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와 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 당신의 욕망은 처음부터 당신의 것이 아니었다
1968년 5월, 파리의 거리는 구호로 들끓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같은 시기, 정신분석가의 진료실 벽에는 여전히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의 초상화가 점잖게 걸려 있었습니다. 거리에서는 혁명이, 소파 위에서는 오이디푸스가 군림하던 그 묘한 균형. 1972년, 두 사람의 이방인이 그 균형을 한 권의 책으로 깨뜨렸습니다. 뱅센 대학에서 강의하던 한 철학자, 그리고 루아르 강가의 한 정신병원에서 환자들과 부대끼던 한 정신분석가. 그들의 책 제목은 그 자체로 선전포고였습니다. 『안티 오이디푸스』.
왜 이 텍스트는 반세기가 지나도록 낡지 않을까요.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와 가타리(Félix Guattari, 1930–1992)는 우리가 가장 내밀하게 자기 것이라 믿는 그것 —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결핍하며, 무엇을 사랑하는지 — 가 이미 누군가에 의해 설계된 후 우리에게 도달한다고 의심했습니다. 알고리즘과 정신과 진료비 사이를 오가는 오늘의 풍경 속에서, 이 의심은 도발이라기보다 차라리 일기예보처럼 들립니다.
그들이 우회하지 않은 거대한 벽
이 책이 왜 쓰여야만 했는지를 이해하려면, 두 사람 앞에 서 있던 벽의 부피를 먼저 가늠해야 합니다. 1960년대 후반의 프랑스 지성계는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와 프로이트 사이의 묘한 평화협정 위에서 굴러가고 있었습니다. 자본주의는 바깥세계를 설명했고, 오이디푸스는 안쪽 세계를 설명했습니다. 혁명은 거리의 몫이었고, 신경증은 진료실의 몫이었습니다. 각자 사제와 어휘와 조용한 청구서를 거느리고 있었지요.
가타리는 1955년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라 보르드(La Borde)라는 실험적 정신병원에서 일했습니다. 그는 분열증 환자들이 어떻게 가족 삼각형 — 너의 어머니, 너의 아버지, 그리고 너 — 안으로 축소되어 들어가는지를 매일 목격했습니다. 공장도, 식민지의 상흔도, 병영의 명령체계도 모두 진료실 문 밖으로 정중히 안내되었습니다. 한편 들뢰즈는 스피노자(Baruch Spinoza, 1632–1677), 흄(David Hume, 1711–1776),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 베르그송(Henri Bergson, 1859–1941)을 가로지르며 철학사의 또 다른 계보를 묵묵히 발굴하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만나 감지한 것은 하나의 스캔들이었습니다. 정신분석이 해방시킨다고 자처한 그 무의식이, 알고 보니 아빠와 엄마와 잠긴 침실 문으로 단정하게 가구가 배치된 한 채의 부르주아 아파트였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책의 필연성은 학술적이거나 문체적인 것이 아닙니다. 가장 글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정치적인 것이지요. 바깥에서 역사가 불타는 동안 욕망을 실내에 가둬두기를 거부하는 것. 진짜 질문은 프로이트가 이런저런 콤플렉스에 관해 옳았느냐가 아니었습니다. 무의식이 핵가족 크기로 축소될 때, 누가 이익을 보는가. 이것이 진짜 질문이었습니다.
욕망하는 기계, 결핍이라는 거짓말
여기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첫 번째 정밀한 절개를 시도합니다. 플라톤에서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을 지나 라캉(Jacques Lacan, 1901–1981)에 이르기까지, 서양 사유는 욕망을 줄곧 결핍으로 정의해왔습니다. 손에 넣지 못한 대상의 부재, 그것을 손에 넣으면 마침내 우리를 완성시킬 어떤 것의 부재. 광고는 이 전제 위에서 호흡합니다. 연애의 환멸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끝없이 이어지는 정신분석가의 청구서 또한 그렇습니다.
두 사람은 충격적인 역전을 제안합니다. 욕망은 결핍하지 않는다, 욕망은 생산한다. 무의식은 어린 시절의 드라마가 유료 관객 앞에서 재상연되는 극장이 아닙니다. 그것은 공장입니다. 더 정확히는, 그들이 욕망하는 기계(machines désirantes)라 부른 광활한 배치입니다. 입은 젖가슴에 접속되고, 눈은 스크린에 접속되며, 손은 키보드에 접속됩니다. 우유와 빛과 데이터와 돈의 흐름이 끊임없이 다른 흐름과 짝을 이룹니다. 욕망이란 바로 이 흐름들을 짝짓는 것이며, 긍정적이고 생산적이며, 가족 앨범에 대해서는 놀라울 만큼 무관심합니다.
이 개념은 정밀한 지적 기능을 수행합니다. 정신분석과 소비자본주의 사이의 은밀한 동맹을 해체하는 것입니다. 양자는 모두 우리에게 결핍을 먼저 가르친 뒤, 그 결핍을 채워줄 무엇을 다시 우리에게 되팔아 살아갑니다. 만약 욕망이 결핍이 아니라 생산이라면, 적당한 연인, 적당한 직업, 적당한 상담사, 적당한 구매로 이어지는 자기완성 산업 전체는 형이상학적 알리바이를 잃어버립니다.
