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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불교와 실존주의적 앙가주망 — 틱낫한과 장폴 사르트르

앙가주망 불교와 실존주의적 참여는 틱낫한과 장 폴 사르트르가 자각을 실천으로 전환하는 지점에서 만납니다.
참여불교와 실존주의적 앙가주망 — 틱낫한과 장폴 사르트르

참여불교와 실존주의적 앙가주망 — 틱낫한과 장폴 사르트르

우리는 너무 쉽게 착각합니다. 세상의 비극을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미 도덕적인 편에 서 있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고통을 인지하는 것과 그 고통에 응답하는 것 사이에는 깊은 틈이 있습니다. 바로 그 틈에서 불의는 연명합니다. 참여불교와 실존주의적 앙가주망이 지금도 날카로운 이유는, 둘 다 이 안락한 거리를 먼저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사르트르에게 자유는 변명이 아니라 짐이었습니다

장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는 인간이 미리 정해진 본질을 갖고 태어나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 선택으로 자신을 만들어가는 존재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철학은 늘 불편합니다. 우리는 제도 뒤에, 직업 뒤에, 시대 분위기 뒤에 숨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침묵조차 하나의 선택이며, 유보 역시 현실의 편을 드는 방식입니다. 행동하지 않는 자유는 무죄가 아니라 방관의 기술이 됩니다.

우리는 자유로울 수밖에 없도록 선고받았습니다.
— 장폴 사르트르

 

틱낫한에게 수행은 세상 밖이 아니라 세상 안이었습니다

틱낫한(Thích Nhất Hạnh, 1926–2022)은 전혀 다른 언어로 같은 벽을 두드렸습니다. 전쟁과 피난, 공포가 삶의 일상을 찢고 있는데도 명상만으로 자기 구원을 완성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에게 참여불교는 불교에 어떤 정치적 장식을 덧붙인 말이 아니었습니다. 고통받는 이웃을 외면하는 마음챙김은 진정한 알아차림이 아니라 세련된 후퇴라는 선언이었습니다.

여기서 사르트르와 틱낫한은 갈라지면서도 만납니다. 사르트르가 자유와 책임에서 출발했다면, 틱낫한은 연기와 상호의존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결론은 비슷합니다. 세상과 단절된 내면은 쉽게 자기위안이 되고, 분노만 앞선 실천은 곧 다른 폭력을 닮아갑니다. 한쪽은 중립의 허구를 폭로하고, 다른 한쪽은 성찰 없는 행동의 위험을 경고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분노도 힐링도 아닌 연결된 책임입니다

지금의 플랫폼 사회는 우리를 두 방향으로 유혹합니다. 하나는 분노를 공연처럼 소비하게 만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마음의 평온을 사적인 상품으로 격리하는 것입니다. 둘 다 세상을 바꾸지 못합니다. 참여불교와 앙가주망이 함께 가리키는 더 어려운 길은, 인식을 책임으로 바꾸고 책임을 타인을 해치지 않는 실천으로 번역하는 일입니다. 댓글 하나, 한 표, 한 번의 연대, 한 사람 곁에 머무는 시간이 그 출발일 수 있습니다.

명상 방석과 광장 사이에는 생각보다 넓은 공백이 있습니다. 지금 당신의 깨어 있음은 기분으로 끝나고 있습니까, 아니면 누군가의 삶 곁으로 건너가고 있습니까? 당신의 문장을 기다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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