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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도적 유물론이란 무엇인가

리비도적 유물론은 욕망을 사적 감정이 아니라 물질과 자본, 알고리즘 피드를 관통하는 비인격적 흐름으로 다루는 철학적 태도입니다. 그 계보와 한계를 함께 살펴봅니다.
리비도적 유물론 - 욕망과 물질을 가르는 칸막이가 무너지는 자리

리비도적 유물론이란 무엇인가

철학의 역사에는 정중한 손님이 아니라 침입자처럼 도착하는 개념들이 있습니다. 리비도적 유물론(libidinal materialism)은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개념은 물질과 욕망 사이, 차가운 물리적 메커니즘과 뜨거운 무의식의 격류 사이에 그어진 안락한 분할선을 거부합니다. 우리가 ‘현실’이라 부르는 것은 그 위에 욕망이 사후적으로 투사되는 무생물의 배열이 아니라, 물질 그 자체가 욕망하고 흐르고 끊어지고 타오르는 강도(intensity)의 장(場)이라는 주장이 그 핵심에 놓여 있습니다.

이 표현이 영미권 철학에 본격적으로 진입한 결정적 통로는 닉 랜드(Nick Land, 1962– )의 『절멸의 갈증: 조르주 바타유와 독성 허무주의』(The Thirst for Annihilation, 1992)였습니다. 그는 리비도적 유물론을 “무조건적이고 비목적론적인 욕망의 이론”이라 규정했습니다. 그러나 그 계보는 더 깊은 지층까지 내려갑니다.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Jean-François Lyotard, 1924–1998)의 『리비도 경제학』(1974), 그리고 그보다 앞선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와 펠릭스 가타리(Félix Guattari, 1930–1992)의 『안티 오이디푸스』(1972)가 이 개념을 길러낸 토양입니다. 리비도적 유물론을 이해한다는 것은 하나의 사유적 내기를 따라가는 일입니다. 가장 엄밀한 유물론은 욕망을 추방하는 유물론이 아니라, 욕망을 끝까지 인정하는 유물론이라는 내기 말입니다.

 

안식을 거부하는 정의

리비도적 유물론은 욕망(리비도)을 인간 주체의 사적 속성이 아니라, 물질 자체와 동연(同延)하는 비인격적이고 생산적인 힘으로 다루는 철학적 태도를 가리킵니다. 이 관점에 따르면, 무의미한 세계 위에 의미를 덧입히는 별도의 실체로서의 ‘정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에너지가 순환하고, 강도들이 차이를 만들며, 흐름이 결합하고 분리됩니다. 우리가 사유, 갈망, 정치라고 부르는 것은 이 단일한 리비도적 장에서 발생하는 국지적 난류(亂流)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기서 핵심적인 전회(轉回)는 욕망을 결핍으로 정의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고전 정신분석은 욕망을 “가지지 못한 것”을 통해 정의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리비도적 유물론은 20세기 프랑스 사상에 흐르는 스피노자적 조류를 길어 올리며 이 도식을 뒤집습니다. 욕망은 생산합니다. 그것은 채워지기를 갈구하는 빈 구멍이 아니라, 세계 안에 실제 효과를 만들어내는 양의 흐름입니다.

 

개념의 내적 골격

리비도적 유물론을 하나의 사유 도구로 소유하기 위해서는, 그 안에 깔린 세 가지 구조적 약속을 해체해 보아야 합니다.

첫째는 영성주의 없는 일원론입니다. 세계의 직물은 하나이며, 그 직물은 에너지적입니다. 정신은 외부에서 물질에 덧붙는 무엇이 아니라, 일정한 복잡성과 순환의 임계점에서 물질이 수행하는 작동 그 자체입니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무의식을 억압된 기표들의 극장이 아니라 공장으로 묘사할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입니다. 무의식은 어떤 주체가 도착해 자기 것이라 주장하기 훨씬 이전부터, 흐름을 빨아들이고 자르고 연결하는 “욕망 기계”들의 그물망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표상에 대한 강도의 우선성입니다. 리비도적 유물론자에게 표상은 언제나 파생적 현상입니다. 근원에 놓이는 것은 강도들의 차이 — 압력, 기울기, 온도, 전하입니다. 리오타르는 『리비도 경제학』에서 이 일차적 표면을 “거대한 덧없는 피부(la grande peau éphémère)”라 명명했습니다. 어떤 기호나 구조가 그 위에 안정되기 이전에, 강도들이 가로지르는 뫼비우스 띠와 같은 막입니다.

셋째는 정치경제와 리비도 경제의 분리에 대한 의심입니다. 리오타르의 도발 — 리비도 경제 없는 정치경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 은 욕망을 견고한 경제적 토대의 부드러운 이면쯤으로 다루는 표준적 마르크스주의의 제스처를 거부합니다. 자본은 단순한 생산양식이 아니라, 리비도적 흐름을 길어 올리고 포획하고 소진시키는 채널링의 양식입니다. 공장 바닥과 포르노그래피적 이미지, 증권거래소와 도파민 회로는 하나의 연속된 회로 안에 놓여 있습니다.

