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완전히 망했네요”: 조앤 윌리엄스가 해부한 초저출생의 구조적 진실
머리를 감싸 쥔 석학, 그리고 하나의 숫자
세계적인 노동·젠더 전문가가 단 하나의 숫자를 듣고 머리를 감싸 쥐는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2023년, UC 로스쿨 샌프란시스코의 석좌교수 조앤 윌리엄스(Joan Chalmers Williams, 1952– )가 한국의 합계출산율 0.78이라는 숫자를 전해 듣자 내뱉은 말이 있습니다. “Korea is so screwed. Wow!”—“대한민국 완전히 망했네요. 와!” 이 짧은 탄성은 밈이 되었고, 대한민국 전체가 쓴웃음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그 탄성 아래에는 어떤 인구 통계보다 더 파괴적인 질문이 숨어 있습니다. 일하면서 동시에 아이를 키우는 것이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사회란 대체 어떤 사회입니까? 윌리엄스는 숫자에 놀란 것이 아닙니다. 그는 문명 수준의 모순을 진단한 것입니다.
불가능의 건축학
윌리엄스의 분석은 어떤 정부 보조금으로도 달래지 못한 급소를 정확히 찌릅니다. 2006년 이래 대한민국 정부가 저출생 대책에 쏟아부은 예산은 360조 원을 넘어섰습니다. 그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합계출산율은 2015년 1.24에서 2023년 0.72까지 곤두박질쳤고, 2024년 0.75, 2025년 0.80으로 소폭 반등했을 뿐입니다. 15년 만에 가장 큰 폭의 출생 증가라지만, 전문가들은 정책의 성과가 아니라 에코 세대—일시적으로 가임 연령에 진입한 대규모 코호트—의 효과라고 분석합니다.
윌리엄스가 지목한 원인은 외과의의 메스처럼 정확합니다. 바로 ‘이상적 노동자 규범’(ideal worker norm)입니다. 장시간 근무, 퇴근 후 회식, 주말 출근을 직업적 헌신의 증거로 요구하는 이 불문율은, 그의 저서 «Unbending Gender»(2000)가 밝혔듯이, 전업주부를 둔 남성 생계부양자를 전제로 설계된 것입니다. 맞벌이가 보편화된 세상에서 이 규범은 시대착오적 폭력으로 작동합니다.
기적이 제 자식을 집어삼킬 때
“한강의 기적을 만든 바로 그 노동 습관이 지금 한국 사회를 잠식하고 있습니다.” 2024년 EBS 다큐멘터리에서 윌리엄스가 던진 이 한마디는 그 단순함으로 인해 더욱 파괴적입니다. 삼성과 현대, 세계적 경제를 전쟁의 폐허 위에 세운 그 처절한 근면의 문화가, 지금은 부모가 되는 것을 경력상의 자살 행위로 만들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일상의 산술을 들여다보면 그 구조가 드러납니다. 한국 여성은 가사노동에서 남성의 여덟 배, 돌봄노동에서 여섯 배의 시간을 투입합니다. 이상적 노동자가 항시 대기 상태여야 하는 사회에서, 모성은 직업적 야망과 구조적으로 양립 불가능합니다. 여성들은 무관심으로 출산을 거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합리적인 시스템 안에서 합리적인 계산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윌리엄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야심 있는 노동자이면서 동시에 돌봄 책임을 진다는 것이 한국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인식됩니다.”
돈으로 정의를 대신할 수 없다
출산 장려금에 대한 윌리엄스의 진단은 단호합니다. “돈을 줘서 아이를 낳게 한다고요? 효과 없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의견이 아니라 구조적 진단입니다. 현금 지원은 증상—낮은 출생 숫자—을 치료하는 척하면서, 질병 자체—돌봄을 처벌하는 노동 시스템과 그 짐을 거의 전적으로 여성에게 떠넘기는 젠더 질서—는 손대지 않습니다.
철학자 아이리스 매리언 영(Iris Marion Young, 1949–2006)은 부정의가 반드시 개인의 잔혹한 행위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기회를 제약하는 구조적 과정에서 발생한다고 논증한 바 있습니다. 그 과정이 너무나 깊이 정상화되어 있기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한국의 인구 위기는 이 논증의 교과서적 사례입니다. 과로 문화는 억압으로 체감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야망, 근면, 국가적 자부심으로 경험됩니다. 그러나 그 귀결은 인간이 내릴 수 있는 가장 내밀한 결정—아이를 이 세상에 데려올 것인가—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다른 건축을 향하여
윌리엄스의 처방은 유토피아적 공상이 아니라 구체적인 구조적 요구입니다. 이상적 노동자 규범을 해체하라. 직업적 성공이 돌봄의 포기를 전제하지 않고, 돌봄이 직업적 정체성의 포기를 전제하지 않도록 노동 시스템을 재설계하라. 남성이 “아이를 돌보면서 느끼는 기쁨”을 영영 발견하지 못하는 사회는 여성만이 아니라 모든 구성원에게 빈곤한 사회라는 것을 인식하라.
2025년 합계출산율 0.80이라는 반등은 안도의 근거가 되지 못합니다. 1.0 미만의 출산율은 여전히 심각한 인구학적 고통의 신호입니다. 그러나 윌리엄스가 점화한 대화—개인적 인센티브가 아니라 구조적 변화에 관한 대화—가 마침내 힘을 얻고 있다는 징후는 분명합니다. 문제는 낡은 질서로부터 이익을 누려온 제도들이 스스로 해체되는 것을 허용할 것인가입니다.
일하는 사람이 곧 부모일 수 있다는 상상을 하지 못하는 사회는, 이미 자신의 미래를 집어삼키기 시작한 사회입니다. 윌리엄스의 탄성 섞인 진단은 파멸의 예언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다른 무언가를 건설하라는 초대—기적이 경제 성장에만 머무르지 않고, 온전한 인간적 삶의 가능성으로 확장되는 세계를 향한 초대였습니다.
어쩌면 진짜 질문은 왜 한국의 출산율이 이토록 낮은가가 아니라, 왜 우리는 사랑과 노동이 적이 되는 세상을 만들었는가일 것입니다. 당신의 삶에서, 당신의 일터에서, 당신의 사회에서—그 둘을 다시 동맹으로 만들려면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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