며 자기연민으로 흘러가거나, 아니면 모든 죄를 부정하며 망각으로 흘러가거나.

크니팔이 끈질긴 생명력을 가지는 이유는 이 네 범주 어디에도 깔끔히 들어가지 않는 자리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브란트는 범죄자로서 무릎을 꿇은 것이 아닙니다. 회한이라는 세금을 납부하는 시민으로서 꿇은 것도 아닙니다. 죄책감에 시달리는 양심으로서 꿇은 것도 아닙니다. 그는 굳이 이름 붙이자면 정치적 책임의 자세, 즉 한 사람이 한 국가로부터 그 국가의 제도뿐 아니라 그 국가가 만든 사자(死者)들까지 상속받게 되며, 이 상속이 어떤 개인도 선택하지 않은 의무를 부과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자세로 무릎을 꿇었습니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는 야스퍼스를 읽으며 훗날, 죄책(guilt)은 언제나 개인적이지만 책임(responsibility)은 집단적이고 정치적이라는 날카로운 구별을 고집하게 됩니다. 브란트는 바로 그 구별을 자기 몸으로 가시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개인적으로 유죄가 아니었지만, 정치적으로 책임이 있었습니다. 무릎 꿇기는 그 차이를 비로소 보이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지점이 우리 시대를 거꾸로 비춥니다. 반세기가 지난 오늘, 우리는 공적 사과의 인플레이션 경제 속에서 살아갑니다. 국가 원수들은 일정에 맞춰 사과하고, 기업들은 법무팀을 통해 사과하며, 정치인들은 수동태로 사과합니다. 실수가 있었습니다(mistakes were made). 그러면서도 그 잘못을 만들어낸 구조는 그대로 둡니다. 사과의 통화가 너무 깊이 평가절하되어, 청중은 새로운 사과 하나하나를 이미 학습된 냉소로 받아 듭니다. 그 냉소는, 솔직히 말하자면, 충분히 정당하게 학습된 것입니다.

반면 브란트가 내놓은 것은 비용이 드는 사과였습니다. 측정 가능한 퍼센트 단위의 국내 정치 자본을 잃었고, 연정 의석을 잃었으며, 실향민 단체에게는 동부 영토가 언젠가 돌아올 것이라는 마지막 환상마저 잃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비용이 들었기 때문에, 국민의 절반이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참모도 권하지 않았고 어떤 여론조사로도 사전 검증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은 연출로 소화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다른 무엇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5. 그 행위의 핵심에 자리한 한 가지 착오

그런데 진정으로 정직한 독해라면 한 가지 사실을 더 함께 두어야 합니다. 역사학자 미하엘 볼프존(Michael Wolffsohn, 1947–)은 논쟁적이게도, 브란트가 잘못된 기념비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고 주장합니다. 총리는 폴란드 민족 전체의 전시(戰時) 고통에 사죄하고자 했지만, 게토 영웅 기념비는 게토의 유대인 희생자를 특정해 추모하는 비석입니다. 1970년 당시 많은 평범한 폴란드인들이 그 죽음을 자국의 사자(死者)로 온전히 끌어안기 전이었기에, 폴란드 현지의 즉각적 반향은 후대의 기억이 기록한 것보다 훨씬 조용했습니다.

이 사실은 각주로 묻어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사실이야말로 그 행위의 사후적 생애가 가장 흥미로워지는 지점입니다. 브란트의 지리적 의도가 무엇이었든, 세계가 그 무릎 꿇기에 부여한 의미는 그가 단독으로 저작권을 주장할 수 있는 의미를 초과했습니다. 이미지가 기획자의 손을 빠져나간 것입니다. 그것은 우연만큼이나 의도에 의해, 전후 독일의 한 총리가 살해당한 유대인들 앞에 무릎 꿇는 순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이야말로, 그때까지 독일 정치문화가 무대에 올리기를 거부해 온 바로 그 장면이었습니다.