 

개념이 가시화되는 장면들

한 세대의 내면을 통째로 재배치한 알고리즘 피드를 떠올려 봅니다. 이를 중립적 “정보 기술”로 분석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현상을 놓칩니다. 피드는 리비도 경제적 장치입니다. 그것은 주의력을 인지적 자원으로서가 아니라, 충전된 욕망의 흐름으로서 채굴합니다. 신체가 계속 스크롤하도록 정밀하게 조율된 주파수에서 각성과 불안을 변조하는 것이지요. 여기서 문제 삼는 물질성은 비유가 아닙니다. 코르티솔, 도파민, 자본 흐름, 데이터센터의 서버 팜은 하나의 회로를 구성하며, ‘사용자’는 그 회로의 여러 노드 중 하나일 뿐, 결코 가장 주권적인 노드가 아닙니다.

오늘날의 노동 리듬을 떠올려도 마찬가지입니다. 번아웃, 미세한 붕괴, 자신의 착취에 열정을 느껴야 한다는 의무감. 리비도적 유물론은 이 풍경을 개인의 회복탄력성 결여로 번역하는 도덕화의 언어를 거부합니다. 대신 묻습니다. 어떤 종류의 리비도적 체제가, 자기를 소진시키는 바로 그 메커니즘에 주체가 자기 욕망을 투자하도록 요구하는가. 그 투자는 어떻게 선택된 것이 아니라 설계된 것인가.

자본을 발견하기 위하여 리비도적 띠를, 주름지고 접힌 강도들의 거대한 미궁의 리본을 떠날 필요는 없다.

— 리오타르, 『리비도 경제학』(1974)

 

비판과 내재적 한계

이 개념은 결코 무사 통과되지 않습니다. 가장 무거운 반론은, 긍정적 욕망과 파괴적 욕망 사이의 구분을 무너뜨림으로써 리비도적 유물론이 정치적 무관심으로 미끄러질 위험을 안고 있다는 것입니다. 리오타르 자신도 후기 작업에서 이 위험을 인정하고 『리비도 경제학』과 일정한 거리를 두었으며, 이 책을 자신의 “사악한 책(le mauvais livre)”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모든 흐름이 흐른다는 이유만으로 긍정되어야 한다면, 이 개념은 파시즘과 착취, 생태적 파괴 앞에서 비판의 칼날을 잃습니다.

두 번째 반론은 해체에 대한 낭만에 관한 것입니다. 닉 랜드의 후기 궤적, 즉 리비도적 유물론이 자본의 자기 초월에 대한 가속주의적 열광과 융합되어 간 과정은, 이 개념이 어떻게 자신이 진단하던 바로 그 힘을 찬양하는 쪽으로 미끄러질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분석이 비판적 도구로 남는지, 아니면 자기가 묘사하던 회로에 공모해 버리는지를 묻는 것은 정당한 일입니다.

세 번째, 보다 조용한 반론도 있습니다. 욕망을 비인격적 흐름으로 다루는 시선은, 특정한 신체들 — 여성, 노동자, 인종화된 주체 — 의 리비도적 삶이 빚어진 구체적 역사를 가릴 수 있습니다. ‘흐름과 강도’라는 어휘만으로는 호명되지 않는 고통의 결이 있다는 것입니다.

 

인접 개념과 대립 개념

리비도적 유물론은 몇몇 이웃한 개념들과 생산적 긴장 속에 놓입니다. 스피노자의 코나투스(conatus), 즉 모든 것이 자기 존재 안에서 지속하려 분투하는 힘과 겹쳐지지만, 그 위에서 일체의 목적론적 방향을 도려냄으로써 한층 급진화됩니다. 역사적 유물론과 대화하되, 경제적 토대에 우위를 부여하기를 거부합니다. 라캉주의 정신분석과는 분명하게 갈라집니다. 라캉이 욕망을 결핍과 상징계에 묶어 두는 데 반해, 리비도적 유물론은 생산적이고 전(前)상징적인 에너지론을 고집합니다. 정동 이론(affect theory)과는 일정 부분 지반을 공유하면서도, ‘실재가 무엇으로 빚어졌는가’라는 형이상학적 주장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리비도적 유물론을 벼린 렌즈로 지니고 다닌다는 것은, 안락한 칸막이를 거부한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정치적 신념과 에로스적 삶, 카페인 습관과 투자 포트폴리오가 자아의 분리된 영역들이 아니라 단일한 리비도적 기후 속의 국지적 날씨일지 모른다는 의심을 품는다는 뜻입니다. 그 칸막이가 무너진 자리에서 무엇을 하기로 선택하는가에 따라, 이 통찰은 해방이 되기도 하고 마비가 되기도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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