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Ontology Explained: Being, Categories, and Commitment
존재론이란 무엇인가: 존재, 범주, 그리고 존재론적 약속
존재론은 어른들이 피하는 가장 단순한 질문에서 시작합니다
존재론은 무엇이 존재하는지, 존재하는 것들이 어떤 종류로 나뉘는지, 그리고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 말할 때 우리가 무엇을 받아들이는지를 묻는 철학의 분야입니다. 말은 어렵게 들립니다. 그러나 출발점은 뜻밖에 소박합니다. 대체 무엇이 있습니까?
이 질문은 쉬워서 소박한 것이 아닙니다. 너무 근본적이어서 소박합니다. 우리는 책상, 기억, 빚, 국가, 숫자, 권리, 약속, 알고리즘, 소설 속 인물에 대해 말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같은 방식으로 존재하지는 않습니다. 의자는 앉을 수 있지만, 부채는 사람의 삶을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숫자는 손에 잡히지 않지만 과학은 숫자 없이 버티기 어렵습니다.
존재론은 그래서 세계의 물건 목록을 정리하는 학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이미 사용하고 있는 말의 전제를 따지는 사유입니다. 누군가 권리를 가진다고 말할 때, 회사가 재산을 소유한다고 말할 때, 인공지능이 판단했다고 말할 때, 우리는 실용적 표현만 쓰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현실로 인정할 것인지에 대한 입장을 이미 취하고 있습니다.
정의는 간단하지만, 그 간단함이 만만하지 않습니다
가장 압축해 말하면, 존재론은 존재에 관한 탐구입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어떤 실재들이 있는지, 그것들이 어떤 범주에 속하는지, 서로 어떻게 의존하는지, 그리고 우리의 이론이 어떤 존재를 받아들이도록 만드는지를 묻는 학문입니다. 형이상학의 핵심 영역이지만 형이상학 전체와 같지는 않습니다. 형이상학은 시간, 원인, 가능성, 자유, 정신 같은 문제까지 품습니다. 존재론은 그중에서도 무엇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에 집중합니다.
현대적 의미의 존재론이라는 말은 근대 유럽의 철학 어휘 속에서 자리를 잡았습니다. 하지만 그 질문 자체는 훨씬 오래되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오늘날 존재론이라 부를 문제를 제일철학의 이름으로 다루었습니다. 그는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는 한에서 탐구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이는 어떤 신비한 물체인 존재를 찾자는 말이 아닙니다. 어떤 것이 있다는 사실 자체에 따라오는 조건을 묻자는 말입니다.
이 지점에서 존재론은 사전식 정의를 넘어섭니다. 존재론자는 의자, 숫자, 신, 전자, 권리,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만 묻지 않습니다. 그런 물음에 답하려면 어떤 기준이 필요한지 묻습니다. 무엇을 존재한다고 인정할 때, 우리는 어떤 책임을 함께 떠안게 되는지 묻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를 범주의 문제로 만들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론의 오래된 문법을 세운 인물입니다. 그는 『형이상학』에서 제일철학을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는 한에서 탐구하는 학문으로 설명했습니다. 이 표현은 처음 들으면 안개 속을 걷는 문장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용은 매우 또렷합니다. 자연학은 변화하는 것을 변화하는 한에서 다루고, 수학은 셀 수 있고 잴 수 있는 것을 그런 한에서 다룹니다. 제일철학은 존재하는 것을 존재한다는 바로 그 측면에서 다룹니다.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는 한에서, 그리고 그것 자체에 속하는 성질들을 탐구하는 하나의 학문이 있습니다.
—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기원전 4세기)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모든 것은 같은 방식으로 있지 않습니다. 말은 실체로 존재합니다. 말의 흰색은 성질로 존재합니다. 말의 키는 양으로 존재합니다. 다른 말보다 크다는 사실은 관계로 존재합니다. 이후 철학자들은 이 범주표를 고치고 비판했지만, 핵심은 남았습니다. 존재는 평평하지 않습니다. 어떤 것은 더 자립적으로 있고, 어떤 것은 다른 것에 기대어 있습니다.
그래서 실체라는 개념이 중요해집니다. 사과는 빨간색을 잃어도 사과일 수 있습니다. 사람은 기분, 옷차림, 직업, 건강 상태가 바뀌어도 같은 사람으로 남을 수 있습니다. 성질과 관계는 사물 안에서, 사물을 통해 드러납니다. 존재론은 이 의존 관계를 따집니다. 세계가 주로 개별 사물로 이루어져 있는지, 사건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관계로 이루어져 있는지 묻습니다.
