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범의 오만 — 김동환과 휴브리스의 진짜 의미
수갑 찬 남자가 외친 두 단어
2026년 3월 26일 아침, 부산진경찰서 앞에서 포승줄에 묶인 한 남자가 호송차에 오르며 카메라를 향해 소리쳤습니다. “악랄한 기득권이 한 개인의 인생을 파멸시켜도 된다는 휴브리스—미친 네메시스, 천벌을 받은 것!” 아홉 날 전 동료 항공사 기장을 흉기로 살해한 전직 부기장 김동환(1976– )이었습니다. 현장의 기자들은 낯선 그리스어의 뜻을 서로 확인하느라 잠시 촌극이 벌어졌고, 몇 시간 뒤 ‘휴브리스’와 ‘네메시스’는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고대 명사 두 개의 뜻풀이에 매몰되는 사이, 더 긴박한 물음은 묻혀버렸습니다. 살인범이 도덕철학의 언어를 장악할 때, 그리고 사회가 그 장악을—비록 찰나일지라도—반쯤 승인할 때, 우리에게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까.
휴브리스가 도둑맞기 전, 그 단어는 무엇이었는가
휴브리스는 ‘교만’의 막연한 동의어로 서양 문명에 진입한 것이 아닙니다. 고전기 아테네에서 그것은 정밀한 법률 용어이자 도덕 범주였습니다. ‘그라페 휘브레오스’라는 공소 제도는 시민 누구든 제기할 수 있었으며, 그 대상은 단순한 폭행이 아니라 타인의 존엄을 의도적으로 훼손하는 쾌락을 위해 가해지는 폭력이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기원전 384–322)는 «수사학»에서 이를 정확히 짚었습니다. 휴브리스를 행하는 자는 피해자에게 어떤 결과가 생기기를 바라서가 아니라, 오직 그 행위 자체에서 쾌락을 얻기 위해 해를 끼친다고요. 핵심은 가해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추동하는 경멸—상대를 고려할 가치조차 없는 존재로 취급하는 태도—에 있었습니다.
그리스 비극은 이 법적 직관을 우주적 서사로 확장했습니다. 고대인들이 휴브리스–아테–네메시스–티시스라 불렀던 순환에서, 패턴은 불변이었습니다. 과도한 오만이 판단의 맹목을 낳고, 그것이 비인격적 응보의 힘을 소환하여, 궁극적 파멸에 이르는 것. 결정적으로, 이 순환은 꼭대기에서 시작하는 하강의 호(弧)를 그렸습니다. 신탁을 거스른 것은 왕이었고, 헬레스폰트에 다리를 놓은 것은 정복자였으며, 매장 의례를 거부한 것은 참주(僭主)였습니다. 휴브리스는 권력자의 질병이었지, 박탈당한 자의 호소가 아니었습니다.
오만은 참주를 낳는다. 오만은 헛되고 무익한 것들로 배를 채운 뒤, 가장 높은 처마에 올라서야 비로소 나락으로 떨어진다.
— 소포클레스, «오이디푸스 왕»
살인범의 전도(顚倒)
김동환은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했으나, 조종 병과가 아닌 정보장교로 임관했습니다. 이 사실은 이후 그의 서사 전체를 관통하는 상처의 원점이 됩니다. 대위로 전역한 뒤 미국에서 민간 조종사 자격을 취득했고, 2019년 부산의 한 항공사에 부기장으로 입사했습니다. 그러나 비행 재평가에서 불합격 판정을 받았고, 2022년부터 시작된 장기 병가 끝에 메디컬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해 비행 자격을 잃었습니다. 2024년 퇴사. 이후 조종사 공제회를 상대로 한 퇴직공제금 소송에서도 패소했습니다. 그는 수개월에 걸쳐 최소 6명의 전직 동료 기장을 미행했습니다. 택배 기사로 위장하여 거주지를 파악하고, 항공사 내부 스케줄 시스템에 무단 접속하여 운항 일정을 추적했습니다. 2026년 3월 16일 새벽, 경기 고양에서 한 기장의 목을 조르려 했고(미수), 3월 17일 새벽 5시 30분 부산에서 다른 기장을 흉기로 살해했으며, 체포 당시에는 창원의 세 번째 표적을 향해 이동 중이었습니다.
