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Gilles Deleuze’s Difference and Repetition: Repetition as Creation, Not Copy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 반복은 복제가 아니라 생성이다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은 아주 사소해 보이는 의심에서 출발합니다. 혹시 우리는 세계를 생각하기 전에 먼저 알아보도록 훈련받은 것은 아닐까요. 얼굴을 보면 이름을 붙입니다. 사건을 만나면 분류합니다. 한 사람의 삶을 보면서도 묻습니다. 저 사람은 어느 범주에 들어가는가. 정신은 행정 창구처럼 빠르게 움직입니다. 접수하고, 분류하고, 승인하거나 반려합니다. 동일성이 먼저 오고, 차이는 그 뒤에 허가받은 변형처럼 들어옵니다.
이 습관은 편리합니다. 컵은 아침에도 컵이고, 길은 어제 걷던 그 길이며, 거울 속의 사람은 잠들기 전의 나와 같은 사람이라고 믿어야 하루가 굴러갑니다. 인식의 안정성이 없다면 일상은 너무 많이 흔들릴 것입니다. 그런데 들뢰즈는 바로 그 편리함이 어느 순간 형이상학이 되어버린 것은 아닌지 묻습니다. 동일성이 사물의 깊은 진실이 아니라, 생각이 생성을 피하기 위해 마련한 얇은 표면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측정하고, 등급을 매기고,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체계 속에서 살아가는 독자에게 들뢰즈는 난해한 프랑스 철학자의 이름으로만 남지 않습니다. 그는 첫 질문의 위치를 흔드는 사람입니다. 그는 표준화된 세계 안에서 어떻게 개성을 지킬 것인가를 묻기 전에, 왜 우리가 개성을 동일성의 언어로만 이해해야 한다고 믿었는지 되묻습니다.
1968년에 프랑스어로 출간된 『차이와 반복』이라는 제목은 차갑고 추상적으로 들립니다. 그러나 이 책은 피가 돌지 않는 개념의 창고가 아닙니다. 대학, 거리, 정치, 예술, 정신분석, 일상의 규범이 함께 흔들리던 시대에 쓰인 이 책은 선언문을 쓰지 않았습니다. 대신 더 조용하고 더 위험한 일을 했습니다. 가능한 것의 문법을 바꾸려 했습니다. 들뢰즈에게 생성은 동일성보다 먼저 옵니다. 차이는 같은 것에서 벗어난 예외가 아니며, 반복은 이미 있는 것의 무기력한 재등장이 아닙니다. 가장 깊은 차원에서 반복은 차이가 계속 자신을 밀고 나오는 방식입니다.
동일성의 오래된 법정은 차이에게 해명을 요구했습니다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는 철학사를 통해 철학에 들어갔지만, 과거의 사상가들을 유리장 안의 유물처럼 다루지 않았습니다. 흄, 니체, 베르그송,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칸트는 그에게 기존 사유의 압력을 느끼게 하는 지점들이었습니다. 『차이와 반복』에 이르러 들뢰즈가 겨냥한 것은 분명해집니다. 차이를 언제나 동일성 앞에 세워 심문하는 오래된 사유 습관입니다.
우리가 보통 말하는 차이는 이미 정체가 확정된 것들 사이의 관계입니다. 이 책상은 저 책상과 다릅니다. 이 시민은 저 시민과 다릅니다. 이 상품은 저 상품과 다릅니다. 이 문법은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자연스럽습니다. 먼저 식별 가능한 단위가 있고, 그다음 비교가 있으며, 그 뒤에 차이가 옵니다. 차이는 늘 늦게 도착합니다. 비교의 이름표를 달고 말입니다.
들뢰즈는 이 순서를 뒤집습니다. 그는 동일성 이전의 차이를 사유하려 합니다. 그것은 혼돈을 찬양하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체성들이 만들어지는 더 깊은 생성의 장을 보려는 시도입니다. 이름, 개념, 범주, 안정된 지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 지위가 달라집니다. 그것들은 더 이상 출발점이 아닙니다. 결과이고, 잠정적 멈춤이며, 더 깊은 차이화 과정 속에서 잠시 생겨난 배열입니다.