진지한 행위는 이렇게 작동합니다. 행위자가 끝내 통제할 수 없는 의미의 잉여를 발생시킵니다. 크니팔이 역사에 속하는 이유는 브란트가 그 상징을 완벽히 장악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자기 의도보다 더 진실한 이미지를 만들어냈기 때문입니다.

6. 돌에서 일어선 다음에 일어난 일

브란트는 서명된 조약 한 장과 절반쯤 분노한 나라 하나를 뒤로하고 바르샤바를 떠났습니다. 그는 1972년 11월 다음 총선에서 사회민주당 역사상 최대 격차의 승리를 거둡니다. 『타임』은 이미 그를 1970년의 인물로 선정한 뒤였고, 노벨위원회는 1971년 그에게 평화상을 안겼습니다. 그러나 어느 영예도 핵심이 아닙니다. 핵심은, 그 사진이 회람된 이후 어느 시점에 독일의 정치적 상상력이 그 이전에는 갖지 못했던 어떤 허락을 비로소 손에 쥐었다는 사실입니다. 사자(死者)는 산 자에게 청구권을 가지며, 그 청구권은 결코 완전히 변제될 수 없지만 적어도 공적으로 떠맡을 수는 있다는 허락. 무릎을 꿇은 채로, 카메라 앞에서, 겨울에, 돌 위에서.

이 단 한 번의 행위에서 열린 문은 실제로 추적 가능합니다. 1972년 동서독 기본조약, 1975년 헬싱키 협정, 결국에는 간접적으로 1989년의 조건들. 동방정책이 냉전을 종식시킨 것은 아니지만, 냉전을 얼어붙게 만든 도덕적 건축물에 결정적 균열을 냈습니다. 그리고 그 균열은 30초 동안, 한 사람의 몸을 통해 바르샤바를 지나갔습니다.

7. 우리에게 남겨진 자세

1970년이 직접 호명한 적 없는 독자—독일인도 폴란드인도 아닌 한국의 독자에게 이 이야기는 무엇을 묻는가. 매우 구체적인 것을 묻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정치문화가—서울이든 도쿄든 워싱턴이든, 과거가 아직 정리되지 않은 어느 수도이든—책임을 상속받지 않으면서 참회를 연기하는 방법을 얼마나 다양하게 발명해 왔는지를 알아차리라고 요구합니다. 기자회견, 정성껏 다듬은 성명서, 가해자의 이름은 슬며시 빠뜨리는 국가 예산의 박물관. 이 모든 형식은 몸을 곧게 세운 채로, 무릎을 잠그고, 의례를 매끄럽게 굴러가게 합니다.

브란트의 교훈은 모든 지도자가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비용이 드는 사과와 비용이 들지 않는 사과의 차이는, 우리의 어휘가 따라잡기 전에 우리의 몸이 먼저 감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야스퍼스와 아렌트가 이해한 대로, 상속된 책임은 감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실천입니다. 그리고 실천에는 자세가 있습니다.

55년이 지나도 그 사진은 늙지 않았습니다. 무릎을 꿇은 한 사람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고, 여전히 침묵하며, 자기 것이 아닌 무게를 자기가 떠맡기로 결정한 채로 그 무게를 견디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를 모방하라고 요구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적어도, 우리가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지를 인식하도록 요구받습니다. 한 인간이 행사한 정치적 성숙이 한 국가의 시간에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 준, 30초의 노출 사진을 말입니다.

카메라 셔터 소리는 이어졌습니다. 총리는 일어섰습니다. 냉전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조용한 무엇이 그 자리에서 옮겨졌습니다. 죽은 자에게서 산 자에게로, 한 세기에서 다른 세기로, 그 돌바닥에서, 여전히 어떻게 서 있어야 하고 어떤 순간에는 어떻게 무릎 꿇어야 하는지를 배우려 애쓰는 우리 모두에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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