기관 없는 신체와 오이디푸스 비판
그러나 욕망의 생산이 무한정 자유롭게 흐르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두 사람이 아르토(Antonin Artaud, 1896–1948)에게서 빌려온 표현, 기관 없는 신체(corps sans organes)라는 어떤 표면에 부딪힙니다. 조직되기를 거부하고, 기능과 역할 안에 끼워 맞춰지기를 거절하는 표면. 모든 사회는 욕망을 특정한 기관 없는 신체 위에 새겨 넣습니다. 고대 제국에서는 전제군주의 신체 위에, 오늘의 세계에서는 탈영토화된 자본의 신체 위에. 어떤 흐름이 허용되고 어떤 흐름이 차단되는가, 누가 그것을 결정하는가 — 역사의 드라마는 결국 이 흐름의 드라마입니다.
여기서 프로이트 비판이 진정으로 위험한 무엇으로 첨예해집니다. 오이디푸스는 정신의 보편적 구조가 아닙니다. 그것은 욕망의 무한한 생산성을 받아 세 명의 배우가 연기하는 작은 무대 위로 접어 넣는 매우 특수한 작업입니다. 당신이 원했던 무엇 — 세계, 다른 삶, 노동의 폐지 — 은 모두 아버지에 관한 죄스러운 소망으로 우회됩니다. 정치적인 것이 가족적인 것이 됩니다. 반항이 퇴행이 됩니다. 오이디푸스는 우리의 불만을 치유하는 약이 아닙니다. 오이디푸스는 우리의 불만을 사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장치입니다.
알고리즘이라는 새로운 진료 소파
이제 책은 우리 쪽으로 돌아섭니다. 이 렌즈를 현재에 대보면 화면이 떨리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정신분석가에게 시간당 수십만 원을 지불하며 우리의 그리움을 어린 시절로 돌려보내지 않습니다. 그 일을 매 순간, 무료로,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아는 추천 알고리즘에게 넘겨주고 있습니다. 플랫폼은 당신의 어머니에 대해 묻지 않습니다. 그저 당신이 도무지 닫지 못하는 흐름이 무엇인지 학습할 뿐이고, 그 접근권을 다른 누군가에게 팔 뿐입니다.
오늘의 자아가 자기 고통을 어떻게 이해하도록 초대받는지 떠올려봅시다. 번아웃은 회복탄력성의 개인적 결함이 됩니다. 외로움은 또 다른 앱으로 메워야 할 결손이 됩니다. 정치적 분노는 미해결된 가족 상처의 증상이 되어, 상담실로, 일기장으로, 자기조절의 영역으로 회수됩니다. 소진을 만들어낸 구조는 손대지 않은 채, 소진된 주체에게만 변화의 책임이 떨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새 옷을 갈아입은 오이디푸스이며, 두 사람은 이 풍경이 도래할 것을 미리 보았습니다.
분석을 한 발 더 밀고 나갈 수도 있습니다. 긱 이코노미는 단지 노동을 착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노동자의 욕망 자체를 자기 자신에 대한 기업가적 투자로 코드화하여, 불안정성이 마치 자유처럼 느껴지도록 만듭니다. 사람들은 자기 시간의 주인이 된 기분으로 자기를 더 깊이 매각합니다. 욕망의 생산성은 이렇게 포획되고, 우회되고, 그 욕망을 만든 바로 그 주체에게 다시 판매됩니다.
이 도박에 깃든 위험
그러나 정직하게 짚어야 할 지점이 있습니다. 『안티 오이디푸스』는 분열증자를 임상적 실재가 아니라 풀려난 욕망의 형상으로 찬양합니다. 이 낭만은 시간이 지나면서 고르게 늙지 못했습니다. 실제 정신증의 고통은 혁명의 구호가 아니며, 매일 그러한 환자들 곁에 있던 가타리 자신이 누구보다 그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책의 수사가 때로 책의 연민을 앞질러 달려간 것은 사실입니다.
또한 “욕망은 생산한다, 욕망은 해방한다”라는 명제를 일체의 충동에 대한 허가증으로 들어서도 곤란합니다. 두 사람은 걸러지지 않은 욕구의 자유주의 복음을 설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다만 묻고 있었습니다. 어떤 욕망의 배치가 삶을 확장하고, 어떤 배치가 삶을 위축시키는가. 요점은 모든 욕망이 좋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요점은 욕망이 결코 그저 우리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집으로 가져갈 다른 질문
들뢰즈와 가타리가 무의식을 읽었던 방식으로, 당신 자신의 갈망을 한번 읽어본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고백실이 아니라 작업장으로서 그것을 읽어본다는 것. 오늘 밤 당신을 찾아오는 어떤 욕망에 대해, 이것이 어떤 어린 시절의 상처를 반복하고 있는가가 아니라, 이것은 어떤 흐름들을 짝짓고 있으며, 그 짝짓기로 누가 이익을 보는가라고 물어본다는 것.
이 책은 어떤 강령도 내놓지 않습니다. 그 거절 자체가 하나의 가르침입니다. 해방이란, 거짓 욕망 아래 묻혀 있던 참된 욕망을 발굴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원함이 어디에서 어떻게 배선되었는지를 끈질기게 알아채는 일, 그리고 하루의 이 작은 모퉁이에서 그 배선을 다르게 깔아보려는 고집스러운 시도입니다. 공장은 어느 쪽이든 돌아갑니다. 다만 우리가 그곳의 노동자로 자신을 알아보느냐, 아니면 그곳의 가구로 자신을 두느냐 — 질문은 거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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