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침묵: 한국 부부는 왜 서로의 몸을 잃어버렸는가
같은 집, 다른 방, 각자의 화면
밤 열 시가 넘어 현관문이 열립니다. 남편은 넥타이를 풀고 소파에 쓰러지듯 앉고, 아내는 이미 아이 옆에 누워 화면 밝기를 최저로 낮춘 채 인스타그램을 넘기고 있습니다. 두 사람은 한 지붕 아래 같은 성을 공유하고, 같은 대출을 갚으며, 같은 아이를 키웁니다. 다만 서로의 몸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어도 나누지 않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이 장면은 비극으로 분류되지 않습니다. 그저 평범한 화요일 밤의 풍경일 뿐입니다.
강동우성의학연구소와 리서치앤리서치가 2016년 기혼 남녀 1,09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조사에 따르면, 한국 부부의 36.1퍼센트가 섹스리스 상태였습니다. 섹스리스란 일본 정신과 의사 아베 데루오가 1991년 제안한 개념으로, 특별한 의학적 사유 없이 한 달 이상 성관계가 없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 수치는 일본에 이어 조사 대상국 중 세계 2위이며, 세계 평균인 약 20퍼센트의 거의 두 배에 달합니다. 2026년 1월 <코리아타임스>가 보도한 한·미·일 비교 연구에서도 한국의 섹스리스 비율은 여전히 약 36퍼센트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숫자는 충분히 충격적입니다. 그러나 정작 물어야 할 질문은 ‘얼마나 많은 부부가 접촉을 멈추었는가’가 아닙니다. 왜 이 사회는 부부 사이의 친밀성이 사라지는 것을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게 되었는가—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직면해야 할 진짜 질문입니다.
유교적 설계도 위에 올라탄 신자유주의적 피로
한국의 섹스리스 현상을 이해하려면, 먼저 이 부부가 거주하는 집의 설계도를 읽어야 합니다. 그 집은 수백 년 전 성리학적 가부장제가 그린 것입니다. 조선시대 양반가의 남편과 아내는 사랑방과 안방으로 나뉘어 살았습니다. 잠자리는 의례적 행위였고, 아들을 낳기 위한 길일에만 허락되었습니다. 성관계는 관계적 행위가 아니라 생식적 의무였으며, 사랑이나 상호 쾌락 같은 것은 한국 가정의 건축 도면에 애초에 포함된 적이 없습니다.
고려대 명예교수 한성열은 이 전통 속에서 가족 구조는 부부가 아니라 부자(父子) 관계를 중심으로 조직되었다고 지적합니다. 군산대 임춘희 교수 역시 현대 한국의 결혼이 여전히 개인 간의 결합이 아니라 가족 간의 결합에 가까우며, 애정보다 물질적 안정성을 우선시하는 구조라고 분석합니다. 부부는 제도를 유지하기 위해 존재하지, 제도가 부부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오래된 설계도 위에 후기 자본주의의 피로 체제가 덧씌워졌습니다. 2024년 기준 한국 노동자의 연평균 근로 시간은 1,865시간으로, OECD 회원국 중 6위를 기록했습니다. 대한성건강학회 전 회장 배정원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합니다. 퇴근하고 나면 개인적 관계에 투자할 에너지가 남아 있지 않다고. 46세 서울 거주자 김정민 씨가 <코리아헤럴드>에 묘사한 밤 풍경은 상징적입니다. 부부가 같은 침대에 눕지만 서로 등을 돌린 채 각자의 화면에 빠져듭니다. 적대가 아닙니다. 상호 소진의 기하학일 뿐입니다.
에로스가 성취주체를 만났을 때
서울에서 태어나 독일로 건너간 철학자 한병철(Byung-Chul Han, 1959– )은 이 상황을 가장 날카롭게 진단할 수 있는 사유의 도구를 제공합니다. 그는 «피로사회»(2010)에서 현대의 주체가 외부의 명령이나 금지에 의해 규율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끊임없이 최적화하며 착취하는 ‘성취주체’라고 진단했습니다. 우울과 번아웃은 의지의 실패가 아니라, 성과를 내면화한 사회가 도달하는 논리적 귀결입니다.
