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과 탈존이란 무엇인가
하나의 단어가 두 번 태어난 사연
철학사에서 하나의 개념이 같은 사상가의 손에서 이토록 극적으로 변모한 사례는 드뭅니다.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는 1927년 『존재와 시간』에서 ‘실존’(Existenz)이라는 말을 인간 존재의 고유한 존재 방식을 가리키는 전문 용어로 격상시켰습니다. 그로부터 20년 뒤인 1947년, 프랑스 철학자 장 보프레에게 보낸 「휴머니즘 서간」에서 그는 같은 단어를 쪼개어 ‘탈존’(Ek-sistenz)이라 다시 썼습니다. 하이픈 하나가 끼어든 것뿐인데, 그 사이에서 인간 존재의 무게중심이 완전히 이동합니다. 자기 자신을 향해 내던지는 존재에서, 존재의 열린 터 안으로 나아가 서 있는 존재로.
실존: 자기 존재가 문제인 존재
『존재와 시간』에서 실존(Existenz)은 오직 현존재(Dasein)—하이데거가 인간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한 용어—에게만 해당하는 존재 방식입니다. 돌멩이는 실존하지 않습니다. 그저 거기 놓여 있을 뿐입니다. 망치도 실존하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쓰임을 기다리며 ‘손안에 있을’ 뿐입니다. 오직 현존재만이 실존하는데, 그것은 현존재만이 자기 자신의 존재를 하나의 물음으로, 하나의 과제로, 끝내 완결되지 않는 무엇으로 관계하기 때문입니다.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면, 현존재는 “그것의 존재에 있어서 그 존재 자체가 문제가 되는” 유일한 존재자입니다.
이 개념의 핵심은 가능성에 있습니다. 실존은 고정된 속성의 목록이 아니라 언제나 자기 앞에 펼쳐진 가능성을 향해 내던져져 있는 운동입니다. 목수는 망치를 쥐고 있다는 사실로 정의되지 않고, 그가 내딛는 작업의 지평으로 정의됩니다. 교사는 이력서에 적힌 경력이 아니라 가르침이 열어주는 가능성 속에서 자신이 됩니다. 현존재의 존재는 매 순간 미결 상태에 놓여 있으며, 바로 그 미결 상태가 실존의 본질입니다.
따라서 『존재와 시간』의 실존은 염려(Sorge), 죽음을 향한 존재, 양심의 부름과 같은 현존재 분석론의 핵심 구조들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실존한다는 것은 자기 가능성을 붙잡거나 외면하는 드라마의 한가운데 서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하이픈이 바꾸어 놓은 것
1947년 「휴머니즘 서간」이 쓰일 무렵,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유명한 선언으로 파리 실존주의의 기치를 올린 상태였습니다. 하이데거는 격렬하게 거리를 두었습니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가 여전히 본질(essentia)과 현존(existentia)이라는 형이상학적 대립 구도 안에서 작동하고 있으며, 자신이 허물고자 했던 바로 그 틀을 강화하고 있다고 진단한 것입니다.
그 거리를 표기법으로 만든 것이 Ek-sistenz—탈존입니다. 접두사 ‘ek-’는 그리스어로 ‘밖으로’를 뜻합니다. 탈존한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밖으로 나아가 서 있음’입니다. 다만, 어디를 향해 나아가느냐가 결정적으로 달라집니다. 초기의 실존이 현존재의 자기 기투—자신의 가능성을 향해 스스로를 내던지는 운동—에 방점을 찍었다면, 탈존은 무게중심을 현존재로부터 존재(Sein) 그 자체로 옮깁니다. 인간은 더 이상 의미의 기원이 아닙니다. 인간은 자신보다 먼저 도래한 진리의 열림 ‘안에’ 서 있는 존재입니다.
하이데거 자신의 문장으로 확인해 봅니다.
존재의 밝힘 안에 서 있음, 이것을 나는 인간의 탈존이라 부른다. 이러한 존재 방식은 오직 인간에게만 고유하다.
— 하이데거, 「휴머니즘 서간」(1947)
‘밝힘’(Lichtung)—존재자가 있는 그대로 자신을 드러내는 환한 빈터—은 현존재가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현존재가 그 안에 거주하는 것이며, 현존재가 무엇을 기획하기도 전에 이미 현존재를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체가 아니라 심화
하이데거가 실존을 폐기하고 탈존으로 교체했다고 말하면 지나친 단순화가 됩니다. 탈존은 실존을 흡수하되 그 방향을 전환합니다. 인간 존재가 사물의 단순한 현전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존재와 시간』의 통찰—인간은 본질적으로 열려 있고 미완결이라는 구조적 발견—은 후기에도 고스란히 보존됩니다. 변하는 것은 그 열림의 원천입니다. 『존재와 시간』에서 현존재의 열림은 현존재 자신의 기투적 이해에서 발원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후기 사유에서 열림은 존재가 인간에게 내리는 일종의 선사—혹은 짐—입니다. 하이데거는 초기 정식화가 여전히 자신이 해체하려던 근대적 주체 중심 사유에 묶여 있었다고 회고합니다.
