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트르와 실존 — 당신은 존재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저 있습니까
선택한 적 없는 삶
오늘 아침, 당신은 별다른 확신 없이 맞춰둔 알람에 눈을 떴습니다. 취향이라기보다는 습관에 가까운 옷을 걸쳤고, 목적을 의심한 지 오래된 회의에 앉아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오늘 하루가 끝날 무렵, 당신은 분명히 그 자리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단 한 순간이라도 진정으로 ‘실존했는지’는 전혀 다른 질문입니다.
이것은 수수께끼가 아닙니다.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가 20세기 사상의 한가운데에 놓은 정확한 구분입니다. 세계 안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과, 진정으로 실존하는 것 사이의 간극. 그 간극이 불편하게 느껴지신다면, 당신은 이미 사르트르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작업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돌파 이전의 벽 — 사르트르는 왜 모든 것을 다시 생각해야 했는가
1940년대 초, 유럽 문명은 물리적으로만이 아니라 지적으로도 폐허가 되어 있었습니다.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가 수십 년 전에 선언한 대로 도덕적 질서를 보증하던 신은 죽었고, 계몽주의의 합리적 체계들은 유토피아가 아니라 산업화된 학살을 낳았습니다. 인간에게 ‘당신은 무엇이며 왜 여기에 있는가’를 알려주던 모든 기존의 틀이 무너진 것입니다.
1941년 포로수용소에서 풀려난 사르트르는 이 공백 앞에서 절망하는 대신 하나의 전율적인 질문을 던졌습니다. 미리 정해진 인간 본성이 없다는 사실이 재앙이 아니라 해방이라면? 1943년 그의 주저 『존재와 무』(L’Être et le néant)에서, 그는 그 답을 하나의 폭발적인 명제로 벼려냅니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 사르트르, 『존재와 무』 (1943)
종이칼은 제조되기 전에 설계됩니다. 그것의 본질 — 용도 — 이 먼저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사르트르의 주장에 따르면, 아무런 청사진도, 사명서도, 미리 장착된 영혼도 없이 세계에 도착합니다. 먼저 실존하고, 그 이후에야 비로소 선택의 축적을 통해 어떤 본성이든 갖게 됩니다. 대본은 주어진 적이 없습니다.
짐으로서의 자유 — ‘선고받았다’는 말의 해부
이 말이 상쾌하게 들린다면, 사르트르는 곧바로 축하의 분위기를 뒤엎습니다.
인간은 자유를 선고받았다. 세계에 내던져진 이상, 그는 자신이 하는 모든 것에 대해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 사르트르, 『존재와 무』
‘선고받았다’는 표현은 의도적입니다. 사르트르에게 자유란 자격 있는 자에게 주어지는 선물이 아니라, 깨어 있는 매 순간마다 따라붙는 도피 불가능한 조건입니다. 선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선택을 거부하는 것조차 하나의 선택이며, 그에 대한 전적인 책임은 당신에게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사르트르가 자기기만(mauvaise foi)이라 부른 개념이 자리합니다. 『존재와 무』에서 그는 카페 웨이터를 묘사합니다. 약간 과장된 주의력, 쟁반을 나르는 기계적 정확성 — 모든 몸짓이 하나의 연기입니다. 웨이터는 그 역할에 너무 완벽하게 녹아들어, 하나의 두려운 진실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는 웨이터가 아닙니다. 그는 우연히 식탁 시중을 들고 있는, 자유로운 의식입니다. 역할이란 자유가 주는 현기증으로부터의 피난처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웨이터를 알아봅니다. ‘어쩔 수 없었어요, 회사 방침이니까요’라고 말하는 직원. ‘원래 그런 거지’라며 어깨를 으쓱하는 시민. 자기기만이란 자유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기 위해 우리 스스로에게 투여하는 마취제입니다.
자유가 세계와 만나는 자리 — 은폐해서는 안 될 긴장
지적 정직성은 사르트르 체계 안의 진짜 난점을 인정할 것을 요구합니다. 실존이 정말로 본질에 앞선다면, 그가 묘사하는 자유는 열두 시간 교대 근무에 출근하는 공장 노동자에게도, 그 근무를 설계한 경영진에게도 동등하게 속해 있습니다. 자유의 형식적 평등은 그것을 행사할 물질적 능력의 불평등을 가리고 있는 것입니다.
사르트르 자신도 이 긴장과 평생 씨름하며, 후기 저작 『변증법적 이성비판』(1960)에서 마르크스주의 분석에 가까워졌고, 자유란 그것을 제약하는 구조들 안에서 작동한다는 점을 인정하기에 이릅니다.
이것은 덮어둘 흠결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르트르 사유에서 가장 생산적인 마찰 지점입니다. 개인의 자유와 구조적 제약은 서로를 소거하지 않으며, 영구적이고 불편한 대화 속에 공존합니다. 사르트르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은 두 진실을 동시에 붙잡는 것입니다. 당신은 급진적으로 자유롭고, 당신을 둘러싼 구조는 급진적으로 실재한다는 것.
실존이라는 공동의 기획
자기기만이 함정이라면, 출구는 어디에 있습니까. 사르트르는 진정한 선택(authentic choice)을 가리킵니다 — 당신의 결정이 당신이 될 사람만이 아니라 인류가 될 수 있는 하나의 비전을 함께 창조한다는 사실을 온전히 자각한 채 행동하는 것. 1945년 강연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에서 그는 선언합니다. 당신이 선택할 때, 당신은 모든 사람을 위해 선택하는 것이라고.
여기서 급진적 개인주의는 예기치 않게 연대를 향해 열립니다. 나의 자유가 타인의 자유를 인정하는 데 의존한다면, 실존은 결코 고독한 기획이 아닙니다. 자기기만을 거부하는 것에서 시작되는 미시적 저항 — 대본에 의문을 제기하고, 역할을 심문하는 것 — 은 그것이 옆에 있는 사람에게까지 확장되는 순간 하나의 정치적 행위가 됩니다. 위로부터 부과되는 혁명이 아니라, 상호 인정이라는 일상적 실천입니다. 나는 당신도 자유를 선고받은 존재임을 봅니다, 그리고 당신을 하나의 기능으로 축소하기를 거부합니다.
당신은 이 세계에 내던져지겠다고 선택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도착한 순간부터, 매 초가 하나의 결정이었습니다 — 선택이 비어 있다고 믿었던 순간에도.
누군가 건네준 대본이 아니라, 감히 자신의 것이라 부를 수 있는 자유로부터 행동한 마지막 순간은 언제였습니까? 그리고 내일 아침, 주변의 사람들 하나하나를 바라보며 그들 안에도 그 두렵고도 아름다운 짐이 있음을 알아본다면, 무엇이 달라질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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