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an Kang's Literary World: Why Is the World So Painful, and Yet So Beautiful?
한강의 문학세계: 세상은 왜 이렇게 고통스러우면서도 아름다운가?
지난해 1월, 한강(1970– )은 이사를 위해 창고를 정리하다 낡은 구두 상자 하나를 꺼냈습니다. 그 안에는 여덟 살 때 직접 스테이플러로 엮은 얇은 책자가 들어 있었고, 표지에는 연필로 그어진 두 개의 계단 모양 선이 있었으며, 뒤표지에는 1979년이라는 연도와 자기 이름이 또박또박 적혀 있었습니다. 그 안의 한 시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사랑이란 어디 있을까? 팔딱팔딱 뛰는 나의 가슴 속에 있지.” 그로부터 열 달 뒤, 스웨덴 한림원의 연단에 서서 세상이 왜 이토록 폭력적이면서도 아름다운지를 묻게 될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이미 그 여덟 살 아이의 서툰 글씨 속에 있었던 셈입니다.
이 장면에는 어떤 견딜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위대한 작가를 오랜 수련과 충분한 독서와 적절한 고통을 거친 뒤에야 자기 주제에 도달한 사람으로 상상합니다. 한강의 구두 상자는 다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질문들은 이미 거기 있었습니다. 그가 평생 매달리게 될 그 질문들이 책자 안에서 조용히 그를 기다리는 동안, 그가 막 떠나온 도시 광주에서는 학살이 준비되고 있었습니다. 1980년 1월 가족과 함께 광주를 떠난 지 넉 달이 지나지 않아 시민들이 곤봉과 총검과 총탄에 쓰러졌을 때, 그는 아홉 살이었습니다. 금실은 이미 자아져 있었습니다.
한강의 문학세계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청하지 않은 유산 하나를 받아 안는 일입니다. 고통과 아름다움은 서로 대립하는 두 사물이 아니라, 빛을 달리하여 들여다본 같은 물질이라는 확신이 그 유산의 이름입니다.
화해되지 않는 두 개의 질문
2024년 12월 스톡홀름에서 행한 노벨 강연 ‘빛과 실’에서, 한강은 수십 년간 자신의 글쓰기를 추동해온 두 문장을 정확히 호명했습니다. 그것은 구호가 아니었습니다. 선언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질문이었고, 끝내 해소되기를 거부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
— 한강, 『빛과 실』(2024)
그의 소설을 주의 깊게 읽어온 독자라면 알아챘을 것입니다. 한강의 장편들은 이 질문에 대답하지 않습니다. 그저 그 질문을 견딥니다. 같은 문장 안에, 같은 단락 안에, 때로는 같은 이미지 안에 양쪽을 함께 매달아 둡니다. 광주 상무관에서 한 소년이 총검에 찔리고, 그 시신 위에서 누군가 밝힌 촛불은 파르스름한 심장 같은 불꽃을 피웁니다. 손가락 두 마디를 잃은 여자가 서울의 병원에서 깨어나, 폭설 속 제주 산중턱 자신의 집까지 친구를 보내 한 마리 새를 살려달라 부탁합니다. 잔혹과 따뜻함은 늘 함께 도착하며, 어느 한쪽을 골라 안도할 여유를 독자에게 허락하지 않습니다.
비평가들은 이를 ‘서정적 폭력’이나 ‘시적 증언’이라 부르곤 합니다. 틀린 표현은 아니지만 약간 어긋나 있습니다. 한강의 산문에서 서정성은 폭력을 견딜 만하게 만들기 위해 위에 덧칠된 장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끝까지 외면하지 않기로 결심한 양심이 폭력으로부터 떠밀려 들어가게 되는 형식 그 자체입니다. 여기서 아름다움이란, 작가가 참혹의 회계사도 고통의 심미가도 되기를 거부했을 때 남는 무엇입니다.
광주, 제주, 그리고 산 자가 죽은 자에게 진 빚
한강 문학의 결정적 분기점은 2012년에 찾아왔습니다. 그는 ‘삶과 세계를 끌어안는 눈부시게 밝은 소설’을 쓰겠다고 결심하고, 투명한 감각들로 충전된 한 권의 책을 구상했습니다. 20페이지를 쓰고 그는 멈췄습니다. 자기 안의 무엇인가가 그 소설을 쓰지 못하게 한다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입니다. 그 무엇이란 광주였습니다. 열두 살에 우연히 펼쳐 본 비밀 사진첩 속, 1980년 5월에 공수부대에 의해 살해된 시민과 학생들의 사진이 그의 안에 ‘인간에 대한 근원적 의문’으로 새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가 한 일에는 가혹한 품격이 있습니다. 한강은 광주항쟁 생존자와 유족 9백여 명의 증언이 담긴 책을 구해, 한 달간 매일 아홉 시간씩 읽어 완독했습니다. 그리하여 태어난 소설 『소년이 온다』(2014)는 역사적 재구성이 아닙니다. 그보다 훨씬 낯선 것입니다. 도청 옆에서 살해된 열다섯 살 동호가, 한국어 제목의 현재형 동사 ‘온다’에 호명되어, 사십여 년이 억눌러온 애도의 시간을 가로질러 우리 쪽으로 걸어옵니다.
