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는 어떻게 가해자가 되었는가: 홀로코스트의 기억과 한 국가의 도덕적 붕괴
기억이 무기가 된 순간
20세기의 양심을 짓누르는 한 장의 사진이 있습니다. 바르샤바 게토에서 두 손을 치켜든 일곱 살쯤 된 소년, 그 등 뒤에 겨누어진 독일 군인의 총구. 이 이미지는 전후 세계의 도덕적 기초를 떠받치는 주춧돌이 되었습니다. 절대적 피해자의 권위로 그것은 선언했습니다. 다시는, 절대로.
이제 다른 이미지를 떠올려 보십시오. 가자 북부, 한때 학교였던 건물의 잔해 아래 먼지를 뒤집어쓴 채 움직이지 않는 팔레스타인 아이. 그 공습을 명령한 군인은 바르샤바의 그 소년에 대한 기억 위에 세워진 국가를 위해 복무합니다. 두 이미지 사이에 놓인 것은 단순한 시간의 간격이 아니라, 국제 정치의 기존 어휘로는 더 이상 명명할 수 없는 거대한 도덕적 심연입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체계적으로 기록된 제노사이드의 용광로에서 단련된 민족이, 어떻게 2025년 9월 유엔 독립 국제조사위원회가 ‘제노사이드’로 결론 내린 행위의 문턱에 도달했을까요. 이것은 수사적 질문이 아닙니다. 우리 시대의 가장 당혹스러운 윤리적 수수께끼입니다.
회색 지대: 피해자가 권력을 학습하는 곳
아우슈비츠를 생존한 이탈리아의 화학자이자 작가 프리모 레비(Primo Levi, 1919–1987)는 유작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1986)에서 이 물음의 신경을 정확히 건드리는 개념을 제시했습니다. 회색 지대(grey zone)입니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경계가 녹아내리는 극한의 도덕적 모호함, 그 지대를 레비는 해부했습니다. 나치는 피억압자를 자신의 억압에 공모하도록 강제하는 체제를 설계했고, 존더코만도와 카포들은 순결과 죄책이 분리 불가능한 황혼의 영역에 거주했습니다.
레비는 이 개념을 도덕적 단순화에 대한 경고로 의도했지, 가해자의 면죄부로 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가 예견하지 못한 것이 있었습니다. 회색 지대가 수용소의 담장을 넘어 하나의 국민국가 전체를 규정하는 조건으로 전이될 수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홀로코스트의 재에서 태어난 이스라엘은 난공불락의 피해자 정체성 위에 정치적 존재를 구축했고, 바로 그 정체성이 가해자로의 변환을 가능하게 하는 심리적 하부구조를 제공했습니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는 수십 년 전에 이 메커니즘을 꿰뚫었습니다. 폭력에는 괴물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개인의 도덕적 판단을 무력화하는 시스템이면 충분합니다.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 1925–2017)은 «근대성과 홀로코스트»(1989)에서 이 통찰을 확장하여, 제노사이드를 가능하게 하는 메커니즘이 근대적 합리성 자체에 내장되어 있다고 논증했습니다. 홀로코스트가 근대의 사고(事故)가 아니라 근대에 잠복한 가능성이었다면, 생존자들로 구성된 국가라 해도 그 논리를 재생산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피해의 연금술: 방패에서 칼로
전환은 하루아침에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고통의 기억을 도덕적 나침반에서 정치적 무기로 변환하는 지속적인 이데올로기적 연금술이 필요했습니다. 이스라엘 건국 서사는 두 개의 명제를 하나의 반박 불가능한 논리로 융합했습니다. 유대 민족은 비길 데 없는 악을 겪었다. 그러므로 유대 민족은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안전을 보장하는 국가를 가질 자격이 있다. 첫 번째 명제는 역사적으로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명제는 첫 번째에서 논리적으로 도출되지 않습니다. 다만 첫 번째의 감정적 힘이 두 번째에 대한 이의를 거의 불가능하게 만들어 왔을 뿐입니다.
이스라엘의 철학자 예샤야후 레이보비츠(Yeshayahu Leibowitz, 1903–1994)는 1960년대에 이미 이 구조를 섬뜩한 정확성으로 지목했습니다. 그는 팔레스타인 점령지 지배가 ‘유대-나치’를 양산할 것이라 경고했는데, 이스라엘인이 본질적으로 악해서가 아니라 포로 인구에 대한 군사 점령의 구조적 논리가 점령자의 도덕적 기반을 필연적으로 부식시키기 때문이었습니다. 소설가 아모스 오즈(Amos Oz, 1939–2018) 역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을 선과 악의 할리우드 서부극이 아닌 그리스 비극이라 불렀습니다. 두 사상가가 공통으로 포착한 것은 하나의 구조적 역설입니다. 피해자 정체성의 신성화는 스스로를 가해자로 인식할 수 없는 주체를 생산합니다.
