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의 죽음이 애도받는가: 버틀러의 렌즈로 본 가자의 지워진 생명들
숫자에 이름이 없을 때, 죽음은 아직 죽음이 아닙니다
당신은 그 숫자를 보셨을 것입니다. 화면 하단을 흐르는 자막처럼—75,000, 그리고 더. 2026년 2월 의학저널 «란셋 글로벌 헬스»에 발표된 동료심사 연구는 가자 전쟁 첫 16개월간 폭력으로 사망한 팔레스타인인이 75,000명을 넘는다고 추산했습니다. 당시 공식 집계보다 약 3분의 1이 더 많은 수치였습니다. 그런데 이 숫자는 기묘한 역할을 수행합니다. 규모는 기록하되 개별성은 지워버리는 것입니다. 총량 속에 흡수된 각각의 숫자는 이름을 갖지 못하고, 사진을 남기지 못하고, 저녁 뉴스에서 잔잔한 피아노 선율과 함께 추모되지 못합니다.
이제 2023년 10월 7일을 떠올려 보십시오. 수 시간 안에 이스라엘 희생자들의 이름과 얼굴이 서방의 모든 뉴스룸을 순환했습니다. 증언이 쏟아졌고, 세계 주요 도시에서 촛불이 켜졌습니다. 애도는 즉각적이었고, 집단적이었으며, 전 지구적으로 승인되었습니다. 이 생명들이 추모받을 자격이 있느냐고 묻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그래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그 뒤에 이어진 비대칭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구조적인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 구조를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 1956– )라는 철학자가 수십 년에 걸쳐 해부해 왔습니다.
애도 가능성의 건축술
버틀러는 «불확실한 삶»(2004)과 «전쟁의 프레임: 어떤 생명이 애도받을 수 있는가»(2009)에서 속임수처럼 단순한 명제를 제출합니다. 하나의 생명이 애도되려면, 먼저 그것이 생명‘으로서’ 인지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애도 가능성은 죽음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생명 그 자체를 인식하기 위한 전제 조건입니다. 살아 있는 것으로 한 번도 틀 지어지지 않은 생명은, 파괴되어도 상실로 등록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지배적인 인식론적·정동적 프레임이 처음부터 그것에 존재의 지위를 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라지는 것입니다.
버틀러의 논증은 두 개의 층위에서 맞물립니다. 첫 번째는 존재론적 층위입니다. 모든 인간의 생명은 본질적으로 불안정하며, 돌봄의 네트워크와 사회기반시설, 정치적 승인에 의존하여 유지됩니다. 살아남은 신생아는 오직 “사회적 손들의 그물망”이 그를 받쳐주었기에 살아남은 것입니다. 두 번째는 정치적 층위입니다. 이 공유된 불안정성에도 불구하고, 애도 가능성의 분배는 철저히 불평등합니다. 어떤 생명의 상실은 공적 추모와 정책 전환과 군사적 동원을 촉발하는 반면, 다른 생명의 상실은 기껏해야 스쳐 지나가는 통계적 표기로 처리됩니다.
버틀러는 이렇게 씁니다. “애도될 수 없는 생명이란, 한 번도 살았던 적이 없는 생명—즉 애초에 생명으로 간주된 적이 없는 생명이기에 애도할 수 없는 것이다.”
무기로서의 프레임: 가자라는 렌즈
버틀러의 프레임 이론이 순전히 이론적 작업이었다면, 세미나실 안에 머물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은 그 분석의 모든 차원을 참혹한 정밀도로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프레이밍의 물질적 장치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스라엘이 가자의 통신 인프라를 거의 전면적으로 통제한다는 사실, 언론인들에 대한 반복적 공격—국제언론인보호위원회(CPJ)에 따르면 가자 전쟁은 현대사에서 기자들에게 가장 치명적인 분쟁입니다—그리고 국제 언론의 접근에 대한 가혹한 제한. 이것들은 전쟁의 부수적 속성이 아닙니다. 특정한 생명들이 죽기 전에 이미 보이지 않게 되는 조건 그 자체입니다.