존재론의 핵심 구조는 네 가지 물음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존재의 물음입니다. 무엇이 있습니까? 윌러드 밴 오먼 콰인은 이 질문을 현대 분석철학의 언어로 다시 세웠습니다. 답은 한 단어로 가능하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모든 것. 그러나 논쟁은 바로 그다음에 시작됩니다. 모든 것에 무엇이 포함됩니까?
둘째는 범주의 물음입니다. 어떤 것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종류의 것입니까? 고통은 행성이 아닙니다. 법은 나무가 아닙니다. 숫자는 소문이 아닙니다. 결혼은 분자도 아니고 감정만도 아닙니다. 결혼은 몸, 문서, 제도, 말, 승인, 관습이 함께 얽힌 사회적 실재입니다. 어떤 것을 어느 범주에 넣느냐는 그것이 어떻게 변하고, 어떻게 사라지며, 누구에게 어떤 책임을 발생시키는지를 결정합니다.
셋째는 의존의 물음입니다. 그것은 스스로 있습니까, 아니면 다른 것에 기대어 있습니까? 그림자는 몸과 빛에 의존합니다. 은행 계좌는 제도, 기록, 법적 인정, 사회적 신뢰에 의존합니다. 선율은 소리의 연속, 악보, 기억, 연주에 기대지만 어느 하나와 완전히 같지는 않습니다. 존재론은 이런 차이를 놓치지 않으려는 훈련입니다.
넷째는 동일성의 물음입니다. 무엇이 어떤 것을 시간 속에서 같은 것으로 남게 합니까? 몸의 세포가 바뀌어도 그 사람은 같은 사람입니까? 배의 모든 부품을 하나씩 교체하면 같은 배입니까? 디지털 파일을 완벽히 복사하면 원본은 어느 쪽입니까? 이 물음은 장난스러운 수수께끼가 아닙니다. 책임, 상속, 처벌, 저작권, 기억의 문제와 연결됩니다.
보편자와 개별자는 일상 언어가 이미 형이상학임을 보여줍니다
탁자 위에 빨간 사과 두 개가 있다고 해봅시다. 사과는 두 개입니다. 그런데 빨강은 하나입니까, 둘입니까? 두 사과가 같은 빨강을 나누어 갖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보편자가 어떤 방식으로든 존재한다고 보는 실재론 쪽으로 기웁니다. 반대로 실제로 있는 것은 개별적인 빨간 사과들뿐이고 빨강이라는 말은 우리가 묶어 부르는 방식일 뿐이라고 보면 유명론 쪽으로 갑니다.
이 오래된 논쟁은 낡은 장식품이 아닙니다. 사회는 일반명사로 움직입니다. 시민, 노동자, 환자, 소비자, 범죄자, 난민, 장애인, 소유자, 가족, 여성, 남성, 아동. 이런 범주는 현실에 붙인 이름표가 아닙니다. 누가 돌봄을 받고, 누가 의심받고, 누가 통계에 잡히며, 누가 신청서의 칸 밖으로 밀려나는지를 결정합니다.
존재론은 여기서 사회의 급소를 만집니다. 어떤 범주가 존재하는지 묻는 일은 그것이 산처럼 자연적인지, 교통신호처럼 약속된 것인지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사회적으로 만들어졌지만 여전히 강력하게 실재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돈, 국경, 직위, 결혼, 학위, 법적 신분이 그렇습니다. 사회적 구성물이라는 말은 가짜라는 뜻이 아닙니다. 집에서 쫓겨난 사람에게 소유권은 사회적 구성일 뿐이라고 말해보십시오. 그 말의 냉혹함이 곧바로 드러납니다.
콰인은 존재론을 이론의 책임 문제로 바꾸었습니다
20세기에 콰인(Willard Van Orman Quine, 1908–2000)은 존재론의 말투를 바꾸었습니다. 그는 거대한 범주표를 먼저 세우기보다, 우리가 받아들이는 이론이 어떤 존재를 요구하는지 물었습니다. 그의 유명한 문장은 흔히 이렇게 요약됩니다. 존재한다는 것은 변수의 값이 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어떤 이론이 참이 되려면 반드시 인정해야 하는 대상들이 바로 그 이론의 존재론적 약속입니다.
하나의 이론은 그 이론의 진술들이 참이 되기 위해 그 이론의 묶인 변수들이 가리킬 수 있어야 하는 바로 그 존재자들에게, 그리고 오직 그 존재자들에게만 존재론적으로 약속됩니다.
