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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춰버린 접촉: 연애를 포기한 청년들은 어떻게 정치적 무기가 되었는가

섹스리스 청년들이 정치적 극단주의로 표류하고 있습니다. 이 칼럼은 친밀감의 붕괴와 급진화 사이의 구조적 연결 고리를 추적하며 사회적 고립이 초래하는 위기를 분석합니다.
멈춰버린 접촉: 연애를 포기한 청년들은 어떻게 정치적 무기가 되었는가

멈춰버린 접촉: 연애를 포기한 청년들은 어떻게 정치적 무기가 되었는가

침실이라는 기압계

스물다섯 살 남성 하나를 떠올려 보십시오. 그는 2년째 누군가를 만나지 않았습니다. 퇴근 후 그의 손가락은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피드를 훑고, 그 피드는 속에서 굳어가던 하나의 의심을 확인시켜 줍니다—세상은 조작되어 있고, 자신은 그 게임에서 탈락했다는 의심을. 그는 스스로를 ‘인셀’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그 단어를 들으면 코웃음을 칠 겁니다. 그러나 가슴 어딘가에서 이름 없는 쓰라림이 석회처럼 굳어가고 있고, 그것은 머지않아 정치적 언어를 얻게 됩니다.

이것은 소수의 초상이 아닙니다. 퓨리서치센터(Pew Research Center) 조사에 따르면, 미국 30세 미만 남성의 63%가 스스로를 ‘싱글’이라 답했으며, 이는 같은 연령대 여성의 거의 두 배에 달합니다. 미국 가족연구소(IFS)가 2025년 분석한 전국가족성장조사(NSFG) 데이터는 더 적나라합니다. 22~34세 남성의 섹스리스 비율은 지난 10년간 대략 두 배로 뛰었습니다. 1년간 성관계가 전혀 없었다고 응답한 남성이 9%에서 24%로 치솟은 것입니다. 한국은 더 깊습니다. 인구보건복지협회의 2022년 조사에서 청년의 65%가 비연애 중이었고, 그중 70%가 자발적 비연애를 선택했다고 답했습니다.

이 수치들은 단순히 데이트 문화의 변화를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인정 형식—타인의 몸이 전하는 온기, 보여지는 것의 취약함—으로부터의 대규모 철수를 기록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철수가 임계점에 도달하면, 외로움만 생산되는 것이 아닙니다. 정치가 생산됩니다.

 

거부된 욕망, 은폐된 구조

지배적인 서사는 친밀성의 후퇴를 ‘라이프스타일의 선택’으로 프레이밍합니다. 청년들이 커리어 최적화에 몰두하고, 디지털 엔터테인먼트에 빠져 있으며, 연애의 번잡함이 필요 없을 만큼 깨어 있다는 이야기. 여기엔 한 톨의 진실이 있으나, 그 한 톨이 바위를 가리고 있습니다. 현대 자본주의의 구조가 친밀성을 구조적으로 비싸게 만들었습니다. 대도시 주거비는 한때 공유된 삶을 지탱하던 임금을 집어삼키고, 긱 이코노미는 시간을 구애의 리듬이 불가능한 파편으로 쪼개며, 관심경제를 설계한 소셜미디어 플랫폼은 진정한 만남을 준(準)사회적 퍼포먼스로 대체합니다.

자발성의 서사가 은폐하는 것은 고통의 분배입니다. 친밀성의 붕괴는 균등하게 경험되지 않습니다. 안정적 고용도, 학력 자본도, 공동체 제도가 한때 묶음으로 제공하던 사회적 자본도 없는 청년 남성들—이들은 고독을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문화가 여전히 요구하는 남성적 정체성—부양자, 보호자, 파트너—을 실현할 경로를 제공하지 않는 시스템에 의해 고독 속으로 분류된 것입니다. 요구는 존속하는데 수단은 철거되었습니다. 그 틈으로 특정한 종류의 분노가 밀려듭니다.

 

침실에서 투표소까지

정치적 결과는 이제 명백합니다. 한국의 2025년 대선 출구조사에서 20대 남성의 74% 이상이 보수·우파 후보에 투표했습니다. 한겨레와 한국정당학회 공동 조사는 2030 남성의 극우 성향 비율이 전체 국민 평균의 2.5배에 달한다고 보고했습니다. 대서양 건너편, 2024년 미국 대선에서 Z세대의 성별 간 이념 격차는 이전 어떤 세대보다 압도적이었습니다. 브루킹스연구소의 분석에 따르면 젊은 여성은 같은 세대 남성보다 30%포인트 더 진보적이었습니다.

