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lain Badiou’s Event: Politics, Philosophy, and the Immanence of Truths
알랭 바디우의 사건: 정치와 철학의 관계, 진리들의 내재성
어떤 사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만드는 일에 놀라울 만큼 능숙합니다. 선거는 치르고, 보고서는 발간하고, 새로운 구호도 내겁니다. 다양성을 말하고, 혁신을 말하고, 위기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가능한 것의 경계는 거의 움직이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이 정지 상태를 성숙이라 부르고, 현실 감각이라 부르며, 때로는 민주주의라고도 부릅니다. 말이 피곤해지면 권력은 그 피곤함을 이용합니다.
알랭 바디우(Alain Badiou, 1937– )의 철학은 바로 이 관리된 세계를 의심하는 자리에서 시작합니다. 바디우가 무질서를 숭배해서가 아닙니다. 소란을 사유로 착각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가 묻는 것은 더 정밀합니다. 하나의 세계는 무엇을 포함하는가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의 세계는 무엇을 세지 않는가, 누구를 보이지 않는 자리에 두는가, 어떤 미래를 애초에 불가능한 것으로 처리하는가에 의해 유지됩니다.
바디우의 사건은 이 계산의 질서가 실패하는 순간을 가리킵니다. 이미 인정된 자리, 허가된 목소리, 제도화된 가능성 안에서는 설명되지 않는 무엇이 출현합니다. 그 출현은 단순한 소동도, 뉴스도, 유행도 아닙니다. 사건은 기존 세계가 가진 지식의 목록으로는 흡수되지 않는 진리의 시작입니다.
여기서 정치와 철학의 관계가 중요해집니다. 바디우에게 정치는 철학이 위에서 판단하는 대상이 아닙니다. 정치는 철학의 응용 분야도 아닙니다. 정치는 사랑, 예술, 과학과 더불어 진리가 발생하는 절차입니다. 철학은 정치를 대신하지 않습니다. 철학은 정치에서 발생한 진리가 다른 진리들과 함께 사유될 수 있도록 그 자리를 마련합니다. 바디우에게 철학은 정치의 주인이 아니라, 정치적 진리가 사라지지 않도록 그 이름을 붙드는 사유의 장소입니다.
사건은 세계가 세지 못한 것이 나타나는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바디우의 대표작 『존재와 사건』은 1988년 프랑스어로 출간되었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존재론은 수학, 더 정확히는 집합론이라고 주장합니다. 처음 들으면 지나치게 난해한 선언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핵심은 비교적 분명합니다. 어떤 상황이든 그것은 다양한 것들을 하나의 세계로 세고 묶는 방식입니다. 세계는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의미 있는 것으로 인정할지를 정합니다.
예를 들어 직장은 노동자, 직무, 성과, 생산성을 셉니다. 그러나 피로와 불안, 돌봄의 부담은 개인의 약점으로 밀어낼 수 있습니다. 국가는 시민, 유권자, 납세자, 인구 집단을 셉니다. 그러나 행정적으로는 보이지만 정치적으로는 들리지 않는 사람들을 만들기도 합니다. 문화는 취향, 선택, 소비, 반응을 셉니다. 하지만 그 시장 안으로 들어오기를 거부하는 요구는 성가신 것으로 처리합니다.
바디우가 말하는 사건은 이 질서의 가장자리에서 발생합니다. 그는 사건이 하나의 사건적 장소와 연결된다고 봅니다. 그 장소는 상황 안에 있으나, 그 상황의 공식적 계산으로는 제대로 대표되지 않는 지점입니다. 그래서 사건은 기존 지식으로 곧바로 검증되지 않습니다. 기존 지식이야말로 사건이 흔드는 질서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일은 일어납니다. 그러나 바디우적 의미의 사건이 되는 일은 드뭅니다.
시위 하나를 생각해보겠습니다. 그것은 치안 문제로 처리될 수도 있고, 뉴스의 한 장면으로 소비될 수도 있으며, 불만의 표출로만 기록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시위가 이전 질서 안에서는 읽히지 않던 평등의 가능성을 열고, 사람들이 그 가능성에 충실한 방식으로 스스로를 조직한다면, 그때 그것은 사건이 됩니다. 사건은 군중 자체도 아니고 구호 자체도 아니며 날짜 자체도 아닙니다. 그 모든 재료 안에서 새로운 진리의 이름이 붙는 순간입니다.
