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패권의 자해적 몰락: 건축가가 스스로 허무는 대성당
동맹이라는 이름의 대성당
투키디데스라면 아마 씁쓸하게 웃었을 것입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군사력, 세계의 기축통화, 4개 대륙에 걸친 동맹 네트워크를 보유한 제국이 스스로의 손으로 자신의 건축물을 해체하고 있습니다. 어떤 적대 세력이 성벽을 무너뜨린 것이 아닙니다. 혁명군이 문을 부순 것도 아닙니다. 철거의 망치는 안에서 휘둘러지고 있습니다.
호르무즈 해협은 봉쇄 상태에 놓이고, NATO 동맹국들은 미국의 참전 요청을 공개적으로 거부하며, 유럽 수도들은 미국의 후견 없이 작동하는 독자 방위산업 건설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BRICS 국가들은 달러로부터의 이탈을 가속하고 있고, JPMorgan은 2026년 탈달러화 압력이 전례 없는 수준에 도달했다고 경고합니다. 이것은 폴 케네디가 1980년대 말에 제기한 익숙한 쇠퇴론의 반복이 아닙니다. 구조적으로 전혀 다른 사태입니다. 제국이 자신의 지배를 가능하게 했던 동의의 네트워크를 스스로 파괴하기로 선택한 것입니다.
헤게모니의 잊혀진 토대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 1891–1937)는 파시스트 감옥에서 결정적인 구분을 남겼습니다. 지배는 단순한 강제력이 아니라 헤게모니—지배 권력이 자신의 특수한 이익을 보편적인 것으로 제시하고, 피지배자의 ‘자발적 동의’를 확보하는 능력—에 기반한다는 것입니다. 전후 미국의 질서는 이 원리를 본능적으로 이해했습니다. 마셜 플랜은 자선이 아니라, 미국의 리더십이 곧 집단적 번영이라는 등식을 성립시키는 문명적 인프라의 건설이었습니다.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는 총구 앞에서 강요된 것이 아니라, 브레턴우즈 체제가 모든 참여국에게 이익을 제공했기에 수용된 것이었습니다.
지금 무너지고 있는 것이 바로 이 토대입니다. 라이벌이 충분히 강해져서가 아니라, 건축가 스스로가 대성당의 유지비가 너무 비싸고 감사받지 못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2025년 국가안보전략은 동맹에 대한 약속을 거래적 ‘미국 우선주의’ 계산법에 종속시켰습니다. 69개 교역국에 10%에서 41%에 이르는 관세가 단 하나의 행정명령으로 부과되었고, 동맹국과의 정보 공유는 중단되었다가 마지못해 복원되었습니다. 한번 균열된 신뢰는 어떤 외교적 공동성명으로도 복원되지 않습니다.
이란전쟁이 드러낸 패권의 민낯
2026년 2월 28일,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에 대해 12시간 동안 약 900회의 공습을 감행했을 때, 이것은 압도적인 힘의 과시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드러난 것은 고립이었습니다. 단 한 곳의 주요 유럽 동맹국도 작전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트럼프가 ‘종이호랑이’라고 조롱했던 NATO는 어떤 공식 성명보다 웅변적인 침묵으로 응답했습니다. 정치학자 카를라 노를뢰프가 3월의 분석에서 지적한 대로, 미국에 대한 최대의 장기적 위협은 중국의 군사력이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세계적 리더십을 지탱해온 동맹 체계의 점진적 해체”입니다.
호르무즈 해협 위기는 이 해체를 결정화합니다. 세계 석유의 5분의 1이 이 좁은 수로를 통과합니다. IMF는 경기침체를 동반한 ‘대규모 에너지 위기’를 경고했습니다. 그럼에도 워싱턴은 자국의 동맹국들이 지지하지도, 이익을 얻지도 못하는 봉쇄를 단독으로 집행하고 있습니다. 동맹의 정당성 없는 군사적 우위는 힘이 아닙니다. 값비싼 고독일 뿐입니다.
동의의 결손: 동맹이 타인이 되는 순간
유럽의 대응은 불안한 순응에서 구조적 독립으로 전환되고 있습니다. 유럽의 국방비 지출은 세계 군사비의 21%를 넘어섰고, 독일은 국방예산을 2029년까지 1,520억 유로로 증액할 계획입니다. NATO 회원국들은 헤이그 정상회의에서 GDP 대비 5%의 국방비 목표를 약속했는데, 이는 동맹을 강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동맹의 잠재적 무력화에 대비하기 위해서입니다. 월스트리트저널이 보도한 ‘1조 달러 경쟁’의 본질은 미국으로부터의 방위산업 독립입니다.
달러 패권 역시 조율된 침식에 직면해 있습니다. 확대된 BRICS 국가들은 달러 표시 무역을 적극적으로 축소하고 있습니다. 그람시라면 이 상황을 즉각 알아보았을 것입니다. 패권적 통화가 보편적 공공재로 인식되기를 멈추고 강압의 도구로 인식되는 순간, 그것을 지탱하던 동의는 증발합니다.
공위기: 괴물과 가능성의 시간
그람시가 같은 감옥에서 남긴 가장 전율적인 문장이 바로 지금 이 순간을 향해 말하고 있습니다.
낡은 세계는 죽어가고, 새로운 세계는 태어나기 위해 몸부림친다. 지금은 괴물의 시간이다.
— 안토니오 그람시, «옥중수고»
더 가디언은 2026년 2월, 이 문장이 현대 지정학 논평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문장이 되었다고 보도했습니다. 그 자체가 하나의 징후입니다. 미국 주도의 자유주의 국제질서는 아직 죽지 않았지만, 더 이상 동의를 이끌어내지 못합니다. 중국식이든 다극적이든, 그 어떤 대안적 질서도 이를 대체할 만큼 응집되지 못했습니다. 이 진공 속에서 지역 분쟁은 전이되고, 무역 파편화는 가속되며, 집단적 위기를 관리하도록 설계된 제도들은 작동 능력을 상실해갑니다.
그러나 공위기는 위험의 공간만이 아닙니다. 재상상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미국의 헤게모니가 자국의 이익이 곧 모두의 이익이라고 세계를 설득하는 데 의존했다면, 그 붕괴는 이전에는 봉쇄되어 있던 질문을 열어젖힙니다. 진정한 다자적 질서는 누구의 이익에 복무해야 하는가? 뮌헨안보회의의 2026년 보고서 제목 ‘파괴 아래’는 정책문서라기보다 구질서에 대한 사망선고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장례는 때로 시작이기도 합니다.
제국적 야망을 품은 적 없이 집단안보의 건축물에 의존해왔던 중견국 민주주의 시민들 앞에, 이제 엄중한 책임이 놓여 있습니다. 대성당을 지은 초강대국이 그것을 포기하기로 결정했다면, 어쩌면 그 대성당은 처음부터 우리가 수동적으로 거주할 공간이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지금의 과제는 낡은 질서를 애도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마음이 바뀔 수 있는 단 한 명의 건축가의 선의에 의존하지 않는, 보다 정직하게 공유된 무엇인가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제국은 성벽 밖의 야만인에게 무너지는 것이 아닙니다. 안에서부터, 스스로 끊어낸 실 한 올 한 올에 의해 풀려가고 있습니다. 물음은 과거를 복원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아직 존재한 적 없는 것을 함께 구상할 집단적 상상력이 우리에게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보증인이 불안정의 원천이 될 때, 안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 전환이 당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는 어떻게 보이는지, 듣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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