— 콰인, 『있는 것에 관하여』(1948)
콰인의 중요성은 존재론을 지적 회계의 문제로 만들었다는 데 있습니다. 숫자가 과학에 필수적이라고 말한다면 숫자의 존재를 받아들여야 할 수 있습니다. 도덕적 사실이 인간 행동을 설명한다고 말한다면 도덕적 사실에 대한 약속이 생깁니다. 물리적 입자만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사람, 의미, 법, 가능성, 권리를 어떻게 설명할지 정직하게 말해야 합니다.
이 대목에서 존재론은 정직성의 훈련이 됩니다. 우리는 종종 풍부한 세계의 혜택을 누리면서 빈약한 세계관의 비용만 지불하려 합니다. 권리와 가치와 제도와 정체성이 힘을 가진 것처럼 말하다가, 약자가 인정을 요구하는 순간 갑자기 측정 가능한 것만 현실이라고 후퇴합니다. 존재론은 그 할인 판매를 중단시키는 철학입니다.
하이데거는 무엇이 있는가보다 존재의 의미를 물었습니다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는 다른 방향에서 존재론을 흔들었습니다. 그는 철학이 존재자들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존재 자체의 물음을 잊었다고 보았습니다. 책상, 원자, 신, 기계, 사람, 제도를 아무리 많이 말해도, 그것들이 있다는 말의 의미를 묻지 않으면 핵심을 놓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이데거에게 인간 존재, 곧 현존재(Dasein)가 중요해집니다. 우리는 세계 밖에서 물건을 세는 관찰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자신의 존재가 문제가 되는 존재입니다. 죽음, 가능성, 죄책, 노동, 시간, 소속을 걱정합니다. 사물을 중립적 물체로 보기 전에 쓸모 있는 것, 위협적인 것, 지루한 것, 거룩한 것, 망가진 것, 사랑하는 것으로 만납니다.
하이데거 전체에 동의하지 않아도 이 문제 제기의 힘은 남습니다. 모든 것을 자원, 데이터, 콘텐츠, 자산, 성과로 보는 사회는 이미 하나의 존재론을 채택한 사회입니다. 배달 노동자는 대기 가능 시간으로, 학생은 성적 데이터로, 환자는 기록 파일로, 노인은 비용 항목으로 줄어듭니다. 모욕은 말로 시작되기 전에 범주에서 시작될 때가 많습니다.
구체적 사례를 보면 존재론은 교실 밖에서 이미 작동합니다
의자를 생각해봅시다. 처음에는 간단해 보입니다. 나무나 금속으로 만든 물건이고, 공간 안에 있으며, 앉는 데 쓰입니다. 하지만 질문은 금세 늘어납니다. 의자는 그것을 이루는 재료와 같습니까? 다리 하나를 바꾸면 같은 의자입니까? 모든 부품을 천천히 교체하면 무엇이 남습니까? 의자는 실체입니까, 인공물입니까, 기능으로 정해지는 물건입니까?
빚을 생각해봅시다. 빚에는 무게도 색도 냄새도 없습니다. 그러나 빚은 한 사람의 삶을 망가뜨리고, 결혼을 흔들고, 아이의 진학을 바꾸며, 수년 동안 뒤따라올 수 있습니다. 빚은 계약, 장부, 법 집행, 사회적 승인에 의해 존재합니다. 사회적이라는 이유로 허구가 되지 않습니다. 어떤 제도적 실재는 돌보다 더 세게 몸을 누릅니다.
인공지능 모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도구입니까, 통계 구조입니까, 서비스입니까, 대화의 얼굴을 쓴 기업 인터페이스입니까, 아니면 제한된 의미의 행위자입니까? 답은 논문 안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도구라면 책임은 주로 사용자와 제작자에게 갑니다. 행위자처럼 취급하면 책임이 흩어져 피해 현장에서 인간의 손이 사라질 수 있습니다. 분류는 책임의 방향을 바꿉니다.
좋은 존재론은 자신의 한계도 인정해야 합니다
존재론은 오만해질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완벽한 범주 안에 넣어야만 이해했다고 착각할 때 그렇습니다. 슬픔, 사랑, 모욕, 희망은 형이상학적 칸에 잘 들어간다고 더 참된 것이 되지 않습니다. 눈물을 분류할 수 있지만 우는 사람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철학은 시험에는 이겼을지 몰라도 세계에는 졌습니다.
반대로 환원도 위험합니다. 명료성을 내세워 물리적 사물처럼 보이지 않는 것들의 현실성을 모두 깎아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엄격함은 강자에게 편리한 언어가 되기 쉽습니다. 권리는 돌이 아닙니다. 존엄은 분자가 아닙니다. 공적 약속은 사적인 느낌이 아닙니다. 단단한 물체만 현실이라면, 인간을 보호해온 많은 실재들이 머물 곳을 잃습니다.