그래서 『차이와 반복』은 쉽게 요약되지 않습니다. 이 책은 낡은 틀 안에 새 의견 하나를 추가하지 않습니다. 무엇이 의견이고, 무엇이 개념이며, 무엇이 주체이고 대상인지를 미리 결정해온 틀 자체를 문제 삼습니다. 들뢰즈가 비판하는 것은 사유의 이미지입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진리를 사랑하고, 인식은 알아보기에서 시작되며, 오류만 피하면 되고, 양식은 현실을 적당히 나누어준다는 편안한 그림 말입니다.
그 그림은 우리를 기분 좋게 합니다. 이미 생각할 줄 알고 있으니 더 많은 정보만 얻으면 된다고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들뢰즈는 더 불쾌하고, 그래서 더 해방적인 말을 합니다. 생각은 알아보기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생각은 알아보기가 실패할 때 시작됩니다. 익숙한 범주로 줄이면 그것을 중요하게 만든 힘까지 사라져버리는 어떤 마주침 앞에서, 사유는 비로소 강제됩니다.
반복은 일반성이 아니다.
— 들뢰즈, 『차이와 반복』(1968)
이 유명한 첫 문장은 장식용 문구가 아닙니다. 일반성은 서로 바꿀 수 있는 사례들의 세계에 속합니다. 같은 노선의 버스 한 대는 다른 버스로 대체될 수 있습니다. 문서의 사본 하나는 다른 사본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일반성은 대체 가능성을 다룹니다. 그러나 들뢰즈에게 반복은 다릅니다. 반복은 대체될 수 없는 것과 관련됩니다. 되돌아올 때마다 그것이 나타나는 장 전체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생일은 반복되지만 그 생일을 맞는 사람은 이미 달라져 있습니다. 슬픔은 반복되지만 상처의 결은 변합니다. 구호는 반복되지만 거리, 경찰의 배치, 이전 패배의 기억, 사람들의 용기가 그것을 다른 사건으로 만듭니다.
반복은 같은 것의 귀환이 아니라 차이의 귀환입니다
현대 사회는 반복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반복을 부끄러워합니다. 우리는 비밀번호, 출근길, 소비, 운동, 뉴스, 선거의 드라마, 기능하는 사람처럼 보이기 위한 작은 의례들을 반복합니다. 그런데 공식 문화는 우리에게 독창적이 되라고 말합니다. 정해진 양식 속에서 개성을 판매합니다. 프로필을 고르고, 취향을 정리하고, 기기를 꾸미고, 승인된 차이의 시장 안에서 자신을 전시하라고 합니다.
이 대목에서 들뢰즈는 이상할 정도로 오늘의 철학자가 됩니다. 어떤 사회는 다양성을 찬양하면서도 생성을 감시할 수 있습니다. 삶의 선택지는 많아 보이지만, 실제로 정해진 경로에서 벗어날 조건은 더 좁아질 수 있습니다. 표면은 화려해지고, 밑바닥의 요구는 단단해집니다. 달라져도 됩니다. 다만 알아볼 수 있는 방식으로만 달라져야 합니다. 혁신해도 됩니다. 다만 지표를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만 혁신해야 합니다. 자신을 표현해도 됩니다. 다만 플랫폼, 회사, 제도, 가족의 기록이 이해할 수 있는 형식이어야 합니다.
들뢰즈의 반복은 이렇게 관리되는 새로움을 거부합니다. 반복은 똑같은 단위가 줄지어 서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의 특이성이 다르게 돌아오는 힘입니다. 여기서 니체의 영원회귀가 중요해집니다. 그것은 우주적 미신이 아니라 긍정의 시험에 가깝습니다. 되돌아오는 것은 세계의 동일한 내용이 아닙니다. 되돌아오는 것은 차이 자체의 힘, 삶이 선택하고 강도를 높이며 변형하는 능력입니다.
