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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구월단이란 무엇인가

추방의 분노가 낳은 검은구월단은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이스라엘 선수 11명을 살해했고, 이스라엘 모사드의 신의 분노 작전은 20년 넘게 대륙을 횡단하며 복수의 칼날을 휘둘렀다. 끝나지 않는 보복의 역사를 추적한다.
검은구월단 - 팔레스타인 무장 투쟁과 끝없는 복수의 역사 | 개념탐구

검은구월단이란 무엇인가

피의 9월에서 태어난 조직

1970년 9월,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은 자국 내에서 급속히 세력을 키워가던 팔레스타인 게릴라 세력에 맞서 계엄령을 선포했습니다. 한 달에 걸친 유혈 전투 끝에 수천 명의 팔레스타인 전사들이 목숨을 잃었고,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는 1971년 중반까지 요르단 땅에서 완전히 축출되었습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 참혹한 패배를 단 두 단어로 기억합니다. “검은 9월.”

그 상처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전이되었을 뿐입니다. 쫓겨난 전사들의 분노와 산산조각 난 자존심의 잔해 위에서 하나의 비밀 무장 조직이 싹을 틔웠고, 자신들을 파멸시킨 바로 그 달의 이름을 스스로의 이름으로 삼았습니다. 1970년에 창설되어 야세르 아라파트의 파타 조직과 긴밀히 연결된 검은구월단은 극도의 비밀 체계 아래 운영되었습니다. 4인 이상으로 구성된 기밀 세포 조직, 서로의 존재조차 모르는 작전원들, 보이지 않는 지휘 체계. 이 구조는 파타 지도부에게 이른바 “합리적 부인 가능성”을 제공했습니다. 조용히 승인한 작전으로부터 공개적으로 거리를 둘 수 있는 장치였던 것입니다.

 

복수의 기계: 카이로에서 뮌헨까지

검은구월단의 첫 번째 대형 공격은 1971년 11월 28일에 감행되었습니다. 네 명의 무장 대원이 카이로 쉐라톤 호텔 로비에서 요르단의 와스피 탈 총리를 암살한 것입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탈 총리가 파타 사령관 아부 알리 이야드의 고문과 처형에 직접 관여했다고 믿었습니다. 아랍연맹 정상회의에 참석 중이던 탈은 오후 3시 45분에 총탄에 쓰러졌습니다. 이 사건은 세계에 하나의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이 조직은 국경을 넘어, 외교적 성역 너머까지 적을 추격할 것이라는 선언이었습니다.

그러나 검은구월단이라는 이름을 전 세계의 의식 속에 각인시킨 것은 1972년 9월 5일의 작전이었습니다. 여덟 명의 무장 대원이 뮌헨 하계올림픽 기간 중 올림픽 선수촌에 침투했습니다. 새벽 어둠 속에서 철조망을 넘어 이스라엘 선수단이 묵고 있던 코놀리가 31번지 건물에 진입한 그들은, 저항하던 레슬링 코치 모셰 바인베르크와 역도 선수 요세프 로마노를 살해한 뒤 아홉 명의 이스라엘 선수와 코치를 인질로 잡았습니다. 이스라엘에 수감된 이백 명 이상의 팔레스타인 수감자 석방과 서독에 구금 중이던 적군파 창설자 울리케 마인호프의 석방이 요구 조건이었습니다.

사태는 파국으로 끝났습니다. 대테러 작전 경험이 전무했던 서독 경찰은 퓌르스텐펠트브루크 공군 기지에서 무모한 구출 작전을 감행했고, 나머지 인질 아홉 명 전원이 사망했습니다. 공격 대원 다섯 명과 독일 경찰관 한 명도 함께 목숨을 잃었습니다. 생존한 세 명의 테러범은 체포되었으나, 불과 몇 주 뒤인 10월 29일 루프트한자 615편 납치 사건을 빌미로 한 인질 교환으로 석방되었습니다.

 

설계자들과 그 장치

살라 칼라프(Salah Khalaf, 1933–1991), 전투 명칭 아부 이야드로 알려진 이 인물이 검은구월단의 설계자이자 파타의 정보 수장이었습니다. 그는 자서전 «무국적자»에서 이 조직을 “저항 운동이 군사적·정치적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없었던 시기의 보조 부대”라고 서술했습니다. 독립적 실체이면서 동시에 PLO 비밀 작전의 부인 가능한 연장이라는 전략적 모호성이 이 조직의 본질이었습니다.

아부 다우드(Abu Daoud, 1937–2010), 본명 모하메드 다우드 우데는 뮌헨 공격의 실질적 기획자였습니다. 그는 요르단 경찰에게 “검은구월단이라는 조직은 존재하지 않는다. 파타가 자신의 작전을 이 이름으로 발표하는 것일 뿐”이라고 진술했으며, 이 고백은 1981년에 기밀해제된 미 국무부 문서로 뒷받침되었습니다. 1981년 바르샤바에서 암살 미수를 겪고도 살아남은 아부 다우드는 2010년 다마스쿠스에서 신부전으로 사망했습니다. 뮌헨과 관련된 핵심 인물 중 모사드가 끝내 제거하지 못한 몇 안 되는 인물이었습니다.

 

끝나지 않는 분노

이스라엘의 골다 메이어(Golda Meir, 1898–1978) 총리는 뮌헨 참사에 대한 응답으로 ‘위원회 X’라는 비밀 조직을 소집했습니다. 모사드 국장 츠비 자미르와 대테러 고문 아하론 야리브 장군에게 뮌헨 학살에 연루된 모든 인물을 추적해 제거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신의 분노 작전” 혹은 “총검 작전”으로 불리게 될 이 암살 캠페인은 대륙을 횡단하며 20여 년에 걸쳐 지속되었습니다.

