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속주의란 무엇인가
가속주의는 현대 사회를 이미 밀어붙이고 있는 힘들, 곧 자본주의, 기술, 자동화, 시장, 인공지능, 물류 체계, 사회적 불안정성을 무조건 늦추기보다 오히려 더 밀어붙이거나 다른 방향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보는 사유입니다. 그래서 이 개념은 처음부터 위험한 매력을 품고 있습니다. 미래를 말하는 이론처럼 보이지만, 실은 현재에 대한 고백에 가깝습니다. 우리는 사회가 기계를 운전한다고 믿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기계가 사회를 운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게 됩니다.
가속주의가 문제적인 이유는 바로 그 의심을 정면으로 건드리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의 속도는 느리고, 기후위기와 금융시장과 AI 개발은 빠릅니다. 정치가 낡은 절차 속에서 우물쭈물하는 동안, 삶의 조건은 이미 바뀌어 버립니다. 그때 가속주의는 불온한 질문을 던집니다. 기존 질서를 부드럽게 수리할 수 없다면, 그 모순을 더 빠르게 밀어붙여 다른 세계로 넘어갈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입니다. 가속주의는 속도의 이론으로 출발하지만, 결국 누가 그 속도에 깔리는가를 묻는 윤리의 문제로 돌아옵니다.
SF 소설에서 태어난 말이 정치철학의 난제가 되었습니다
이 말의 출발점은 의외로 소설입니다. 미국 SF 작가 로저 젤라즈니(Roger Zelazny, 1937–1995)는 1967년 장편소설 『신들의 사회』, 원제 Lord of Light에서 Accelerationists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소설 속 이들은 계급적으로 굳어진 사회에 기술을 빠르게 확산시켜 변화를 일으키려는 집단입니다. 당시 이 말은 정교한 정치철학 용어가 아니었습니다. 소설적 장치였고, 미래 사회를 상상하기 위한 불씨였습니다.
그 불씨는 뒤늦게 이론의 장으로 돌아왔습니다. 브리태니커는 이 용어가 이후 영국 철학자 벤저민 노이스의 『부정성의 지속』(2010)에서 기술적 의미로 쓰였다고 설명합니다. 흥미로운 대목은 노이스가 가속주의를 옹호하기보다 비판하기 위해 이 말을 다듬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비판자가 벼린 말은 때로 비판 대상의 깃발이 됩니다. 개념도 청소년처럼 말을 잘 듣지 않습니다. 와이파이만 잡히면 바로 독립합니다.
가속주의는 하나의 깔끔한 학파에서 나온 사상이 아닙니다. 로저 젤라즈니의 SF,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분석,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의 욕망 이론, 1990년대 영국 워릭대학교 주변의 사이버문화 연구, 그리고 인터넷 시대의 정치적 불안이 뒤섞이며 만들어진 혼성 개념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늘 조금 삐걱거립니다. 바로 그 삐걱거림 때문에 중요합니다.
핵심 구조는 속도, 포획, 돌파입니다
가속주의의 기본 구조는 세 단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먼저 현대 자본주의가 엄청난 생산력과 기술적 능력을 만들어냈다는 진단이 있습니다. 다음으로 그 능력이 이윤, 경쟁, 소유권, 국가 권력에 붙들려 인간의 자유를 곧장 확장하지 못한다는 비판이 따릅니다. 마지막으로 급진적 정치는 순수한 작은 공간으로 후퇴하는 데 머물지 말고, 이미 세계를 조직하고 있는 거대한 체계들과 맞서야 한다는 주장이 나옵니다.
이 점에서 가속주의는 마르크스와 가까운 자리에 있습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자본주의가 생산양식을 끊임없이 뒤흔들고 낡은 사회관계를 녹여버린다고 보았습니다. 이후의 가속주의자들은 이 양가성을 이어받습니다. 자본주의는 감옥이면서 동시에 도구와 과학과 네트워크와 욕망을 만들어낸 거대한 용광로입니다. 문제는 용광로가 누구를 태우는지 묻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가속주의는 갈라집니다. 어떤 흐름은 자본주의와 기술 자체가 인간을 넘어서는 방향으로 질주한다고 봅니다. 다른 흐름은 기술을 자본의 명령에서 떼어내 민주적이고 평등한 목적에 맞게 다시 써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같은 가속주의라는 이름 아래 전혀 다른 정치가 숨어 있는 셈입니다. 한쪽은 집단적 통제를 통한 해방을 말하고, 다른 한쪽은 붕괴와 위계와 약자의 포기를 말할 수 있습니다. 이 혼동은 사소한 용어 문제가 아니라 개념 자체의 위험 지대입니다.
닉 랜드는 가속주의의 어두운 자력입니다
가속주의를 말할 때 가장 논쟁적인 인물은 영국 철학자 닉 랜드(Nick Land, 1962– )입니다. 그는 워릭대학교와 사이버네틱 문화연구단위, 곧 CCRU와 연결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랜드의 글은 자본의 속도, 사이버네틱스, 반휴머니즘적 상상력을 거의 열병처럼 밀어붙였습니다. 그는 인간적 절제나 자유주의적 상식을 낡은 감상으로 취급했고, 자본과 기술을 인간 주체를 넘어서는 힘처럼 그렸습니다.
랜드가 중요한 이유는 가속주의가 얼마나 매혹적이면서도 위험해질 수 있는지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의 사유는 인간이 역사의 주인이 아니라 더 큰 과정 안의 일시적 장애물일 수 있다고 상상하게 만듭니다. 이 발상은 분명 낡은 상식을 흔드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존엄이 느림의 핑계로 취급되는 순간, 가난한 사람, 장애인, 인종화된 소수자, 이주민, 노동자, 공적 보호에 의존하는 이들은 먼저 이론 안에서 버려지고, 그다음 현실에서 버려집니다.