그 결과는 군사적인 동시에 인식론적입니다. 알자지라가 2026년 초 이스라엘이 2025년 10월 휴전 합의를 2,000회 이상 위반했다고 보도했을 때—명목상의 정전 하에서도 공습과 포격과 총격이 계속되어 수백 명의 팔레스타인인이 사망했을 때—이 소식은 서방 주요 매체의 뉴스 사이클을 뚫고 들어가기 어려웠습니다. 한편 2026년 4월, 이스라엘이 점령지 서안지구에 국제법 위반인 34개의 신규 정착촌을 승인했다는 소식은, 공모에 가까울 정도로 신중한 외교적 언어로 처리되었습니다. 프레임은 현실을 반영하지 않습니다. 어떤 현실이 등장하도록 허용될 것인가를 능동적으로 구성합니다.
선택적 애도라는 위험한 안락
이 구조를 인식한다고 해서 어떤 희생자에게 마땅히 바쳐야 할 애도가 줄어드는 것은 아닙니다. 10월 7일에 빼앗긴 모든 생명은 온전한 추모를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버틀러 역시 하마스의 공격을 무조건적으로 규탄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모든 편의 당파적 안락을 불편하게 만드는 엄밀함으로 주장합니다. 애도의 선택적 분배 그 자체가 하나의 폭력이라고. 75,000명의 죽음이 축적되면서도 프레임의 반대편에서 발생하는 훨씬 적은 수의 희생과 동일한 밀도의 공적 애도를 촉발하지 못할 때, 작동하고 있는 것은 편향 이상의 무엇입니다. 정치적 존재론이 가동되고 있는 것입니다—인류를 보호받아야 할 불안정성의 담지자와, 그 보호의 비용으로 처리되는 불안정성의 담지자로 분류하는 존재론 말입니다.
2026년 2월의 «란셋» 연구는 이 삭제의 또 다른 차원을 부각시켰습니다. 연구진은 실제 사망자 수가 공식 집계를 약 3분의 1 초과한다는 사실을 밝혔는데, 이는 부분적으로 가자의 보건 인프라 붕괴로 인해 사망을 발생 즉시 등록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애도될 수 없는 자들은 세어질 수도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두 번 사라집니다. 처음에는 산 자의 범주에서, 다음에는 죽은 자의 범주에서.
불안정성을 공유재로 되찾을 때
버틀러의 작업은 진단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의 철학의 심장부에는 공유된 불안정성이야말로 윤리적 의무의 토대라는 주장이 놓여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본질적으로 취약하다면—사회적 네트워크와 정치적 구조와 타인의 연약한 자비에 의존하여 생존한다면—어떤 생명의 파괴도 모든 생명이 유지되는 조건을 훼손하는 것입니다. 버틀러 자신이 인정하듯 이것은 헤겔적 통찰입니다. 내가 존재하는 주체는 내가 아닌 주체에 묶여 있으며, 파괴할 수 있는 힘은 파괴당할 수 있는 조건과 분리될 수 없다는 것.
이 통찰에 따라 행동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최소한 선택적 애도의 안락함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75,000이라는 숫자가 통계가 아니라 재앙이라고, 각각의 숫자가 누군가 사랑했던 이름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국적의 친밀함이나 종교적 유사성을 슬픔의 전제 조건으로 요구하지 않는 시민적 연대를 구축하는 것입니다. 일상의 작은 실천에서, 이것은 주의력으로 시작됩니다. 헤드라인 너머를 읽고, 프레임이 배제한 이름을 찾아내고, 타인의 고통이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한 안정된 감각을 교란하도록 허용하는 것입니다.
버틀러는 열린 애도가 분노와 결합되어 있으며, 불의 앞에서의 분노는 거대한 정치적 잠재력을 품고 있다고 말합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허락된 가장 급진적인 행위는, 외면하지 않는 것일지 모릅니다—숫자로부터도, 이름으로부터도, 프레임이 결코 제대로 된 생명이 아니었다고 우리에게 믿게 하려 했던 바로 그 생명으로부터도. 문제는 낯선 이를 애도할 권리가 당신에게 있느냐가 아닙니다. 문제는 애도하지 않기로 선택할 때 당신이 어떤 세계를 짓고 있느냐입니다.
당신은 누구의 슬픔을 느끼도록 교육받으셨습니까. 그리고 누구의 슬픔을 잊도록 훈련받으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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