나는 ‘진리’, 곧 하나의 진리를 사건에 대한 충실성의 실제 과정이라고 부르겠습니다. 그것은 이 충실성이 상황 안에서 생산하는 것입니다.
— 알랭 바디우, 『윤리학』(1993)
이 문장은 바디우 사유의 중심축입니다. 진리는 이미 안정된 사실과 명제가 서로 맞아떨어지는 관계만이 아닙니다. 개인의 내면적 확신도 아닙니다. 진리는 하나의 과정입니다. 사건에서 시작되지만, 충실성을 통해서만 존재합니다. 충실성이 없다면 사건은 추억, 기념, 상품, 브랜드가 됩니다. 세계는 자신을 위협했던 것을 길들이는 데 탁월합니다. 한때 위험했던 이름을 기념관에 넣고, 반역의 이미지를 티셔츠에 인쇄하며, 불편한 목소리를 토론회에 초대해 7분 발언으로 정리합니다.
정치는 관리가 아니라 진리 절차입니다
바디우는 철학의 네 조건을 말합니다. 정치, 사랑, 예술, 과학입니다. 이것들은 철학이 높은 자리에서 논평하는 주제가 아닙니다. 각각은 진리가 생산될 수 있는 절차입니다. 과학은 증명과 형식의 발명을 통해 진리를 만들고, 예술은 새로운 감각의 형식을 통해 진리를 만듭니다. 사랑은 하나가 아니라 둘의 자리에서 세계를 경험하게 하며, 정치는 집단적 평등의 진리를 생산합니다.
이 대목에서 바디우는 우리 시대에 꼭 필요하면서도 위험한 사상가가 됩니다.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오늘의 정치는 지나치게 자주 관리로 축소되기 때문입니다. 예산, 여론조사, 안보, 협상, 리스크 관리, 이해관계자 조정, 위기 대응의 언어가 정치를 대신합니다. 평등은 연설문 속에서는 환영받지만, 제도를 실제로 움직이는 원리로 들어오면 곧바로 부담스러운 것이 됩니다. 바디우는 정치라는 말에 잃어버린 무게를 돌려줍니다.
그러나 위험하기도 합니다. 모든 강렬한 정치적 열정이 진리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충실성은 언제든 광신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고통을 무시하고, 반대를 배신으로 몰고, 다양한 인간의 삶을 하나의 추상적 목표에 종속시킬 때 그렇습니다. 우리는 바디우를 존경하면서도 의심해야 합니다. 그의 철학은 합의의 답답함에 맞설 언어를 주지만, 사건의 이름으로 자신을 정당화하는 주체의 오만도 경계하게 만듭니다.
20세기는 이 문제를 피로 쓴 교과서처럼 보여주었습니다. 역사적 진리의 이름이 살아 있는 사람들을 짓누르는 장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정치적 진리라는 말을 모두 포기할 수도 없습니다. 그 순간 남는 것은 관리와 적응뿐입니다. 우리는 안전한 부정의를 택하면서 그것을 신중함이라고 부르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가능성의 언어는 때로 미래를 둘러싼 부드러운 통제선이 됩니다. 그 안쪽에서는 개혁을 말하고, 그 바깥쪽 사람들에게는 더 기다리라 말합니다.
바디우의 정치철학은 이 질서의 약한 곳을 정확히 건드립니다. 정치가 진리 절차라면, 정치는 대표, 통치, 여론 관리로 환원되지 않습니다. 정치적 사건은 계산되지 않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위치에서 보편적 원리를 선언할 때 발생합니다. 그것은 단지 더 큰 몫을 요구하는 이해집단의 협상이 아닙니다. 세계가 인간을 잘못 셌다는 선언입니다.
진리들은 세계 바깥이 아니라 세계 안에서 발생합니다
진리들의 내재성이라는 표현은 바디우 후기 사유의 핵심을 이룹니다. 특히 『진리들의 내재성』은 『존재와 사건』 3부작의 마지막 권으로, 바디우가 오랫동안 밀고 온 문제를 다시 정리합니다. 이 표현은 대담합니다. 왜냐하면 현대 사유가 자주 갈라놓는 두 가지를 함께 붙잡기 때문입니다. 진리들은 보편적입니다. 그러나 그 진리들은 언제나 구체적 세계 안에서 발생합니다.