같은 악절을 몇 달 동안 연습하는 연주자를 떠올려보십시오. 바깥에서 보면 그는 같은 일을 반복합니다. 같은 음표, 같은 악기, 같은 의자, 어쩌면 벽 너머에서 매일 듣는 같은 이웃까지 있습니다. 그러나 연습은 복사가 아닙니다. 손이 달라지고, 귀가 달라지고, 악절은 처음에는 들리지 않던 긴장을 드러냅니다. 반복은 처음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연주자를 만들어냅니다. 같은 것은 겉옷이고, 생성은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어려운 기억을 다시 마주하는 사람도 그렇습니다. 기억은 반복되지만 순수한 복제품으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다른 언어, 다른 수치심, 다른 분노, 그 일을 견딘 어린 자신을 향한 다른 다정함과 함께 옵니다. 반복이 창조적일 수 있다는 말은 고통을 낭만화하자는 뜻이 아닙니다. 고통은 사람을 가두고, 깎아내리고, 삶의 폭을 좁힐 수 있습니다. 들뢰즈는 향기 나는 위로를 건네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반복조차 같은 것으로 환원하면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반복된 상처는 감옥이 될 수 있지만, 동시에 한 삶이 낡은 명령을 더 이상 따르지 않게 되는 자리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생성은 동일성보다 먼저 옵니다. 동일성은 어떤 것이 무엇인지를 말합니다. 생성은 그것이 무엇을 겪을 수 있는지, 무엇과 연결될 수 있는지, 어떤 문턱을 넘을 수 있는지, 어떤 힘을 감당할 수 있는지를 묻습니다. 동일성은 증명사진입니다. 생성은 그 사진을 계속 초과하는 삶입니다.
사유의 이미지는 사회적 장치가 되기도 합니다
들뢰즈를 세미나실 안에만 남겨두는 일은 너무 쉽습니다. 잠재성, 강도, 다양체, 초월론적 경험론 같은 말들은 분명 중요합니다. 그것들은 가능한 경험의 조건이 아니라 실제 경험이 생성되는 조건을 설명하려는 들뢰즈의 시도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면 들뢰즈는 얌전해집니다. 사유의 이미지는 철학의 문제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제도가 무엇을 합리적이고, 정상적이며, 고용 가능하고, 성숙하고, 생산적이고, 안전한 것으로 인정할지 미리 정할 때, 그것은 사회적 장치가 됩니다.
학교는 생각보다 알아보기를 더 자주 보상합니다. 좋은 답은 예상된 형식으로 도착한 답입니다. 회사는 창의성을 칭찬하지만 그것을 산출물로 바꾼 뒤에야 안심합니다. 공론장은 차이를 환영하는 듯 보이지만 익숙한 진영 안에 들어올 때에만 편안해합니다. 개인의 정체성마저 점점 더 저장되고, 검색되고, 평가될 수 있는 형식으로 처리됩니다. 자신을 명명하라, 자신을 브랜드화하라, 자신을 최적화하라. 자아는 등장하도록 초대받지만, 보관 가능한 형식으로 등장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범주가 쓸모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약자와 배제된 사람들은 상처를 보이게 만들기 위해 이름을 필요로 할 때가 많습니다. 이름 없는 권리는 침묵 속에서 사라집니다. 명명되지 못한 차별은 개인의 불운으로 처리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들뢰즈를 모든 정체성 주장을 조롱하는 데 동원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정치적으로 게으르고 윤리적으로 잔인한 일입니다. 더 정확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어떤 이름은 생성을 위한 공간을 열고, 어떤 이름은 삶에게 자기 파일을 닮으라고 명령하는 감옥이 되는가.