살해는 신속하게 시작되었습니다. 1972년 10월 16일, 로마 주재 PLO 대표 와엘 즈와이터가 자택 앞에서 열두 발의 총탄을 맞고 쓰러졌습니다. 같은 해 12월 8일에는 파리 주재 PLO 대표 마흐무드 함샤리가 책상 전화기 밑에 설치된 폭탄으로 치명상을 입었습니다. 1973년 1월 24일에는 키프로스 니코시아의 호텔 침대 아래 폭탄이 터져 파타 대표 후세인 알 바시르가 사망했습니다. 암살은 봄까지 이어졌습니다. 파리에서의 바실 알 쿠바이시 사살, 1973년 4월 베이루트에서의 특공대 급습으로 세 명의 검은구월단 고위 간부 제거, 그리고 6월에는 프랑스에서 모하마드 부디아가 자동차 좌석 아래 설치된 압력 감응 폭탄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모사드의 집요한 추격에는 파국적 실수도 따랐습니다. 1973년 7월 21일, 노르웨이의 소도시 릴레함메르에서 모사드 요원들은 실제 표적인 알리 하산 살라메와 외모가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무고한 모로코 출신 웨이터 아흐메드 부시키를 사살했습니다. 임신한 아내가 남편의 피살을 목격했습니다. 노르웨이 경찰에 체포된 여섯 명의 모사드 공작원은 재판을 받고 투옥되었습니다. 이 스캔들은 메이어 총리에게 작전의 일시 중단을 강제했고, 유럽 전역에 걸친 모사드의 은신처와 작전망이 노출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붉은 왕자”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아라파트의 개인 경호 부대인 포스 17을 지휘했던 알리 하산 살라메에 대한 추적은 정권이 바뀌어도 멈추지 않는 집착이 되었습니다. 스위스와 스페인에서의 실패를 거듭한 끝에 모사드는 마침내 1979년 1월 22일 베이루트에서 살라메를 제거했습니다. 그의 차량 행렬이 뤼 베르됭을 지나는 순간 폭발물이 가득 실린 자동차가 원격 기폭되었습니다. 그 폭발은 영국 유학생과 독일 수녀를 포함한 네 명의 무고한 시민의 목숨도 함께 앗아갔습니다.

 

해산, 그리고 길게 드리운 그림자

PLO는 1973년 말 검은구월단을 공식 해산했습니다. 국제 테러가 전략적 부담이 되었다는 정치적 계산이 작용한 결과였습니다. 1974년에 이르러 아라파트는 PLO의 무장 활동을 서안지구, 가자지구, 이스라엘 영토 내로 한정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하나의 9월을 복수하기 위해 세워진 조직은 또 다른 계절의 정치적 셈법에 의해 조용히 매장되었습니다.

그러나 살해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모사드는 1980년대 후반까지 암살 목록에 오른 인물들을 계속 추적하고 제거했습니다. 각종 보고서에 따르면 최종 표적 명단에는 20명에서 35명 사이의 이름이 올라 있었습니다. 이 캠페인과 연결된 마지막 확인된 암살은 1988년 키프로스 리마솔에서 발생했습니다. 살해된 모든 이가 실제로 뮌헨과 관련이 있었는지는 오늘날까지 논란이 계속됩니다. 모사드 장교들을 직접 인터뷰한 저술가 에런 J. 클라인은 직접적으로 검증된 연루자는 1992년 파리에서 사살된 아테프 브세이소 단 한 명뿐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

뮌헨 참사와 그 여파는 세계 안보의 지형 자체를 바꿔놓았습니다. 독일의 GSG 9을 비롯한 유럽 각국의 전담 대테러 부대 창설을 촉진했고, 억지력의 도구로서 국가 주도 암살이라는 선례를 확립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논리 속에 폭력과 보복의 순환이라는 중력장을 새겨 넣었습니다. 그 인력은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이 지역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의 궤도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복수의 풀리지 않는 방정식

모사드 부국장을 지낸 데이비드 킴체(David Kimche)는 이 작전의 목적을 섬뜩할 정도의 명료함으로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목표는 복수라기보다 공포를 심는 것이었다. 그들이 어깨 너머를 돌아보게 만들고, 우리가 바로 뒤에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하고 싶었다.” 복수와 억지 사이의 이 구분은 작전의 더 깊은 구조를 드러냅니다. 어떤 인식 가능한 형태의 정의가 아니라, 정치적 해결의 대용품으로서 영속적 공포를 제조하는 것이 그 본질이었습니다.

검은구월단은 상처에서 태어나 상처를 되돌려주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응답은 또 다시 새로운 상처를 만들어냈고, 그 상처는 자기 자신의 정산을 요구했습니다. 릴레함메르에서 스러진 무고한 웨이터, 베이루트 폭발에 휘말린 행인들, 모사드 암살 목록에 오른 인물들의 논란이 되는 정체성. 이 모든 에피소드는 분쟁이라는 지층 위에 또 하나의 원한의 퇴적물을 쌓아 올렸습니다. 검은구월단의 역사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폭력이 폭력을 낳는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명합니다. 진짜 질문은 이 소용돌이에 갇힌 어느 한 쪽이라도 소용돌이 바깥을 상상할 수 있는 정치적 상상력을 자기 안에서 찾아낼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니면 보복의 논리가 이미 양쪽 모두가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언어가 되어버린 것인지.

어떤 역사는 끝나지 않습니다. 잠시 조용해질 뿐입니다. 부모가 내려놓지 못한 무기를 다음 세대가 집어 들기를 기다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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