섹스리스에서 급진화로 이어지는 경로는 단순한 인과 화살이 아닙니다. 디지털 아키텍처가 매개하는 피드백 루프입니다. 연애에 실패한 청년 남성이 어느 날 갑자기 정치적 극단주의자로 깨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먼저 자신의 좌절을 확인해주는 알고리즘 콘텐츠와 조우합니다—개인적 고통을 이념적 계시로 재포장하는 매노스피어 인플루언서들. 메시지는 단순함 속에 유혹적입니다. 페미니즘이 당신의 몫을 훔쳤다. 시스템은 여성에게 보상하고 남성을 처벌한다. 당신의 외로움은 우연이 아니라 불의다. 접속을 향한 탐색이 추천 엔진의 연금술을 통해 원한으로의 모집이 됩니다.

철학자 악셀 호네트(Axel Honneth, 1949– )의 인정 이론이 여기서 정밀한 도구가 됩니다. 호네트는 인간의 번영이 세 가지 형식의 인정에 의존한다고 주장했습니다—친밀한 관계에서의 사랑, 법적·정치적 영역에서의 권리, 가치 공동체에서의 존중. 첫 번째 형식이 무너질 때—가장 친밀한 차원에서 타인에 의해 가치 있는 존재로 인정받는 경험이 박탈될 때—그 상처는 사적 영역에 머물지 않습니다. 사회 질서 전체에 대한 청구로 전이됩니다. 섹스리스 청년 남성은 단순히 파트너를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중요하다는 증거를 원합니다. 친밀성의 시장이 그 증거를 제공하지 않을 때, 이념의 시장이 위조 화폐를 들고 나타납니다.

 

반페미니즘이라는 우회로

한국에서 이 역학은 특히 날카로운 형태를 띠었습니다. 포스트 미투 시대 젊은 남성들의 반발은 무(無)에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실재하는 불안정성의 경험이 비옥하게 만든 토양에서 자랐습니다—의무 병역, 잔혹한 취업 경쟁, 한때 인식 가능한 사회적 역할을 보장하던 전통적 생애 각본의 붕괴를 마주한 세대의 경험. 페미니즘이 지배적 진보 담론으로 도착했을 때, 많은 청년 남성에게 그것은 정의를 향한 호소가 아니라 추가적 고발로 수신되었습니다. 당신은 실패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가해자이기도 하다.

이것은 반페미니즘 반응을 정당화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 계보를 추적하려는 것입니다. 진보 정치의 실패는 젠더 정의에서 양보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면서 청년 남성의 물질적 고통에 말을 건네는 능력의 부재에 있었습니다. 그 결과 생긴 진공을 우파가 숨막히는 효율로 채웁니다. 앤드류 테이트는 정책을 제안하지 않습니다. 인정을—조잡하고 상품화된 형태이지만—인정을 제안합니다. 극우 정치인은 주거 위기를 해결하지 않습니다. 적을 지목하고, 그럼으로써 외로운 남자에게 부족을 선물합니다.

 

상호 취약성의 정치를 향하여

진단이 구조적이라면, 처방이 치료적일 수만은 없습니다. 불안정성의 건축을 그대로 두고 청년 남성에게 ‘자기 계발’을 주문하는 것은 가장 잔인한 형태의 가스라이팅입니다. 필요한 것은 대규모 외로움을 생산하는 구조적 조건과 친밀성·소속·인정을 향한 정당한 인간적 필요를 동시에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정치—그 필요를 반동적 포획에 넘겨주지 않으면서.

이것은 구체적으로, 공유된 삶의 물질적 조건을 재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감당할 수 있는 주거, 안정적 고용, 소비가 아니라 만남을 촉진하는 공적 공간. 진보 담론이 용기를 내어 청년 남성도 고통받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여성혐오에 대한 양보가 아니라 진정한 연대의 전제 조건으로서. 가부장제가 남성도 해친다는 페미니즘의 통찰이 이론적 각주 이상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새로운 연합의 토대가 되어야 합니다.

접촉을 멈춘 몸들은 진공 속에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임대료 인상과 알고리즘 벽과 모든 인간적 충동을 수익화하면서 가장 중요한 하나—안겨지고 싶은 충동—만 굶긴 문화에 의해 분리된 것입니다. 재접속은 데이팅 앱이나 자기계발 팟캐스트에서 오지 않을 것입니다. 취약함이 처벌받지 않고, 돌봄이 사치가 아니며, 사랑받을 자격을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짓는 느리고 화려하지 않은 작업에서 올 것입니다.

철학자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 1956– )는 우리 모두가 처음부터 타자에게 넘겨진 존재라고 썼습니다. 이 사실을 잊은 사회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마지막으로 누군가에게 진정으로 안긴 것은 언제였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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