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시마 유키오와 『금각사』: 아름다움은 극우주의의 면죄부가 될 수 없습니다
어떤 작가는 문장을 칠기처럼 닦아냅니다. 수치심의 떨림, 욕망의 윤기, 아름다움이 상처 입은 인간 앞에서 어떻게 심문관처럼 서는지를 누구보다 섬세하게 씁니다. 그런데 그 작가가 사병 조직을 만들고, 자위대 주둔지에 들어가 지휘관을 인질로 잡고, 전후 헌정질서를 뒤엎으라고 병사들에게 외친 뒤 할복으로 생을 끝냅니다.
이 불편한 이름이 미시마 유키오(1925–1970)입니다. 여기서 불편함은 흥미 위주의 스캔들이 아닙니다. 사유가 걸려 넘어지는 돌부리입니다. 『금각사』를 읽는 우리는 그 돌부리를 피해갈 수 없습니다. 아름다움만 보고 들어가면 정치가 지워지고, 정치만 보고 들어가면 문장의 무서운 정밀함이 사라집니다.
금빛 누각 앞에 선 독자는 두 문장을 동시에 붙들어야 합니다. 미시마는 천재적 소설가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극우적 정치 상상력은 그릇되었습니다. 앞의 문장이 뒤의 문장을 누그러뜨려서는 안 됩니다. 뒤의 문장이 앞의 문장을 없던 일로 만들어서도 안 됩니다.
『금각사』는 아름다움이 견딜 수 없는 것이 되는 순간에서 시작합니다
『금각사』는 1950년 교토의 금각을 한 젊은 승려가 불태운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삼습니다. 미시마는 이 사건을 미조구치라는 말더듬이 수련승의 의식 속으로 옮겨놓습니다. 미조구치에게 금각은 처음부터 건물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말 속에서 먼저 도착한 소문이고, 머릿속에 자리 잡은 이미지이며, 끝내 자신의 삶을 압박하는 절대적인 형상입니다.
미조구치는 관광 안내서가 말하는 방식으로 아름다움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는 아름다움에 사로잡힙니다. 금각은 그를 위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난, 신체적 왜소함, 말의 장애, 성적 수치심, 사회적 고립을 더 선명하게 느끼게 합니다. 미시마의 문장이 섬세한 까닭은 상처가 조잡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굴욕은 대개 큰 사건보다 작은 틈으로 들어옵니다. 막힌 발음, 실패한 접근, 외면하는 얼굴, 자기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 미조구치의 세계는 그런 작은 균열들로 가득합니다.
영원을 한 손으로 만지면서 다른 한 손으로 삶을 만지는 것은 분명 불가능하다.
— 미시마 유키오, 『금각사』(1956)
이 문장은 소설의 치명적인 분열을 드러냅니다. 미조구치는 타협 없는 영원을 원합니다. 그러나 삶은 늘 타협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먼지, 허기, 더듬거리는 말, 욕망, 창피함, 평범한 시간이 삶입니다. 금각이 견딜 수 없는 것은 추해서가 아닙니다. 너무 완전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취약함과 끊어진 아름다움은 쉽게 심판대가 됩니다.
미시마의 문장은 강박을 정교하게 보여주지만, 그것을 용서하지는 않습니다
이 소설의 위대함은 미조구치를 병리 기록으로 축소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그는 단지 아픈 사람도, 악인도, 전후 일본의 상징만도 아닙니다. 미시마는 결핍이 어떻게 형이상학으로 변해가는지를 독자가 따라가게 만듭니다. 미조구치는 어느 날 갑자기 건물을 불태우기로 마음먹지 않습니다. 그는 문장 하나하나의 어둠 속에서, 파괴가 친밀함처럼 보이는 세계를 만들어갑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미시마의 탐미주의는 가장 위험한 힘을 얻습니다. 그의 문장은 내면의 극단을 읽을 수 있게 만듭니다. 소리 지르지 않고 조입니다. 덜 뛰어난 작가였다면 방화를 광기로 설명하고 문을 닫았을 것입니다. 미시마는 불편할 만큼 오래 문을 열어둡니다. 이미지는 어떻게 사람보다 강해지는가. 숭배는 어떻게 폭력으로 변하는가. 아름다움을 소유하려는 욕망은 어떻게 그것을 없애려는 충동으로 끝나는가. 소설은 이 질문들을 독자 앞에 놓습니다.
