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란드와 아이슬란드: 이름 속에 숨겨진 천년의 거짓말
서기 982년, 살인죄로 추방당한 한 남자가 섬의 해안에 섰습니다. 그의 눈앞에는 빙하와 바람에 깎인 바위, 남쪽 피오르 가장자리에 간신히 매달린 한 줄기 풀밭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국토의 80퍼센트가 두께 3킬로미터에 달하는 얼음으로 뒤덮인 땅이었습니다. 그는 이 얼어붙은 영토에 자신이 떠올릴 수 있는 가장 매혹적인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린란드"—녹색의 땅.
그로부터 약 백 년 전, 또 다른 바이킹 항해자는 정반대의 일을 했습니다. 흐라프나-플로키 빌게르다르손(Hrafna-Flóki Vilgerðarson, 9세기 활동)은 화산 열기로 데워지고 자작나무 숲이 지표의 40퍼센트 가까이를 덮은 섬에 도착했습니다. 풍요로운 여름을 보냈지만 건초 비축을 게을리한 탓에 겨울이 닥치자 가축이 굶어 죽었고, 항해 중에는 딸을 잃었습니다. 절망 속에서 산 정상에 오른 그는 먼 피오르를 가득 메운 유빙을 내려다보며 이 땅에 단 한 마디를 선고했습니다. "아이슬란드"—얼음의 땅.
하나는 의도적 광고였고, 다른 하나는 원한이었습니다. 둘 다 거짓이었고, 둘 다 천 년을 버텼습니다.
살인자의 부동산 캠페인
13세기에 편찬된 <에이리크 사가 라우다>는 명명의 동기를 감추지 않습니다. 붉은 수염의 에이리크(Erik the Red, c. 950–1003)는 "땅에 좋은 이름이 붙으면 사람들이 더욱 가고 싶어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사가는 전합니다. 역사가의 추론이 아니라 사가 자체의 설명입니다.
맥락이 중요합니다. 에이리크의 아버지 토르발드 아스발드손은 노르웨이에서 살인으로 추방되어 아이슬란드에 정착했습니다. 에이리크 역시 아이슬란드에서 이웃과의 분쟁 끝에 여러 사람을 죽이고 토르스네스 의회에서 3년간의 추방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갈 곳이 서쪽밖에 남지 않은 이 남자가 발견한 것은 총면적 216만 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섬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압도적 면적의 대부분은 대륙 규모의 빙상 아래 묻혀 있었습니다. 오직 남서쪽 피오르 연안에서만 중세 온난기의 온기가 풀을 틔워놓고 있었을 뿐입니다.
3년의 유배를 마치고 아이슬란드로 돌아온 에이리크는 자신이 본 것을 묘사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믿기를 바라는 것을 팔았습니다. 985년, 25척의 배에 약 500명의 정착민이 올라탔습니다. 대서양을 건너 살아남은 것은 14척뿐이었습니다. 도착한 이들은 동부 정착지와 서부 정착지를 세웠고, 이 바이킹 사회는 거의 500년간 지속되다 수수께끼처럼 사라졌습니다.
원한이 빚어낸 차가운 세례명
아이슬란드의 명명은 전혀 다른 감정의 산물입니다. 12세기의 <란드나우마보크>(정착의 서)에 따르면, 플로키는 868년경 가족과 가축, 그리고 길잡이 까마귀 세 마리를 싣고 노르웨이를 출발했습니다. 서부 피오르의 바트나스피외르뒤르에 겨울 야영지를 차렸지만, 넉넉했던 여름에 방심한 대가는 혹독했습니다. 가축은 굶어 죽었고, 항해 중 딸을 잃은 슬픔은 가시지 않았습니다.
그 상태로 산꼭대기에 올라선 플로키의 눈에 들어온 것은 이사피외르뒤르를 가득 메운 유빙이었습니다. 그는 이 섬 전체를 "이슬란드"—얼음의 땅이라 불렀습니다. 같은 배를 타고 온 동료 토롤프는 "이 땅의 풀잎마다 버터가 묻어 있다"며 정반대의 증언을 했습니다. 토롤프는 "버터 토롤프"라는 조롱 섞인 별명을 얻었지만, 역사는 플로키의 쓰디쓴 판결을 채택했습니다. 오늘날 아이슬란드가 지열 에너지로 건물의 약 90퍼센트를 난방하고, 재생에너지로 전력의 거의 100퍼센트를 생산하는 나라라는 사실은 그 이름 어디에도 반영되어 있지 않습니다.