답은 추상적으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하나의 범주는 어떤 상황에서는 보호가 되고, 다른 상황에서는 구속이 됩니다. 흩어진 고통을 공적 언어로 모아주다가, 어느 순간 올바른 소속의 연기를 요구하는 규율로 굳어질 수도 있습니다. 핵심은 정체성을 비웃는 데 있지 않습니다. 정체성이 필요 없는 사람만 성숙하다는 태도야말로 특권의 다른 얼굴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정체성이 형이상학의 왕좌에 오르는 순간입니다. 정체성은 삶을 도와야 합니다. 삶이 정체성 앞에 무릎 꿇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들뢰즈의 잠재성이 중요해집니다. 잠재적인 것은 비현실적인 것이 아닙니다. 아직 현실화되지 않았지만 실제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실제 형식들이 생겨나는 가능성, 긴장, 관계, 특이점들의 장입니다. 아이는 작은 어른도 아니고 측정 가능한 특성들의 묶음도 아닙니다. 도시는 용도지역, 교통량, 부동산 가격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사회는 제도의 총합으로 소진되지 않습니다. 각각은 아직 억눌렸거나, 무시되었거나, 현실화되지 않은 변형의 선들을 품고 있습니다. 실제화된 동일성만 본다는 것은 현재의 배열을 현실 전체로 착각하는 일입니다.
권력은 실제화된 것을 좋아합니다. 그것은 셀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생성은 다스리기 어렵습니다. 고정된 바코드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혁신을 끝없이 말하는 사회도 진짜 변형은 두려워합니다. 새 상품은 원하지만 새로운 삶의 형식은 원하지 않습니다. 새 구호는 원하지만 존엄의 배분이 달라지는 것은 원하지 않습니다. 새 화면은 원하지만 결정하는 사람과 그 결정을 견디는 사람 사이의 관계가 바뀌는 것은 원하지 않습니다.
차이를 위계 없이 받아들이는 일은 예의 바른 다양성보다 어렵습니다
현대 제도가 좋아하는 값싼 차이가 있습니다. 홍보물, 기업 캠페인, 문화면 기사, 기념식 연설에 자주 등장하는 차이입니다. 모두 다르고 모두 환영받는다고 말하지만, 그 차이가 권력의 배치를 건드리지 않을 때에만 그렇습니다. 이것은 장식으로서의 차이입니다. 방의 조명은 좋아지지만 좌석 배치는 그대로입니다.
들뢰즈의 차이는 훨씬 성가십니다. 그것은 안정된 동일성에 덧붙는 매력적인 변주가 아닙니다. 정체성들을 만들고 다시 만드는 생산적 불균형입니다. 같은 것의 작은 취향으로 포함되기를 청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공식 어휘가 말을 더듬기 시작하는 자리에서 같은 것을 다시 묻습니다.
그래서 『차이와 반복』은 일탈마저 수익화하는 시대에 여전히 필요합니다. 시장은 차이를 스타일로 팔 수 있습니다. 행정은 차이를 인구통계의 항목으로 등록할 수 있습니다. 알고리즘은 차이를 선호 묶음으로 예측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성은 더 다루기 어렵습니다. 그것은 미리 알아볼 수 없었던 능력의 출현을 포함합니다. 소비자가 선택지를 고르는 일이 아닙니다. 선택하는 주체 자체가 달라지는 일입니다.
평생 정상적이 되라는 말을 들어온 사람에게 이 차이는 학술적 구분이 아닙니다. 정상성은 평화처럼 보이지만 조용한 세금을 요구합니다. 보이기 전에 억누른 몸짓, 들리기 전에 삼킨 문장, 받아들여질 만한 야망으로 번역된 욕망, 생산성으로 바뀐 슬픔이 그 세금입니다. 사회는 대개 노골적으로 다르지 말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더 예의 바르게 말합니다. 우리가 이미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만 다르라고 말입니다.
들뢰즈는 그 예의 속에 숨어 있는 폭력을 듣게 합니다. 그렇다고 모든 차이가 해방적인 것은 아닙니다. 어떤 차이는 경쟁과 허영과 고립을 키우기 위해 제조됩니다. 어떤 반복은 파괴적입니다. 어떤 생성은 잔인함으로 향합니다. 들뢰즈는 무슨 일이든 일어나기만 하면 좋다는 식의 성인이 아닙니다. 그의 철학은 아주 강한 의미의 분별을 요구합니다. 한 삶이 영향을 주고받는 능력을 넓히는 힘과, 그 능력을 줄이는 힘을 구별하는 능력 말입니다.
