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 퍼블릭
Deconstruct & Rebuild Thought. Experience an intellectual META-leap that transcends your life through public intelligence.

당신의 취향은 정치적 선언이다: 자크 랑시에르와 감성의 분할

당신의 플레이리스트는 누구의 설계입니까. 자크 랑시에르의 감성의 분할은 취향이 곧 정치적 건축물임을 폭로합니다. 알고리즘 시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경계가 민주주의의 경계입니다.
자크 랑시에르 - 취향과 정치, 감성의 분할 | 철학 칼럼

당신의 취향은 정치적 선언이다: 자크 랑시에르와 감성의 분할

당신을 통치하는 재생목록

자정 무렵, 스트리밍 서비스의 추천 목록을 스크롤하는 순간을 떠올려 보십시오. 알고리즘은 이미 당신이 무엇을 즐길지 결정해 놓았습니다. 시청 이력, 인구통계학적 프로필, 그리고 당신과 통계적으로 닮은 사람들의 소비 패턴까지 반영한 결과물입니다. 당신이 이 선택지를 고른 것이 아닙니다. 꿈을 꾸는 언어를 스스로 선택하지 않듯이. 그런데도 ‘고르고 있다’는 감각은 절대적이고, 심지어 주권적이기까지 합니다. 바로 이 조용한 착각이야말로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 1940– )가 수십 년에 걸쳐 해체해 온 것의 핵심입니다. 취향이 개인적인 것이라는 확신—실은 그것이 건축적 구조물일 때.

랑시에르는 계급별 취향을 목록화하는 사회학자도 아니고, 예술 형식의 우열을 가리는 문화비평가도 아닙니다. 그보다 훨씬 불편한 존재입니다. 아름다움에 대해 발언할 자격이 있는 자와 일하라고 명령받은 자 사이의 경계가 곧 정치적 삶을 조직하는 경계라고 주장하는 철학자입니다.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 1930–2002)가 취향이 사회적 위계를 ‘반영’한다고 보여주었다면, 랑시에르는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취향은 권력이 현실 자체를 배분하는 매개체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세상을 보기도 전에 세상은 이미 잘려 있다

랑시에르 철학의 핵심에는 기만적일 만큼 단순한 프랑스어 이름이 하나 놓여 있습니다. le partage du sensible—감성의 분할. 2000년 같은 제목으로 출간된 이 저작에서 그는, 모든 사회 질서가 ‘무엇이 감각될 수 있는지, 누가 발언할 수 있는지, 누구의 목소리가 의미 있는 말로 등록되고 누구의 목소리가 그저 소음으로 처리되는지’에 관한 암묵적 합의 위에 서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비유가 아닙니다. 공유된 경험의 직물에 관한 존재론적 주장입니다. 시민이 권리를 요구하기 전에, 노동자가 임금에 항의하기 전에, 먼저 그 시민과 노동자가 정당한 참여자로 등장할 수 있는 지각의 장이 존재해야 합니다.

랑시에르는 이 건축물의 기원을 플라톤의 «국가»까지 추적합니다. 그곳에서 장인은 지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시간이 없어서’ 정치적 심의에서 배제됩니다. 구두장이는 작업대에 머물러야 하고, 직조공은 베틀 곁을 떠나서는 안 됩니다. 플라톤의 도식에서 노동이란 단순한 경제 활동이 아니라 감각의 할당입니다. 이 몸들이 무엇을 보고, 듣고, 말할 수 있는지를 미리 규정하는 칙령인 셈입니다. 장인이 민회에서 배제되는 것은 법적 결정 이전에 이미 미학적 결정입니다. 그들의 감각은 노동의 리듬에 선점당했고, 발언의 리듬을 위한 여분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개념이 갈라지며 빛을 드러냅니다. 최초의 정치적 행위가 지각 좌표의 배분이라면, 취향이란—어떤 사람이 무엇을 아름답다 여기고, 무엇에 주의를 기울이며, 무엇을 하찮게 치부하는지를 결정하는 그 능력이란—결코 순수할 수 없습니다. 세련된 취향을 기르는 행위는 이미 ‘누가 중요한 존재인지’를 결정해 놓은 감각적 건축물 안에서 하나의 위치를 점유하는 일입니다.

 

보이지 않던 자들이 무대를 점거할 때

랑시에르는 ‘치안’(la police)과 ‘정치’(la politique) 사이에 날카로운 구분선을 긋습니다. 치안이란 그의 어휘에서 경찰 조직이 아니라, 역할을 배정하고 가시성을 분배하며 ‘모든 것이 계산되어 있다’는 합의를 유지하는 장치 전체를 가리킵니다. 반면 정치는, 그 배치에 포함되지 않은 누군가가 그 배열을 교란할 때 비로소 분출됩니다. «불화»(La Mésentente, 1995)에서 그는 정치의 본질이 공동체의 지각 좌표 안에 자리를 부여받지 못한 자들을 보충함으로써 감성의 분할을 중단시키는 데 있다고 썼습니다.