체포와 송치 과정 전체에 걸쳐 그는 죄책감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행위를 ‘기득권의 휴브리스에 대한 네메시스’라는 서사 안에 끼워 넣었습니다. 그러나 이 서사에서 벌어진 것은 개념의 완전한 전도입니다. 그리스인이라면 인식할 수 있는 모든 기준에 비추어 볼 때—수개월간의 은밀한 추적, 새벽 어둠 속의 기습, 여섯 명을 순차적으로 살해하려 한 냉정한 계획—이 이야기에서 휴브리스의 행위자는 바로 김동환 자신입니다. 경찰에 따르면 그의 살해 대상 목록에 적힌 인물들 가운데에는 그의 인사 평가에 직접 관여하지 않은 이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단순히 해를 끼친 것이 아니라, 타인의 생명을 사적 원한의 장부에서 차감할 수 있는 항목으로 취급하는 모욕의 의례(儀禮)를 수행했습니다.
전도가—비록 잠시라도—작동한 이유
더 불편한 질문은 김동환의 심리가 아니라 대중의 수신(受信)에 있습니다. 온라인 댓글창에는 몇 시간 안에 익숙한 문장이 나타났습니다. “그 기장들이 정말 그렇게 오만했던 건 아닐까?” 이것은 살인을 지지하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직장 내 위계와 제도적 냉혹함의 이야기로 포화된 사회에서, ‘시스템이 하지 않는 일을 해낸 고독한 교정자’의 형상이 발산하는 인력(引力)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드러냈습니다. 김동환의 그리스어 어휘는 아무리 서투르게 배치되었더라도 그의 폭력에 지적 외피를 입혔습니다. 칼날 뒤에 철학이 있고, 분노 뒤에 진단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습니다.
도둑맞은 철학적 언어의 진짜 위험은 바로 이것입니다. 권력을 견제하기 위해 벼려진 개념이 사적 복수를 신성화하는 데 전용될 때, 그 개념은 모든 사람에게 비판적 날을 잃습니다. 휴브리스라는 말은 본래, 통제받지 않는 권위에 대해 사회가 불편한 질문을 던지기 위해 존재했습니다—구제 수단 없이 노동자를 폐기하는 기업에 대해, 투명성 없이 작동하는 평가 시스템에 대해, 이의를 침묵 속으로 분쇄하는 조직 문화에 대해. 살인범이 같은 단어를 자기 깃발로 내세울 수 있게 되는 순간, 그 단어는 자신을 불가결하게 만들었던 바로 그 능력을 잃어버립니다.
단어를 되찾는다는 것, 칼을 거부한다는 것
김동환의 공군사관학교 동기 한 사람은 같은 처지에 놓였던 동료 조종사들의 이야기를 기자에게 들려주었습니다. 코로나19로 항공 산업이 붕괴하자 일자리를 잃은 이들. 택배를 배달했고, 편의점 야간 근무를 했고, 건설 현장의 막노동을 뛰었습니다. 그는 가장 자랑스러운 친구로 과거의 직함에 집착하지 않고 묵묵히 생계를 꾸린 이를 꼽았습니다. 이 이름 없는 전직 조종사들은 김동환과 동일한 구조적 불안정 속에 있었으나, 자신의 고통을 타인의 죽음으로 전환하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들의 존엄에는 그리스어 장식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2026년에 휴브리스가 여전히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 시선은 살해된 피해자가 아니라 일회용 노동자를 양산하는 구조적 조건을 향해야 하며, 그것이 요구하는 응답은 칼이 아니라 제도입니다. 블랙박스처럼 작동하는 항공사 평가 체계, 결정 과정이 불투명한 공제회, 숙련된 전문직 종사자를 안전망 없이 허공에 내놓는 경력 단절의 심연(深淵)—이것이 제도적 오만의 현장이며, 인간 존엄에 대한 조용한 침식이 일상적으로 발생하는 곳입니다. 이 현장의 폭력을 명명할 만큼 정밀한 언어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언어가 살인의 알리바이로 납치되는 것을 용인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리스인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가장 진정한 오만은 스스로를 선언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그것은 그저 행동합니다—자기 정당함을 확신한 채, 자기 과잉에는 눈먼 채로. 김동환은 카메라를 향해 “휴브리스!”를 외치며 적을 지목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실은 자기 자신의 진단서를 작성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다음에 고대의 단어가 정당화할 수 없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소환될 때, 이 하나만 물어보십시오. 누가 힘을 쥐고 있으며, 누구의 몸이 상처를 감당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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