이것은 관용보다 더 어려운 윤리입니다. 관용은 종종 심판자의 자리를 그대로 둡니다. 나는 당신의 차이를 허용한다고 말합니다. 들뢰즈가 묻는 것은 심판자가 최초 정의권을 잃을 때 어떤 삶의 형식들이 가능해지는가입니다. 중심이 주변을 너그럽게 받아들이는지가 문제가 아닙니다. 주변이 중심의 필연성 자체를 의심하게 만드는지가 문제입니다.
실천의 자리는 느린 용기에서 열립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차이와 반복』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이 답을 거창한 계획으로 부풀릴 필요는 없습니다. 들뢰즈는 해방을 위한 다섯 단계 안내서를 주기 때문에 유용한 철학자가 아닙니다. 그런 코팅된 지혜는 컨설턴트들에게 맡겨도 충분합니다. 들뢰즈의 쓸모는 더 까다롭습니다. 그는 우리가 무엇을 알아차리는지를 바꿉니다.
우리는 알아보기를 생각의 최고 형식으로 대하는 모든 상황을 의심하는 데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회사가 어떤 아이디어가 기존 기준에 맞는지만 물을 때, 그 기준이 무엇을 배제하도록 만들어졌는지 물을 수 있습니다. 공론장이 모든 입장을 익숙한 진영으로 몰아넣을 때, 반복되는 논쟁 아래 아직 이름을 얻지 못한 문제가 있는지 살필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너무 빨리 설명하고 싶어질 때, 그 설명이 생성을 보호하는지, 아니면 현재의 도덕적 경제 안에서 고용 가능한 사람으로 남게 하는지 물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정치도 있습니다. 다만 정당 구호로 환원되는 정치는 아닙니다. 민주주의 사회가 그 이름에 값하려면 이미 인정된 정체성만 보호해서는 안 됩니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말, 관계, 노동, 돌봄, 예술, 거부의 형식이 나타날 조건도 보호해야 합니다. 권리는 중요합니다. 권리 없이 몸은 쉽게 다칩니다. 제도도 중요합니다. 약자는 시적인 가능성만으로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제도가 살아 있는 사람을 행정하기 쉬운 범주로 얼려버릴 때, 제도는 삶을 배반합니다.
따라서 들뢰즈의 교훈은 얇은 자기표현의 언어로 달라지라는 말이 아닙니다. 더 엄격한 요청입니다. 현재의 나, 현재의 사회, 현재의 사유가 존재할 수 있는 것들의 최종 법원인 척하지 못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생성은 취미가 아닙니다. 현실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노동입니다.
동일성은 세계를 알아볼 수 있게 해주기 때문에 편안합니다. 생성은 세계가 끝났다고 말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자유롭습니다.
반복한다는 것은 다르게 돌아온다는 뜻입니다
『차이와 반복』이 여전히 어려운 이유는 아주 오래된 안락함을 배반하라고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물이 먼저 있고, 그다음 변한다고 믿고 싶어합니다. 들뢰즈는 반대로 생각해보라고 말합니다. 사물은 이미 차이가 작동했기 때문에 비로소 그것으로 보이는 것일지 모릅니다.
읽힐 수 있는 사람이 되라는 부드러운 명령 아래 사는 우리에게 들뢰즈는 위로나 쉬운 반항을 주지 않습니다. 그는 더 날카로운 허락을 줍니다. 하루를 반복한다고 해서 반드시 같은 하루에 항복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름을 갖는다고 해서 그 이름에 붙은 정체성에 복종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범주 속에서 산다고 해서 가능한 것 전체를 범주에게 넘겨줄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 삶을 이루는 반복들 가운데 어떤 것은 우리를 같아지도록 훈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반복은 어쩌면 조용히 준비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언젠가 다르게 돌아오도록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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