만약 진리가 초월적이라면, 진리는 역사 바깥에서 내려오는 보증이 됩니다. 신, 자연, 절대정신, 영원한 질서 같은 이름을 빌릴 수 있습니다. 반대로 진리가 상대적 의견에 불과하다면, 모든 사건은 관점, 문화, 담론, 취향의 차이로 흩어집니다. 바디우는 두 길을 모두 거부합니다. 진리들은 구체적 절차 안에서 생산되기 때문에 내재적입니다. 그러나 진리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은 자신이 태어난 세계의 이해관계와 언어를 넘어서는 보편성을 지닙니다.
이 지점은 냉소를 지성으로 착각하는 시대에 꽤 불편한 힘을 가집니다. 우리는 모든 진리 주장이 권력을 숨긴다고 의심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 의심은 자주 옳습니다. 국가는 진리의 얼굴을 하고 명령합니다. 시장도 진리의 말투로 욕망을 조직합니다. 제도는 아주 차분한 목소리로 자기 이익을 보편적 합리성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의심이 전부가 되면, 약자는 자기 자리를 넘어설 수 있는 언어 하나를 잃습니다. 보편적 요구입니다.
증언은 중요합니다. 고통의 말하기는 지워진 삶을 다시 보이게 합니다. 그러나 증언이 보편화될 수 있는 요구와 만나지 못하면, 그것은 콘텐츠가 되거나 공감의 소비물이 되기 쉽습니다. 바디우가 복원하는 문장은 낡았지만 여전히 위험합니다. 어떤 진리들은 모두를 향합니다. 모두가 이미 동의해서가 아닙니다. 그 진리의 논리가 특정 집단의 소유물로 남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평등의 정치적 진리는 언제나 특정한 장소에서 시작됩니다. 특정한 몸들, 특정한 언어, 특정한 억압 속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리라면 그 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말의 의미를 다시 묻게 만듭니다. 진리들의 내재성이란 보편성이 아무 곳에도 속하지 않는 시선이 아니라, 어떤 곳에서 시작된 충실성이라는 뜻입니다.
바디우가 진리를 단수로 말하지 않고 복수로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철학은 대문자 진리 하나를 금고에 넣어 보관하지 않습니다. 진리들은 서로 다른 절차에서, 서로 다른 재료와 시간성을 가지고 발생합니다. 사랑의 진리는 정리처럼 증명되지 않습니다. 시의 진리는 정책처럼 표결되지 않습니다. 정치의 진리는 그림처럼 걸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철학은 이 서로 다른 진리들이 함께 사유될 수 있는지를 묻습니다. 그것이 철학의 몫입니다.
주체는 진리의 소유자가 아니라 위험한 지속입니다
현대 문화는 자기 자신이 되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자신을 표현하고, 선택하고, 관리하고, 최적화하라고 말합니다. 자아는 작은 개인 기업처럼 취급됩니다. 감정에도 브랜드가 붙고, 일상에도 성과표가 붙습니다. 바디우는 반대 방향으로 갑니다. 주체는 의미의 원소유자가 아닙니다. 주체는 사건에 대한 충실성 속에서 생겨납니다. 무엇인가가 일어났고, 그 결과를 계속 밀고 가야 한다고 결정할 때 주체가 됩니다.
이 말은 기적에 대한 맹목적 복종을 뜻하지 않습니다. 바디우의 충실성은 수동적 숭배가 아닙니다. 그것은 결과를 감당하는 능동적 노동입니다. 사건이 새로운 가능성의 이름이라면, 충실성은 지금 여기에서 그 가능성의 결과가 무엇인지 묻습니다. 이 상황에서, 이 압력 속에서, 이 사람들과 함께 무엇이 달라져야 하는지를 따집니다. 주체는 영웅의 조각상이 아닙니다. 주체는 아직 끝나지 않은 긴장입니다.