그래서 우파 가속주의는 지적인 장난감이 아닙니다. 2010년대 후반 이후 이 말은 극우적 붕괴론, 백인민족주의, 자유민주주의의 파괴를 바라는 폭력적 상상과도 연결되었습니다. 브리태니커 역시 우파 가속주의가 백인민족주의와 기독교 파시즘 계열의 사유와 결합한 사례들을 설명합니다. 붕괴를 낭만화할 때, 대개 비용은 힘없는 사람들의 계좌로 청구됩니다.
좌파 가속주의는 자본주의 안으로 더 들어가자는 말이 아닙니다
좌파 가속주의는 이 위험한 개념을 다른 방향으로 구하려 합니다. 알렉스 윌리엄스와 닉 스르니체크는 2013년 「가속주의 정치 선언」에서 신자유주의 자본주의가 진정한 의미의 현대적 미래를 만들어내지 못했다고 비판했습니다. 그것이 만든 것은 여가와 자유가 아니라 스트레스, 불평등, 긴축, 반복되는 소비 전자제품에 가까웠습니다. 이들의 주장은 모든 것을 무작정 빠르게 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이미 존재하는 기술적 능력을 공동의 목적을 위해 다시 배치하자는 제안입니다.
The existing infrastructure is not a capitalist stage to be smashed, but a springboard to launch towards post-capitalism.
— 알렉스 윌리엄스와 닉 스르니체크, 『가속주의 정치 선언』(2013)
이 문장이 좌파 가속주의의 핵심을 잘 보여줍니다. 시장을 숭배하지 말되, 복잡성을 두려워하지도 말자는 것입니다. 작은 공간의 윤리만으로 거대한 체계를 바꿀 수 있다고 믿지 말자는 것입니다. 자동화, 계획, 계산, 제도, 공공적 소유를 통해 불필요한 노동을 줄이고 사회적 안전을 넓히며, 신자유주의가 축소해버린 미래를 다시 열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물론 이 기획에도 어려운 질문이 따라붙습니다. 누가 계획 체계를 통제합니까. 데이터는 누구의 것입니까. 어떤 기술이 해방적이라고 누가 결정합니까. 규모의 정치가 새 관료주의로 변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전문가에게만 맡긴다면, 해방은 관리자의 양복을 입고 돌아올 것입니다. 말하자면 분위기는 진보인데 운영체제가 관료제라면, 그것은 꽤 난감한 업데이트입니다.
속도가 곧 자유는 아닙니다
가속주의에 대한 가장 강한 비판은 그것이 강도를 변화로 착각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사회는 더 빨라지면서도 덜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노동자는 더 빨리 답장을 보내지만 자기 시간은 줄어듭니다. 소비자는 당일 배송을 누리지만 창고 노동은 더 고단해집니다. AI 도구는 생산량을 늘리지만 권력은 소수 기업에 더 집중될 수 있습니다. 속도는 이름만 세련된 쳇바퀴가 되기도 합니다.
벤저민 노이스의 비판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거부, 중단, 부정성의 힘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봅니다. 어떤 것은 더 밀어붙이면 안 됩니다. 생태 파괴, 인종 혐오, 감시, 금융 투기, 알고리즘 관리가 빠르게 확산된다고 해서 해방이 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가속의 정치와 가속 숭배는 구별되어야 합니다. 전자는 물려받은 능력을 공동의 삶에 어떻게 쓸 것인지 묻습니다. 후자는 속도 앞에 무릎 꿇고 그것을 용기라고 부릅니다.
AI 시대에는 이 구별이 더 절실합니다. 더 빠른 모델, 더 빠른 시장, 더 빠른 판단, 더 빠른 낙오가 우리 주변에서 운명처럼 팔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로딩 화면이 아닙니다. 돌봄은 비효율이 아닙니다. 교육, 애도, 신뢰, 조직화, 판단은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정의로운 미래가 고도의 기술을 필요로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미래는 거절할 수 있는 제도, 늦출 수 있는 권한, 권력을 나눌 장치, 혁신의 광고문에서 지워진 사람들을 보호할 공적 감각도 함께 필요로 합니다.
가속주의는 오늘의 불안을 해석하는 위험한 개념입니다
가속주의가 여전히 쓸모 있는 이유는 안전한 답을 주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오늘의 정치가 안고 있는 상처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많은 시민은 두 개의 지친 선택지 사이에 갇혀 있습니다. 하나는 삶을 무자비하게 빠르게 만드는 시장입니다. 다른 하나는 종종 향수나 행정적 신중함으로만 응답하는 정치입니다. 가속주의는 미래가 이미 사유화된 것은 아닌지, 자본주의 아래에서 만들어진 도구들을 더 평등한 세계를 위해 되가져올 수 있는지 묻습니다.
대답은 맹목적인 찬성이 될 수 없습니다. 민주적이고, 절제되어 있으며, 약자에게 책임지는 조건부의 긍정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속도를 숭배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고 모든 규모의 기술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물어야 할 것은 분명합니다. 누가 그것을 지휘합니까. 누가 이익을 얻습니까. 누가 보이지 않게 됩니까. 그것은 보통 사람들의 시간과 존엄과 자유를 넓힙니까.
결국 가속주의는 위험한 진단 개념입니다. 현재는 이미 움직이고 있고, 우리를 재조직하고 있으며, 우리의 몸과 상상력에 요구서를 내밀고 있습니다. 필요한 일은 길가에서 속도를 환호하는 것이 아닙니다. 속도가 방치의 핑계가 되기 전에, 그 방향을 결정할 권리를 되찾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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