에이리크가 유인하기 위해 거짓을 말한 곳에서, 플로키는 밀어내기 위해 편향된 진실을 말했습니다. 두 이름 모두 동일한 현실—북대서양의 복잡하고 모호한 지리—을 왜곡했습니다. 그것도 단 하나의 형용사로.
이름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는 일
이 역설은 너무 많이 반복되어 단순한 호기심거리가 될 위험이 있습니다. 술자리 퀴즈 한 문제, SNS에 떠도는 밈 하나. 그러나 그린란드-아이슬란드의 반전은 오락 이상의 것을 품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드러내는 것은 바이킹 시대를 훨씬 넘어서 작동하는 하나의 메커니즘이기 때문입니다.
장소에 이름을 붙이는 행위는 그 장소와의 모든 미래의 만남을 사전에 규정합니다. 에이리크는 빙상을 바꿀 수 없었으므로 단어를 바꿨습니다. 그리고 수 세기 동안 대부분의 유럽인이 그 영토에 관해 가진 유일한 정보는 바로 그 이름이었습니다. 이름이 영토보다 먼저 사람들의 머릿속에 도착했습니다. 그것은 묘사가 아니라 구성이었습니다.
이 패턴은 권력이 자신의 영유권을 정당화해야 하는 곳이면 어디서나 반복됩니다. 스페인 정복자들은 한 지역을 "라 플로리다"—꽃의 땅이라 불러 왕실의 추가 투자를 유도했습니다. 식민 관료들은 아프리카의 강과 산에 유럽 군주의 이름을 덮어씌워, 수 세기에 걸친 생태 지식과 영적 의미를 담은 토착 지명을 지웠습니다. 모든 경우에 이름은 명명하는 자를 위해 복무했지, 명명되는 대상을 위하지 않았습니다.
플로키의 행위 역시 결과적으로 무게가 가볍지 않았습니다. 지열의 온기가 서린 섬을 "얼음의 땅"이라 낙인찍음으로써, 그는 의도치 않게 이후의 정착 물결을 억제하는 방파제를 세웠을 수 있습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정황적 근거에 불과하지만—후대 아이슬란드인들이 이 위협적 이름을 은근히 반겼을 가능성을 제기합니다.
우리가 여전히 거주하는 이름들
질문은 왜 이 두 이름이 역설적인가가 아닙니다. 부정확하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면서도 천 년째 그 이름을 사용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지속성이 일상의 기본값으로 자리 잡은 언어의 접착력에 관해 무엇을 드러내는지가 진짜 질문입니다.
오늘날 그린란드에는 약 56,000명이 살고 있으며 대다수는 이누이트입니다. 이누이트어로 이 섬의 이름은 "칼라알릿 누나아트"—칼라알릿 사람들의 땅입니다. 지형의 색깔이 아니라 사람을 가리키는 이름입니다. 그런데도 국제 지도와 항공 노선, 외교 문서에는 여전히 "그린란드"가 적혀 있습니다. 11세기에 살인 전과자가 만들어낸 바이킹 시대의 홍보 문구가, 그것을 만들어낸 문명보다 오래 살아남은 것입니다.
아이슬란드는 자국의 오명을 특유의 자조적 자부심으로 포용해왔습니다. 관광 캠페인은 때로 이름과 현실의 모순 자체를 활용합니다. 차가움을 약속하는 이름 뒤에서 따뜻함을 발견하라는 초대. 한때 저주였던 이름이 거친 진정성의 브랜드로 탈바꿈한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이름을 물려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름을 지은 사람들의 이해관계, 두려움, 사각지대까지 함께 물려받습니다. 모든 지도는 오래전 잊힌 의도들이 겹겹이 쌓인 양피지이며, 우리는 그 위에서 매일 길을 찾고 있습니다.
무법자에게는 정착민이 필요했으므로 얼음을 목초지라 불렀고, 상심한 뱃사람에게는 탓할 대상이 필요했으므로 목초지를 얼음이라 불렀습니다. 땅 자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땅은 한 번도 스스로 말한 적이 없습니다. 먼저 입을 연 자가 나머지 모두의 주소를 결정하는 것, 그것이 이름의 정치학입니다.
다음에 지도를 펼칠 때—어떤 지도든—당신을 맞이하는 이름 뒤에 무엇이 숨어 있는지 한 번쯤 의심해보시기를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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