물론 위험은 남습니다. 누가 사건이 일어났다고 결정합니까. 충실성과 고집, 용기와 도취, 진리와 집단적 자기최면을 어떻게 구분합니까. 바디우의 대답은 엄격하지만 가혹합니다. 외부 보증은 없습니다. 사건은 옛 질서의 인증서를 받지 않습니다. 충실성에는 언제나 내기가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바디우는 우리를 고양시키면서 동시에 불안하게 만듭니다. 그는 존재하는 것에 복종하는 일이 윤리적으로 참담해지는 순간을 위한 철학을 주지만, 우리가 틀릴 위험까지 대신 제거해주지는 않습니다.
어쩌면 그 위험이 정치적 성숙의 비용일지도 모릅니다. 절대적 안전이 확인된 뒤에만 변화하겠다는 사회는 결국 아무것도 바꾸지 못합니다. 다만 지연의 표현만 세련되게 바꿉니다. 반대로 위험을 감수한다는 말을 결과를 무시할 허가증으로 쓰는 정치는 잔혹해집니다. 이 두 실패 사이에서 바디우는 위로도 사용 설명서도 주지 않습니다. 그는 다만 이렇게 요구합니다. 이미 존재하는 세계의 계산이 무엇이 참일 수 있는지를 미리 결정하게 두지 말라고.
실천적 지평은 배제된 계산을 듣는 일에서 시작됩니다
오늘 우리는 바디우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그의 모든 정치적 판단을 그대로 반복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건이라는 말을 모든 변화와 소란에 붙이는 것도 곤란합니다. 더 유용한 일은 작지만 엄격합니다. 우리가 속한 상황이 무엇을 세지 않는지 살피는 것입니다.
직장에서 효율이라 불리는 것이 피로와 의존, 돌봄과 두려움을 세지 않는 방식일 수 있습니다. 공론장에서 합의라 불리는 것이 이미 성숙하지 못한 의견으로 분류된 사람들을 배제하는 방식일 수 있습니다. 선거 정치에서 현실성이라 불리는 것이 평등을 구호로만 남기는 방식일 수 있습니다. 문화에서 가시성이라 불리는 것이 얼굴은 세되 권력은 건드리지 않는 방식일 수 있습니다.
바디우는 균열 자체를 숭배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기존 세계가 이미 셀 가치가 있는 모든 것을 세었다는 미신을 거부하라고 말합니다. 물론 그 거부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세심함, 책임, 살아 있는 사람을 아름다운 추상에 바치지 않으려는 고집과 함께 가야 합니다. 하지만 그 거부가 없다면 정치는 유지보수가 되고, 철학은 해설이 되며, 진리는 박물관의 낱말이 됩니다.
정치적 사건은 배제된 이들이 낡은 계산 안에 포함되기를 요구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그 계산 자체를 바꾸도록 강제할 때 시작됩니다.
이때 진리들의 내재성은 형이상학적 주장 이상이 됩니다. 그것은 주의를 기울이는 실천입니다. 진리들은 우리 세계 위에 떠 있지 않습니다. 만남, 증명, 작품, 집단적 선언 속에서 시작됩니다. 세계는 처음에 그것을 받아들일 문법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충실하다는 것은 유물을 보존하는 일이 아닙니다. 세계가 처음에는 불가능하다고 처리한 것을 위해 세계 안에 자리를 계속 만들어내는 일입니다.
에필로그: 세계의 계산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바디우를 읽은 뒤 우리가 얻는 것은 닫힌 결론이 아니라 단련된 불안입니다. 그의 철학은 아무것도 새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값싼 지혜에 쉬게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흥분을 진리라고 부르게 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우리를 더 어려운 자리에 세웁니다. 정치는 관리 이상이어야 하고, 철학은 우아한 체념 이상이어야 한다는 자리입니다.
세계는 늘 셉니다. 몸을 세고, 표를 세고, 비용을 세고, 위험을 세고, 조회 수와 생산량을 셉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질문은 그 계산이 무엇을 제외하는가입니다. 그 제외의 안쪽 어딘가에서 진리가 시작될 수 있습니다. 우리 위에서가 아니라, 역사 바깥에서가 아니라, 바로 여기에서. 아직 우리를 다 계산하지 못한 이 세계의 내재성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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