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발밑에서 자라는 풀 — 들뢰즈, 리좀이라는 전복의 문법
당신이 오르라고 배운 나무
우리는 나무의 형상으로 사유하도록 훈련받았습니다. 사무실 벽에 붙은 조직도, 가문의 족보, 학문의 계보—모든 곳에 같은 형태가 반복됩니다. 하나의 뿌리에서 하나의 줄기가 솟아오르고, 줄기에서 가지가 갈라지며, 가지 끝에 미리 정해진 열매가 맺히는 구조. 지식은 아래에서 위로 상승하고, 경력은 사다리를 타며, 의사결정은 꼭대기에서 내려옵니다. 나무는 질서를 약속하는 대가로, 중심에 대한 복종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모든 제국의 포장도로 아래에서, 풀은 언제나 균열을 찾아 솟아올랐습니다. 1980년,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와 가타리(Félix Guattari, 1930–1992)는 «천 개의 고원»을 출간하며 위계적 사유의 근간 자체를 뒤흔들 개념 하나를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바로 리좀(rhizome)입니다.
리좀은 왜 사유되어야 했는가
들뢰즈가 리좀을 말한 것은 미학적 취향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와 가타리가 대면한 세계에서는 국가, 기업, 정신분석 제도 모두가 동일한 구조적 문법—위에서 아래로 의미를 배분하는 수직적 명령 체계—으로 작동하고 있었습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은 모든 욕망을 오이디푸스라는 단일한 줄기로 환원했고, 촘스키의 언어학은 발화를 생성 나무(generative tree)에 가두었으며, 근대 국가는 시민을 가지치기된 행정 위계 속에 배열했습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 나무의 지배에 맞서 땅속으로 시선을 돌렸습니다. 리좀이란 식물학에서 생강이나 대나무, 잔디처럼 수평으로 뻗어가는 지하경(地下莖)을 가리킵니다. 중심도 없고, 시작도 끝도 없습니다. 어디를 잘라도 다른 마디에서 다시 싹을 틔웁니다.
리좀에는 시작도 끝도 없다. 그것은 언제나 사이에, 사물들 사이에, 존재들 사이에, 간주곡(intermezzo) 속에 있다.
— 들뢰즈 & 가타리, «천 개의 고원»(1980)
전복적 개념의 해부
리좀은 여섯 가지 원리로 작동합니다. 처음 두 원리인 연결과 이질성은, 리좀의 어떤 지점이든 종류를 불문하고 다른 어떤 지점과 접속할 수 있어야 한다고 선언합니다. 기호 사슬이 정치적 투쟁에 연결되고, 정치적 투쟁이 생물학적 과정에, 생물학적 과정이 예술적 실천에 접속합니다. 세 번째 원리인 다양체(multiplicity)는, 리좀이 상위 통일성에 종속된 개별 단위들의 집합이 아니라 그 자체로 다양체임을 천명합니다. 네 번째 원리—비기표적 단절—은 가장 도발적입니다. 리좀은 어느 지점에서든 끊어질 수 있지만, 낡은 줄기를 따라 혹은 전혀 새로운 줄기를 내밀며 반드시 다시 시작됩니다. 권력은 연결을 절단할 수 있으나, 재접속하려는 네트워크의 역능 자체를 소멸시킬 수는 없습니다.
마지막 두 원리—지도 그리기와 전사(轉寫)—는 리좀을 청사진이나 복사물과 구별합니다. 복사는 기존 구조를 재생산하지만, 지도는 열려 있고 접속 가능하며 현실과의 접촉 속에서 끊임없이 수정됩니다. 리좀은 세계를 재현하지 않습니다. 세계에 개입합니다.
제국은 여전히 나무를 세우지만, 풀은 멈추지 않는다
오늘날의 플랫폼 자본주의를 떠올려 보십시오. 소셜 미디어 기업들은 스스로를 리좀적 공간—수평적이고, 민주적이며, 누구나 누구와 연결되는 장—으로 선전합니다. 그러나 인터페이스 뒤편에서는 알고리즘의 위계가 모든 접속을 서열화하고 화폐화합니다. 리좀은 스펙터클로 제공되고, 나무는 인프라로 작동합니다. 피드는 수평으로 흐르는 듯 보이지만, 그 물줄기는 중앙 서버와 불투명한 추천 엔진, 소수 주주의 이윤 명령에 의해 길들여져 있습니다.
들뢰즈 자신도 경고했습니다. 순수한 리좀은 없으며, 나무는 끊임없이 리좀적 운동을 재포획하려 하고, 리좀은 가장 견고한 나무 안에서도 싹을 틔우려 한다고. 바로 그렇기에 리좀은 여전히 위험한 사유 도구입니다. 이 개념은 권력 없는 유토피아를 약속하지 않습니다. 대신 수평적 연결이 어디에서 은밀히 수직적 명령 체계로 우회되고 있는지 감지하는 감각을 훈련시키며, 상호부조의 네트워크, 탈중심적 운동, 중심 없이도 서로를 떠받치는 관계의 인내심 속에서 진정한 수평적 연대가 어디에서 아직 가능한지를 묻습니다.
옆으로 자라기를 선택하는 용기
리좀적으로 사유한다는 것은 모든 구조를 폐기하자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혼돈이지, 해방이 아닙니다. 리좀적 사유란 사유에 반드시 하나의 기원과 하나의 목적지가 있어야 한다는 전제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타인의 생각을 내 줄기에 접붙일 가지가 아니라, 예기치 않은 경로를 열어줄 마디로 맞이하는 일종의 지적 연대이기도 합니다. 나무 꼭대기에 가장 먼저 오르는 자에게 보상을 주는 세계에서, 옆으로 자라기를 선택하는 것 자체가 조용한 저항입니다.
아마도 오늘 우리에게 가능한 가장 급진적인 몸짓은, 나무를 쓰러뜨리는 것도 나무에서 도망치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그 기초 아래로 끈질기게 뿌리를 수평으로 보내는 것—포장도로에 균열을 하나씩 내는 것—흙이 본래 콘크리트가 아니었음을 기억해내는 것입니다.
들뢰즈는 철학이란 개념을 형성하고 발명하고 제작하는 기예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리좀은 이해해야 할 개념이 아니라 살아내야 할 실천일 것입니다. 당신의 삶에서, 누군가가 심어둔 나무를 아직도 오르고 있는 곳은 어디입니까? 그리고 어디에서, 옆으로 자랄 용기를 낼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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