또 하나의 위험은 말이 곧 사물인 듯 다루는 태도입니다. 우리는 이름을 만들고, 그 이름이 곧 독립된 존재를 가리킨다고 믿기 시작합니다. 시장이 원한다, 역사가 요구한다, 기술이 결정한다는 말은 때로 편리한 축약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그 뒤에서 행동하는 사람과 제도를 숨깁니다. 존재론에는 정치적 의심이 함께 필요합니다. 모든 명사가 존재자의 품격을 얻을 자격은 없습니다.
존재론은 인식론, 의미론, 이데올로기와 구별됩니다
존재론은 인식론과 다릅니다. 인식론은 우리가 어떻게 아는지를 묻습니다. 존재론은 알려질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습니다. 둘은 자주 만납니다. 무엇이 존재한다고 믿느냐에 따라 증거의 기준이 달라지고, 어떤 증거를 인정하느냐에 따라 존재 판단도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구별은 필요합니다. 어떤 것은 우리가 알지 못해도 존재할 수 있고, 어떤 믿음은 대상이 논쟁 중이어도 정당화될 수 있습니다.
존재론은 의미론과도 다릅니다. 의미론은 말의 뜻을 묻습니다. 존재론은 뜻있는 문장이 현실에서 무엇을 요구하는지 묻습니다. 셜록 홈스가 많은 실제 탐정보다 유명하다는 문장은 이해됩니다. 그런데 이 문장을 참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입니까? 허구적 인물이 있습니까? 아니면 책, 독자, 언급의 관행만 있습니까? 문장은 쉽지만, 그 문장이 요구하는 존재의 계산은 쉽지 않습니다.
존재론은 이데올로기와도 다릅니다. 다만 이데올로기는 자주 존재론의 옷을 입습니다. 어떤 문화가 특정 집단을 열등한 존재로 규정할 때, 그것은 인간이 어떤 종류의 존재인가에 대한 거짓 주장을 내놓는 것입니다. 노동을 소모품으로 보는 경제는 노동자에 관한 존재론을 품고 있습니다. 사람을 서류 번호로만 보는 행정은 존재를 행정적 가시성으로 줄입니다. 나쁜 존재론은 이론의 오류에 머물지 않습니다. 조용히 불의를 생산합니다.
존재론은 무엇을 현실로 셀 것인가의 윤리입니다
존재론을 이해한다는 것은 존재라는 말이 공적 삶에서 중립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일입니다. 현실로 인정된 것은 보호받고, 예산을 얻고, 기록되고, 애도되고, 발언권을 얻습니다. 현실이 아니라고 취급된 것은 방치될 수 있습니다. 인정받지 못한 고통은 과장으로 불립니다. 분류되지 않은 노동은 보이지 않게 됩니다. 부정된 역사는 기록의 불편한 빈칸으로 밀립니다.
오늘 존재론이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분류하는 시스템 속에 삽니다. 병원, 학교, 출입국 사무소, 신용평가, 보험, 법원, 검색엔진, 플랫폼은 사람을 특정 방식으로 읽습니다. 위험 점수, 사용자 프로필, 진단명, 자격 범주, 예측 행동은 설명만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사회적 현실을 만드는 데 참여합니다.
범주를 모두 버리자는 말이 아닙니다. 범주가 없으면 말할 수도, 돌볼 수도, 진단할 수도, 제도를 고칠 수도 없습니다. 문제는 누가 어떤 범주를 자연스러운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지, 어떤 존재 방식이 지워질 때 누가 손해를 보는지, 더 정확한 존재론이 어떤 삶의 가능성을 여는지 묻는 일입니다.
존재론은 책임 있는 경이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존재론은 무엇이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에서 출발합니다. 그러나 제대로 사유하면 더 조심스러운 태도에 도달합니다. 세계는 이름표를 기다리는 창고가 아닙니다. 권력이 마음대로 이름 붙이는 말랑한 재료도 아닙니다. 세계는 존재, 의존, 역사, 제도, 고통, 요구가 빽빽하게 얽힌 자리입니다.
무엇이 존재하는지 묻는다는 것은 결국 우리가 무엇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지 묻는 일입니다. 어떤 현실은 증거를 요구합니다. 어떤 현실은 더 나은 개념을 요구합니다. 어떤 현실은 주관적일 뿐, 사회적일 뿐, 말일 뿐이라는 성급한 삭제로부터 구출되어야 합니다. 뿐이라는 말은 역사 속에서 많은 사람을 다치게 했습니다.
좋은 존재론은 현실에서 무엇을 지울 수 있는지보다, 무엇을 함부로 지워서는 안 되는지를 먼저 묻습니다. 그 망설임은 약함이 아닙니다. 책임의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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