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디스 버틀러, 수행적 정체성: 젠더는 행위인가, 본질인가
당신이 의심하지 않았던 아침의 의식(儀式)
매일 아침, 우리는 거울 앞에 섭니다. 특정한 옷을 고르고, 자세를 가다듬고, 문밖으로 나서기 전에 목소리의 톤까지 조절합니다. 이 모든 행위가 너무도 자연스럽기에, 마치 자기 내면의 어떤 본질에서 우러나오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만약 그 ‘자연스러움’이라는 감각 자체가 환상이라면 어떨까요. 리허설이 너무 완벽하게 반복된 나머지, 배우 자신이 대본의 존재를 잊어버린 것이라면요.
바로 이 불편한 영토 위에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 1956– )가 서 있습니다. 그는 위로의 답을 건네는 대신, 정체성의 토대 자체를 균열시키는 질문을 들고 나타난 철학자입니다.
무대를 해체한 철학자
버틀러의 수행성(performativity) 개념이 왜 철학과 페미니즘, 사회과학 전반에 지진을 일으켰는지 이해하려면, 먼저 그가 부딪힌 벽의 정체를 파악해야 합니다. 수백 년간 서구 사상은 젠더를 생물학적 성별의 자연스러운 연장선으로 다루어 왔습니다.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 1908–1986)가 «제2의 성»(1949)에서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고 선언하며 표면에 균열을 냈지만, ‘만들어지기 이전에 이미 존재하는 주체’라는 전제만큼은 건드리지 못했습니다.
버틀러는 더 깊이 파고들었습니다. 1990년 출간된 «젠더 트러블»에서 그는 젠더가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수준을 넘어, 복사본 뒤에 원본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젠더를 수행하는 어떤 선재(先在)하는 자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수행 행위 그 자체가 자아를 구성한다는 것입니다.
젠더란 시간 속에서 위태롭게 구성되는 정체성이며, 양식화된 행위의 반복을 통해 외부의 공간 안에서 제도화된다.
— 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1990)
이 함의는 실로 충격적입니다. 젠더가 내면의 진실이 바깥으로 표현된 것이 아니라, 반복된 행위들이 내면의 진실이라는 환상을 생산하는 과정이라면, ‘자연적 정체성’이라는 범주 자체가 무너집니다. 아침마다 거울 앞에서 행하는 의식은 ‘나’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몸짓 하나하나를 통해 ‘나’를 제조하는 장치인 셈입니다.
보이지 않는 권력의 안무(按舞)
그러나 버틀러의 통찰은 순전한 지적 퍼즐이 아닙니다. 수행성 개념의 핵심에는 권력에 대한 진단이 놓여 있습니다. 젠더가 반복을 통해 구성된다면, 문제는 ‘누가 그 안무를 지시하는가’입니다. 우리가 수행하는 대본은 무한한 메뉴에서 자유로이 선택된 것이 아닙니다. 일탈을 처벌하고 순응을 보상하는 규범적 권력, 사회적 제재, 제도적 틀이 그 대본을 형성합니다. 특정한 ‘프로페셔널한 태도’를 강제하는 직장, 따돌림이라는 위협으로 남성성의 코드를 관철하는 학교 운동장, 우리를 젠더화된 소비자 프로필로 분류하는 알고리즘—이것들이 바로 우리가 자발성으로 착각하는 수행의 보이지 않는 연출자들입니다.
1993년 «의미를 체현하는 육체»에서 버틀러는, 젠더가 마음대로 바꿔 입을 수 있는 의상에 불과하다는 오해에 맞서 논의를 정교화했습니다. 수행성은 단발적인 연극 행위가 아닙니다. 개인을 선행하고 초과하는 규범의 강제적 반복이며, 그 과정이 너무 철저하기에 육체 자체가 자연 질서의 증거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 개념은 우리 시대의 모순을 해부하는 메스가 됩니다. 소셜 미디어 시대의 정체성이라는 역설을 떠올려 보십시오. 급진적 자기표현을 약속하는 플랫폼들이 동시에 자아의 경직된 틀을 강요합니다. 큐레이션된 프로필, 퍼스널 브랜드, 미학적 니치—각각이 진정한 자아의 발현처럼 제시되지만, 실상은 알고리즘의 승인에 맞춰 조율된 양식화된 반복입니다. 버틀러의 프레임은 이 디지털 의식(儀式)들이 오래된 규범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자유의 언어를 학습한 권력의 최신 안무임을 드러냅니다.
대본의 균열이 저항이 되는 곳
수행성이 감금을 묘사한다면, 동시에 자물쇠의 위치도 알려줍니다. 젠더가 안정성을 유지하기 위해 반복에 의존하는 한, 모든 반복은 그 안에 변주의 가능성을 품고 있습니다. 살짝 다르게 수행된 몸짓, 의도와 어긋나게 인용된 규범, 대본을 거부하는 몸—이것들은 정체성의 실패가 아니라, 정체성이 그토록 공들여 은폐하려 했던 우연성의 폭로입니다. 버틀러는 드래그에서, 패러디에서, 퀴어한 삶의 일상적 즉흥성에서 경박한 구경거리가 아니라 심원한 철학적 시위를 발견했습니다. 젠더가 패러디될 수 있다면, 애초에 원본이란 것은 없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버틀러의 사유는 학계의 담장을 넘어 우리 공동의 시민적 삶 속으로 들어옵니다. 우리의 몸을 지배하는 규범이 자연적이지도, 불가피하지도 않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은, 그 규범을 함께 다시 상상할 수 있는 권리를 되찾는 일입니다. 그것은 개인의 변덕을 위해 모든 구조를 폐기하라는 요구가 아닙니다—버틀러 자신도 그런 순진한 자발주의를 경계했습니다. 그것은 정체성의 대본이 시장에 의해서도, 감시 체계에 의해서도, 유전된 편견에 의해서도 아닌, 반복을 운명으로 착각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의 민주적 협상을 통해 쓰여지는 공동체를 건설하자는 초대입니다.
젠더를 ‘곤란하게 만든’ 이 철학자가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선사하는 것은 더 깊은 선물입니다. 영원한 것처럼 행세하면서 소수의 이익에 봉사하는 모든 범주를 곤란하게 만들 용기, 그것입니다.
매일 아침 당신은 거울 앞에 섭니다. 내일은 잠시 멈춰 보십시오—비친 모습을 거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모습이 수행하는 몸짓을 누가 썼는지 묻기 위해서. 그 멈춤이야말로 철학이 시작되는 자리입니다. 오늘 당신은 어떤 대본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리허설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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