«에로스의 종말»(2012)에서 한병철은 이 분석을 사랑과 욕망의 영역으로 확장합니다. 에로스는 본질적으로 자기 부정의 용기를 요구합니다. 타자의 낯섦 앞에서 상처받고, 방향을 잃고, 변형될 수 있는 취약성을 기꺼이 감수하는 것. 그러나 신자유주의적 성취주체는 그런 취약성을 감당할 여유가 없습니다. 모든 순간은 생산적이어야 하고, 모든 만남은 수익을 내야 합니다. 타자는 소비의 대상으로 환원되고, 사랑은 편안함과 호감의 문제로 전락합니다.
이 틀을 한국의 침실에 대입하면, 그 침묵이 읽힙니다. 섹스리스 부부는 단순히 피곤한 것이 아닙니다. 남편은 기업이라는 기계에, 아내는 가사 노동과 직업적 성취의 이중 부담에 각각 성취주체로 동원된 상태입니다. 진정한 친밀성이 요구하는 급진적 취약성을 감당할 에너지가 어느 쪽에도 남아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효율적으로, 인접한 고독 속에서 공존합니다.
빈자리를 채우는 산업
완곡하게 넘어갈 수 없는 지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강동우 박사는 한국이 불법임에도 성매매 접근성이 극히 높은 나라 중 하나라고 지적합니다. 그의 2016년 조사에서 기혼 남성의 50.8퍼센트가 혼외 성관계 경험을 인정했으며, 40.5퍼센트는 성매매가 외도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응답했습니다. 부부의 침실은 침묵하지만, 성적 충족을 거래하는 시장은 활발하게 작동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개별 남성의 도덕적 실패로만 읽을 수 없습니다. 부부의 의무와 성적 쾌락을 역사적으로 분리해온 체제의 논리적 귀결입니다. 유교적 가부장제는 기생을 용인했고, 신자유주의 자본주의는 홍등가를 용인합니다. 정당화의 논리만 바뀌었을 뿐 구조는 존속합니다. 아내는 가정의 관리인으로, 시장은 욕망의 공급자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둘 사이를 연결해야 할 친밀성은 그 간극 속으로 추락합니다.
취약해질 용기를 되찾는 일
24년 경력의 이혼 전문 변호사 양소영은 자신을 찾는 의뢰인의 80에서 90퍼센트가 섹스리스 부부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단 한 명도 성관계의 부재를 이혼의 명시적 사유로 꺼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침묵에 대한 침묵 자체가 진단적입니다. 고통마저 생산적이어야 하는 사회에서, 누군가에게 안기고 싶다는 고백은 사치로—성취 극장 안에서의 민망한 나약함으로 취급됩니다.
이 순환을 깨뜨리려면 개인적 처방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연결의 시간을 집어삼키는 노동 시간의 구조적 재협상, 감정 노동을 불균등하게 배분하는 성별 역할의 재구성, 부부를 가족의 중심에 한 번도 놓아본 적 없는 문화적 유산에 대한 성찰이 필요합니다. 한병철의 용어를 빌리자면, 성과의 논리 바깥으로 나가 타자를 재발견할 수 있는 정치적이고 개인적인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가사 분담의 공동 관리인이 아니라, 여전히 우리를 상처 입히고 깨울 수 있는 낯선 존재로서의 타자를 말입니다.
작은 저항의 징후는 이미 보입니다. 젊은 세대 중 일부는 4B 운동을 통해 가부장적 계약 자체를 거부하고, 다른 이들은 제도적 의무가 아닌 상호 욕망에 기반한 관계를 조용히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해답이 아니라 틈새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균열 사이로, 다른 종류의 친밀성이 숨을 쉴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섹스리스의 반대말은 더 많은 섹스가 아닙니다. 두 사람이 여전히 서로에게 낯선 존재이기를 감수하는 것, 진정한 만남이 주는 현기증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오늘 밤, 화면을 내려놓고, 옆에 누운 사람을 향해 돌아누워, 아무런 생산적 목적도 없는 한마디를 건네보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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