이것이 일상의 취향에 어떤 함의를 갖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한 노동자 계급 출신의 10대가 침실에서 만든 음악을 업로드하여 하나의 장르를 뒤흔들 때, 단순한 음악적 혁신 이상의 사건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기존의 분배 체계가 ‘소비’에만 할당해 놓은 몸이 미학적 ‘생산’의 공간으로 넘어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교란은 문화적인 동시에 랑시에르적 의미에서 엄밀하게 정치적입니다. 의미를 만드는 존재로서 누가 가시적인가를 재구성하기 때문입니다.

랑시에르가 예술과 정치를 가끔 겹치는 두 영역으로 다루기를 거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둘은 같은 기원을 공유합니다. 감성적인 것을 재배치하고, 지배적 질서가 비가시적으로 만들어버린 것을 가시화하는 행위. 그가 오래된 윤리적 체제, 재현적 체제와 구별하여 세운 ‘미학적 예술 체제’가 정치적으로 충전되어 있는 까닭은 이데올로기적 메시지를 실어 나르기 때문이 아닙니다. 누가 아름다움을 생산하고 누가 그것을 수동적으로 수신하기만 해야 하는지를 규정하던 위계 자체를 녹여버리기 때문입니다.

 

알고리즘, 새로운 분할의 도구

이 틀을 알고리즘 큐레이션으로 포화된 세계에 옮겨 놓으면 불안한 풍경이 드러납니다. 추천 엔진은 단순히 콘텐츠를 제안하는 것이 아닙니다. 산업적 규모로 감성의 분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미지와 소리와 서사가 당신의 지각 영역에 진입하고, 어떤 것이 영원히 바깥에 머물지를 결정합니다. ‘맞춤형’ 피드의 쾌락에 젖은 사용자는 이 개인화가 곧 분할이라는 사실을 좀처럼 감지하지 못합니다—그 데이터 자체가 계급, 지역, 문화자본의 기존 위계를 따라 형성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부르디외는 1970년대 프랑스 부르주아지가 취향을 사회적 구별짓기의 무기로 배치하는 방식을 지도화했습니다. 랑시에르의 틀은 오늘날의 플랫폼 경제가 이 과정을 자동화했으며, 심지어 의도적 선택이라는 외양마저 제거해 버렸음을 시사합니다. 당신의 큐레이션된 플레이리스트는 영혼의 거울이 아닙니다. 그것은 픽셀과 음파로 렌더링된 치안 질서이며, 특정한 목소리를 들리지 않게, 특정한 삶의 형식을 이해 불가능하게 유지하는 주의력의 배분을 정확히 재생산합니다.

 

불화, 자유의 맛

그러나 랑시에르는 비관주의자가 아닙니다. 그의 철학에는 ‘불화’(dissensus)라 불리는 것에 대한 완고한 신뢰가 흐릅니다. 감성의 기존 배치가 그것의 우연성을 폭로하는 어떤 행위에 의해 균열하는 순간. 불화란 두 의견이 충돌하는 진부한 의미의 불일치가 아닙니다. 지배하는 질서가 불가능하다고 선언해 버린 세계가 분출하는 사건입니다.

취향의 영역에서 불화는 어떤 모습일까요. 아마도 알고리즘이 숨겨놓은 것을 기꺼이 찾아 나서려는 의지에서 시작될 것입니다. 지도에서 위치를 찾을 수 없는 나라의 다큐멘터리, 검색엔진이 우선순위에 두지 않는 언어에서 번역된 소설, 플레이리스트가 훈련시켜 놓은 감정적 지름길을 거부하는 음악. 이것은 문화적 관광이 아닙니다. 자연인 양 부과된 감각적 분할을 수용하기를 거부하는 미시적 정치 행위입니다.

랑시에르는 상기시킵니다. 작업대를 떠나 민회에서 발언한 장인은 허락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말하는 행위 자체가 이전의 분할이 거짓이었음을 증명한 것입니다. 당신의 취향 역시 그런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더 많이 소비함으로써가 아니라, 당신이 욕망해도 되는 것을 미리 선별해 놓은 논리를 교란함으로써.

 

다음번 휴대폰을 열어 추천 목록의 익숙한 중력에 끌려갈 때, 잠시 멈추어 보십시오. 지금 당신이 거주하고 있는 것이 누구의 분배인지 물어보십시오. 그 답은 사유의 형태로 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안락함의 가장자리에서 감각적인 것이 흔들리기 시작하는, 그 미세한 불편의 떨림으로 도착할 수도 있습니다.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