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철의 피로사회, 스스로를 착취하는 성과주체의 비극
아무도 들고 있지 않은 채찍
새벽 5시 30분, 알람이 울립니다. 누가 시킨 것이 아닙니다. 아침 식사 전에 이메일을 확인하고, 점심을 거르며 회의에 들어가고, 그것을 자기관리라 부릅니다. 승진도, 사이드 프로젝트도, 쉬는 것에 대한 죄책감도 전부 자기 자신의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감시자도, 간수도, 눈에 보이는 사슬도 없는데—이토록 자유롭지 못하다고 느낀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베를린 예술대학교 교수인 한병철(1959– )은 이 숨 막히는 역설에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는 그것을 피로사회라 불렀습니다.
감옥 너머: 푸코의 지도가 끝나는 곳
한병철이 수행하는 작업을 이해하려면, 먼저 그가 해체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아야 합니다.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는 근대를 규율사회로 진단했습니다. 병원, 감옥, 병영, 공장으로 구성된 세계, ‘해서는 안 된다’라는 명령이 지배하는 세계. 권력은 금지를 통해 작동했고, 주체는 감시당하고 처벌받으며 순종하는 복종주체였습니다. 한병철은 이 진단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것이 이미 만료되었다고 선언합니다.
2010년 출간된 «피로사회»(Müdigkeitsgesellschaft)에서 한병철은 21세기가 부정성의 사회에서 긍정성의 사회로, ‘해서는 안 된다’의 규율 세계에서 ‘할 수 있다’의 성과 세계로 패러다임이 전환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이 새로운 질서의 거주자는 더 이상 복종주체가 아니라 성과주체입니다. 외부의 감시가 필요 없습니다. 성과의 명령을 이미 내면화했기 때문입니다. 성과주체는 한병철의 표현대로 자기 자신의 기업가—한 몸 안에 주인과 노예를 동시에 품고 있는 존재입니다. 규율사회가 광인과 범죄자를 생산했다면, 성과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번아웃을 생산합니다. 병이 달라진 것은 지배의 구조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지점이 이 개념의 가장 날카로운 칼날입니다. 푸코의 파놉티콘은 눈에 보이는 건축을 필요로 했습니다. 한병철의 성과사회는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감옥이 정신 속으로 용해된 것입니다. 착취가 더 이상 공장주로부터 오지 않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올 때, 저항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해집니다—대체 누구에게 반항하겠습니까? 신자유주의적 지배의 천재성은, 한병철에 따르면, 그것이 자유의 감각을 동반한다는 데 있습니다. 당신은 자기 삶을 최적화하고 있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당신의 탈진으로 이윤을 얻는 시스템을 위해 자기 자신을 최적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집어삼키는 긍정성
한병철이 말하는 과잉 긍정성은 정밀하게 해부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낙관주의나 쾌활함이 아닙니다. 모든 면역학적 경계가 제거된 상태—타자, 이질적인 것, 한계의 소멸을 뜻합니다. 규율사회는 여전히 부정을 통해 작동했습니다. 이것은 금지된다, 저것은 비정상이다. 성과사회는 이 장벽들을 녹여버리고 무한한 가능성의 지평으로 대체합니다. 모든 것이 허락되고, 모든 것이 열려 있으며, 모든 것이 당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 결과는 해방이 아니라 긍정성의 폭력—정신이 대사할 수 없는 자극과 정보와 성과 요구의 과잉입니다.
이 틀 안에서 우울증은 의지력의 결핍이 아닙니다. 능동적이고, 생산적이고, 긍정적이기만을 강요받은 자아의 탈진입니다. 한병철은 면역학적 비유를 외과의사의 정밀함으로 구사합니다. 동일한 것의 과잉에 압도된 유기체가 자가면역질환으로 붕괴하듯,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의 끝없는 긍정성의 무게 아래 무너집니다. 번아웃은 개인의 나약함이 아닙니다. 그것은 시스템이 남기는 고유한 상흔입니다.
그러나 지적 정직성은 한병철 프레임의 한계도 직시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의 분석은 때로 베를린의 지친 프리랜서와 라고스의 긱 노동자 사이의 물질적 차이를 평탄화하는 넓은 붓질을 합니다. 성과주체라는 개념은 일정 수준의 구조적 특권을 전제합니다—자기착취의 자유는 애초에 자기 노동을 선택할 자유가 있었음을 함축하기 때문입니다. 인종, 젠더, 지리에 의해 불안정성에 갇혀 있는 이들에게 규율사회는 결코 완전히 떠나지 않았습니다. 한병철의 탁월함은 후기 자본주의의 심리적 건축을 진단하는 데 있고, 그의 사각지대는 그 건축이 얼마나 불균등하게 배분되는지를 과소평가하는 데 있습니다.
피로할 권리를 되찾기 위하여
위기가 구조적이라면 처방이 또 다른 생산성 해킹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한병철은 관조적 삶이라 부르는 것을 향해 손짓합니다—깊은 주의력의 회복, 머무르는 능력, 아무것도 하지 않을 용기. 이것은 게으름이 아니라 하나의 정치적 행위입니다. 시스템이 당신의 과잉활동으로부터 이윤을 얻을 때, 고요함은 저항이 됩니다. 그러나 아마도 더 깊은 과제는 집단적인 것일 것입니다. 탈진이 시장 가치에 따라 분배되지 않는 세계, 돌봄이 상품이 아닌 세계, 쉴 권리가 쟁취해야 할 특권이 아니라 함께 나누는 조건인 세계를 건설하는 것. 거주할 가치가 있는 사회란, 존재가 영원히 성과에 종속되지 않는 사회입니다.
한병철은 가장 잔혹한 주인이 우리 안에 살고 있음을 드러냈습니다—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거부의 자유일 바로 그 순간, ‘할 수 있다’고 속삭이는 목소리. 채찍은 당신 자신의 손에 들려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내려놓을 수 있느냐가 아니라, 그것을 다시 집어 들 필요가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당신의 일상적 탈진 가운데, 지금까지 자유라고 불러왔던 것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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