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생각한다, 나는 반항한다, 나는 애도한다 — 데카르트, 알베르 카뮈, 데리다와 주체의 세 동사
우리는 오랫동안 사유하는 인간이 가장 고상한 인간이라고 배워왔습니다.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의 코기토는 그 믿음의 정점이었습니다. 의심 끝에도 남는 것은 생각하는 나, 곧 스스로를 증명하는 주체라는 선언 말입니다. 그러나 그 문장은 너무 오래 홀로 서 있었습니다. 생각은 우리를 깨어 있게 만들지만, 무엇을 거부해야 하는지, 누구의 상실 앞에서 멈춰 서야 하는지까지는 끝내 말해주지 못합니다.
사유 다음에 온 것은 반항이었습니다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960)는 전쟁과 전체주의를 통과한 뒤, 존재를 고독한 확신으로만 붙들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인간은 혼자 생각함으로써만 자신이 되는 것이 아니라, 굴욕 앞에서 선을 긋는 순간 비로소 서로의 존재를 발견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반항한다 — 고로 우리는 존재한다.
— 알베르 카뮈, 『반항하는 인간』(1951)
이 짧은 문장에서 근대의 ‘나’는 정치적 ‘우리’로 바뀝니다. 반항은 단순한 분노가 아닙니다. 여기까지는 안 된다고 말하는 인간의 경계선이며, 그 선을 긋는 순간 타인과 공유되는 존엄의 감각이 태어납니다. 사유가 주체를 세웠다면, 반항은 그 주체를 광장으로 끌어냅니다.
그다음에야 애도의 진실이 드러납니다
하지만 반항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는 인간이 먼저 완성된 자아로 존재하다가 나중에 상실을 겪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타인에게 열려 있으며, 어떤 죽음과 부재는 우리의 내부 구조 자체를 바꾸어 놓습니다. 애도는 약한 감정이 아니라, 내가 결코 완결된 개인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폭로하는 사건입니다.
바로 여기서 철학은 사회 비평이 됩니다. 어떤 죽음은 오래 기억되고, 어떤 죽음은 통계표 안으로 침잠합니다. 어떤 상실은 공적 언어를 얻고, 어떤 상실은 곧장 잊히는 배경음이 됩니다. 애도의 배분은 곧 인간성의 배분입니다. 무감각은 개인의 성격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을 서열화해온 사회의 습관일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셋 중 하나가 아니라 셋 모두입니다
데카르트는 조작과 혼란에 맞서는 힘을, 카뮈는 굴종을 거부하는 힘을, 데리다는 잔혹해지지 않기 위한 감수성을 남겼습니다. 사유만 있는 주체는 차갑고, 반항만 있는 주체는 쉽게 소진되며, 애도만 있는 주체는 침잠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삶이 자꾸 우리를 빠르고 효율적이며 무감각한 존재로 길들이려 할수록, 이 세 동사는 함께 붙들려야 합니다.
지금 당신의 삶을 지배하는 동사는 무엇입니까. 생각함입니까, 거부함입니까, 애도함입니까. 그리고 나머지 두 동사가 빠진 자리에서, 당신 안의 무엇이 조용히 메말라가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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