이 전환은 윤리적 색채도 바꾸어 놓습니다. 실존이 죽음 앞에서 본래적 가능성을 움켜쥐는 결단의 자세를 요청했다면, 탈존은 전혀 다른 자세를 초대합니다. 파수꾼, 목자, 밝힘의 터를 지키면서 존재자를 미리 짜맞춘 범주 안에 밀어넣지 않는 자. 하이데거는 이를 “존재의 목자”(Hirt des Seins)라 불렀습니다. 주권적 주체성이라는 근대의 환상을 의도적으로 수축시키는 표현입니다.
개념이 발을 딛는 자리
이것은 순전히 학술적인 구분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수면 주기와 생산성 지표를 추적하며, 자기 자신을 하나의 프로젝트처럼 경영하는 오늘날의 개인을 떠올려 보십시오. 이 인물은 실존 개념의 열화된 판본을 체현하고 있습니다. 자기 기투가 자기를 초과하는 어떤 것과의 만남으로부터 절단된 채로, ‘최고의 나’를 향한 최적화만이 남은 상태입니다. 역설적이게도, 그 끊임없는 자기 기획이 하이데거가 인간 존재의 핵심으로 지목한 바로 그 열림을 봉쇄합니다.
탈존은 묻습니다. 만약 우리가 자기 존재를 최적화의 원료로 취급하는 것을 멈추고, 스스로를 기획하기 이전에 이미 우리를 부르고 있는 열림 안에 거주하는 법을 배운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와 기업형 자기계발 문화 깊숙이 박혀 있는 전제—의미란 제조하는 것이지 수신하는 것이 아니라는 믿음—에 탈존은 정면으로 맞섭니다. 모든 것을 도구화하는 기술 문명 안에서, 인간의 가장 깊은 소명이 수용성이라는 하이데거의 주장은 여전히 날카로운 도발로 남아 있습니다.
해소되지 않은 그림자
이 개념들을 둘러싼 정직한 설명이라면 그것이 드리우는 그림자를 외면할 수 없습니다. 하이데거는 1933년부터 1934년까지 프라이부르크대학 총장으로서 나치즘에 적극 가담했고, 1945년까지 나치당원으로 남아 있었으며, 이제 충분히 문서화된 반유대주의의 소유자이기도 했습니다. ‘본래적 실존’과 ‘결단성’의 수사가 그의 정치적 상상력 안에서 어떻게 기능했는지는 불편하지만 반드시 제기되어야 할 물음입니다.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1995)와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를 비롯한 비판자들은, 타자의 얼굴이 아닌 존재에 중심을 둔 철학이 과연 충분한 윤리적 자원을 확보할 수 있는지 집요하게 추궁했습니다. 실존에서 탈존으로의 이행—결단하는 개인에서 존재의 목자로의 전환—은 초기 저작에 드리운 결단주의적 색채로부터 벗어나려는 하이데거 자신의 시도로 읽힐 수도 있습니다. 그 시도가 성공했는지 여부는 지금도 치열하게 논쟁 중입니다.
함께 알아두면 좋은 개념들
현존재(Dasein)는 존재를 이해하는 한에서의 인간을 가리킵니다. 존재(Sein)가 스스로를 드러내는 ‘거기’(Da)가 바로 인간이라는 뜻을 품고 있습니다. 밝힘(Lichtung)은 존재자가 나타날 수 있는 열린 공간, 탈존이 향해 나아가 서는 바로 그 터입니다. 피투성(Geworfenheit)은 현존재가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상황 속에 이미 내던져져 있다는 사실을 포착하며, 실존과 탈존 모두가 전제하는 조건입니다. 그리고 하이데거 사유의 유명한 전회(Kehre)—『존재와 시간』의 현존재 중심 분석에서 후기의 존재 중심 사색으로의 이행—가 바로 실존이 탈존으로 변모하는 운동이 일어난 자리입니다.
실존과 탈존 사이의 거리는 연도나 페이지 수로 측정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자기 의미의 주인이라는 확신을 내려놓을 수 있는가, 우리의 기획과 불안과 결단보다 더 큰 무엇에 속해 있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진정한 불확실성 속에서 물을 수 있는가—그 물음의 깊이로만 측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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