기억이 담아내지 못한 사실들
사실의 기록은 이제 방어적 서사를 압도합니다. 1948년, 70만 명 이상의 팔레스타인인이 나크바 과정에서 추방되거나 피난했습니다. 아우슈비츠 해방 불과 3년 뒤의 일입니다. 2026년 4월 현재, 가자 보건부는 2023년 10월 이후 7만 3천 명 이상의 팔레스타인인 사망을 보고하고 있습니다. 2026년 2월 «란셋 글로벌 헬스»에 발표된 연구는 전쟁 첫 15개월 동안의 실제 폭력 사망자가 약 75,200명, 가자 전쟁 전 인구의 약 3.4%에 달한다고 추정합니다.
2025년 9월, 유엔 독립 국제조사위원회는 이스라엘이 가자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제노사이드를 저질렀다고 결론 내렸으며, 1948년 제노사이드 협약 제2조의 다섯 가지 행위 중 네 가지에 해당하는 증거를 확인했습니다. 같은 달 국제제노사이드학자협회(IAGS)도 동일한 판단을 담은 결의를 채택했습니다. 이것은 편향된 행위자의 주장이 아닙니다. 국제 법률 및 학술 공동체의 심의된 판단입니다.
이 붕괴를 가장 선명하게 비추는 철학적 렌즈는 다시 아렌트입니다. 악의 평범성은 악의 사소함에 관한 개념이 아니었습니다. 개인의 도덕적 판단을 유예시키는 시스템 안에 배치된 평범한 인간이 비범한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는 공포스러운 능력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학교에 대한 공습 명령을 수행하는 이스라엘 군인은 스스로를 괴물로 경험하지 않습니다. 임무를 수행하는 전문가로 경험합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1963)에서 아렌트가 해부한 바로 그 심리적 구조입니다.
순환을 끊기 위하여: 정체성 너머의 연대
앞으로의 길은 이 재앙을 쌓아 올린 동일한 돌로 포장할 수 없습니다. 정체성으로서의 피해자 의식이 가해의 조건을 생산했다면, 그 자리를 실천으로서의 연대가 대체해야 합니다. 고통을 경쟁 자원으로 취급하는 논리, 팔레스타인의 고통을 인정하면 유대인의 고통이 축소된다는 제로섬 사고를 해체하는 것이 출발점입니다.
이 전환을 위한 가장 급진적인 목소리는 언제나 내부에서 나왔습니다. 브첼렘(B’Tselem)과 침묵을 깨며(Breaking the Silence)는 점령의 폭력을 엄밀하게 기록해 왔고, 역사가 일란 파페와 철학자 주디스 버틀러는 홀로코스트 기억에 대한 진정한 충실함이란 특정 민족국가의 요새화가 아니라, 어떤 인간도 폐기 가능성의 논리에 종속되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의 보편적 확장이라고 주장해 왔습니다.
모든 시민에게 열린 미시적 저항은 과거의 고통이 영구적 도덕 면제부를 부여한다는 위안의 허구를 거부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다시는, 절대로’가 ‘우리에게만 다시는’이 아니라 ‘누구에게도 다시는’을 의미해야 한다고 고집하는 것입니다. 바르샤바의 소년과 가자의 아이가 같은 도덕적 우주에 거주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기억은 소유물이 아닙니다. 세대를 거듭할수록 가벼워지는 것이 아니라 무거워지는 책임입니다. 한 민족이 자신의 가장 깊은 상처를 타인에게 상처를 입히는 면허로 변환할 때, 위선보다 더 나쁜 무엇인가가 발생합니다. 최초의 범죄가 그 피해자 자신에 의해 완성되는 것입니다. 남은 질문은 이것을 명명할 수 있느냐가 아닙니다. 이미 명명되었습니다. 질문은 우리가 그 이름을 듣고도 여전히 행동할 도덕적 용기를 지니고 있느냐입니다.
‘다시는, 절대로’라는 말은 당신에게 무엇을 의미하며, 그것은 누구를 위한 선언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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