그렇다고 이 문학적 탁월함이 결백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미시마의 정치가 어느 날 작품 바깥에서 갑자기 떨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의 여러 작품은 순수성, 희생, 죽음의 에로티시즘, 부르주아적 안락함에 대한 혐오 주변을 반복해서 맴돕니다. 다만 『금각사』에서 그 힘은 소설적 통제 안에 있습니다. 미조구치의 행위는 공적 구원의 의식으로 찬양되지 않습니다. 불완전함과 함께 살 수 없었던 영혼의 파국으로 제시됩니다. 이 작품에는 깃발 없이도 충분한 어둠이 있습니다.
이 구분은 중요합니다. 문학은 위험한 욕망을 다룰 수 있습니다. 그것을 다룬다는 사실만으로 찬성하는 것은 아닙니다. 윤리적 질문은 작품 안에 어두운 충동이 있느냐가 아닙니다. 그 충동을 작품이 어떻게 처리하느냐입니다. 『금각사』는 미조구치를 면죄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를 이해 가능한 인간으로 만듭니다. 문학의 불온한 일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정치적 미시마는 아름다움을 명령으로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1970년 11월 25일, 미시마는 자신이 만든 사병 조직 다테노카이 대원들과 함께 도쿄의 자위대 주둔지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지휘관을 인질로 잡고 발코니에 올라 병사들에게 전후 헌법 질서를 거부하라고 외쳤습니다. 병사들은 호응하지 않았습니다. 이어 그는 할복했습니다. 이 장면은 종종 연극적 매혹으로 포장됩니다. 마치 의식화된 죽음이 평범한 정치적 폭력보다 더 깊은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냉정해야 합니다. 미시마의 극우주의는 미학적 갈망을 강제의 환상으로 바꿨습니다. 천황은 토론 가능한 정치 제도가 아니라, 상처 입은 남성성, 군사화된 향수, 민주적 타협에 대한 경멸이 모여드는 성스러운 기호가 되었습니다. 전쟁을 포기한 전후 헌법은 그에게 정신의 거세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국의 대가를 몸과 굶주림과 침묵과 무덤으로 치른 이들에게 그것은 다른 시민적 삶을 시작하게 한 불완전하지만 중요한 약속이었습니다.
미시마가 전통을 너무 사랑했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치게 점잖은 설명입니다. 아름다움이 복종을 요구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예술을 떠나 지배의 언어로 들어갑니다. 문제는 그가 오래된 형식과 무사의 규율과 고전적 엄격함을 좋아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한 사회는 과거와 논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미래를 불태우며 과거를 소환해서는 안 됩니다. 문제는 그의 정치가 미학적 강도를 국민적 운명으로 바꾸려 했다는 점입니다.
나쁜 정치에 도달한 위대한 작가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미시마를 지워버리는 일은 쉽습니다. 그를 성역으로 모시는 일은 더 위험합니다. 앞의 태도는 우리의 결백함을 과시하고, 뒤의 태도는 권력을 아름답게 꾸밉니다. 더 어려운 독법은 책을 덮지 않으면서 경례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문장 집중력을 인정하면서도 정치적 욕망의 폭력성을 분명히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실 둘 다 해야 합니다. 그래야 어느 쪽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금각사』 자체가 이 독법을 가르칩니다. 미조구치는 자신 바깥에 남아 있는 아름다움을 견디지 못해 그것을 불태웁니다. 민주적 독자는 반대로 해야 합니다. 아름다움을 소유하지 않은 채 견뎌야 합니다. 작품이 우리의 승인보다 크다는 사실을 인정하되, 작가의 정치가 판단을 빠져나가게 해서는 안 됩니다.
과제는 예술과 정치를 서로 만난 적 없는 것처럼 분리하는 일이 아닙니다. 과제는 둘의 충돌을 읽되,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협박하지 못하게 하는 일입니다.
이런 독서는 편하지 않습니다. 사랑할 것인가, 버릴 것인가, 다음으로 넘어갈 것인가를 묻는 소비자의 반사신경을 거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 문장은 찬란하면서도 윤리적으로 연루될 수 있습니다. 한 작가는 깊은 어둠을 보여주고도, 정작 자신은 다른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습니다. 독자의 책임은 그 차이를 알아보는 데 있습니다.
미시마가 여전히 필요한 까닭은 그가 문학이 가장 강력해지는 바로 그 자리에서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아름다움이 한 인간 전체를 사로잡을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금각사』는 그 사로잡힘을 안쪽에서 보여주는 소설입니다. 그러나 우아함은 면죄부가 아닙니다. 불탄 금각, 실패한 발코니 연설, 죽은 작가, 살아남은 책이 우리에게 남기는 결론은 분명합니다. 아름다움은 명령하려는 욕망을 포기할 때에만 인간적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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