한강은 이 소설을 쓰는 동안 매번 새 공책의 첫 페이지에 두 문장을 적어 두었다고 밝혔습니다. 이십대 중반부터 그가 일기장마다 옮겨 적던 문장이었습니다.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는가?
— 한강, 『빛과 실』(2024)
마지막 밤까지 YWCA 건물에 남았다 살해된 야학 교사 박용준의 일기를 읽었을 때, 한강은 이 질문들을 거꾸로 뒤집어야 한다는 것을 벼락처럼 깨달았습니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문법이 바뀌자, 윤리의 우주 전체가 뒤집힙니다. 우리가 그들을 기억하고, 기리고, 가엾이 여긴다는 통상의 추모 순서가 무너지고, 훨씬 더 가혹한 무엇이 그 자리에 들어섭니다. 죽은 자들은 우리의 연민을 받는 자가 아닙니다. 그들이 바로 연민의 원천입니다.
이 전도(顚倒)야말로 한강의 작품을 역사적 참극을 다룬 여느 소설과 윤리적으로 구별짓는 지점입니다. 그리고 이 뒤집힘은 『작별하지 않는다』(2021)에까지 그대로 이어집니다. 작가 자신의 건축적 비유를 빌리자면, 이 소설은 폭설을 가로지르는 횡(橫)의 여정에서 시작해 1948년 겨울 제주 바다 깊은 곳으로 내려가는 종(縱)의 하강으로 이어집니다. 그 겨울, 제주 4·3 사건과 그 진압 과정에서 1만 명에서 3만 명에 이르는 민간인이 한국 군경과 우익 단체에 의해 학살되었습니다. 작가가 직접 밝혔듯 이 소설의 진짜 주인공은 인선의 어머니 정심입니다. 학살에서 살아남아 평생 사랑하는 사람의 뼛조각 하나라도 찾기 위해 싸워온 사람. “애도를 종결하지 않는 사람. 고통을 품고 망각에 맞서는 사람. 작별하지 않는 사람” 입니다.
이 거부야말로 한강의 문학세계가 품은 정치적 윤리입니다. 종결의 신속한 생산을 점점 더 보상해주는 문화 속에서, 슬픔조차 효율적이고 치유적이며 화폐화 가능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사회 속에서, 한강의 인물들은 끝내 효율적이기를 거부합니다. 그들은 바닷속 가장 깊은 곳에서도 촛불을 끄지 않습니다.
저항의 최소 단위로서의 몸
그렇다고 한강의 의미가 역사적 증언으로만 환원될 수는 없습니다. 그 증언의 무게가 아무리 절대적이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만 읽고 한강을 안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채식주의자』(2007), 『희랍어 시간』(2011), 『흰』(2016)에서 벌어지는 일을 놓치게 됩니다. 그곳의 폭력은 친밀하고 가정적이며 때로는 보이지 않는 폭력이며, 그곳의 저항은 증언이 아니라 몸 그 자체에 의해 수행됩니다.
『채식주의자』의 영혜는 어느 날 꿈을 꾼 뒤 고기를 거부합니다. 거부는 확장됩니다. 그는 음식을 거부합니다. 말을 거부합니다. 마침내는 인간이라는 범주 자체를 거부합니다. 가족들은 점증하는 폭력으로 응답합니다. 아버지는 그의 입에 고기를 밀어 넣고, 남편은 등을 돌리며, 형부는 그의 몸을 미적 대상으로 변환합니다. 한강이 이 소설을 추동한 질문들을 회고하며 적은 문장은 단단한 정확성을 지닙니다. 한 인간이 완전하게 결백한 존재가 되는 것은 가능한가? 우리는 얼마나 깊게 폭력을 거부할 수 있는가? 그걸 위해 더 이상 인간이라는 종에 속하기를 거부하는 이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이 질문들은 다른 무엇의 은유가 아닙니다. 몸이 일상의 평범한 잔혹들에 더는 가담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정제되지 않은 채 떠오르는 그 질문 자체입니다. 영혜의 침묵은 병리(病理)가 아닙니다. 그것은 판결입니다. 소설은 그의 길을 추인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장면을 굳이 앰뷸런스 안으로 설정한 것은, 서사의 논리를 거슬러서라도 그를 살려두려 한 작가의 선택이었습니다. 그러나 소설은 그를 병리화하지도 않습니다. 몸이 더 이상 못 하겠다고 결정했을 때 몸이 하는 말을, 소설은 그저 끝까지 듣습니다.
역사적 증언의 작품들과 신체적 거부의 작품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은, 저항의 최소 단위가 구호나 시위가 아니라 숨 쉬고 죽어가며 감각하는 한 사람의 몸이라는 확신입니다. 한강은 자신의 몸으로 쓴다고 말했습니다. 맛, 추위, 따뜻함, 심장 박동, 맞잡은 손. 이것들은 문학적 장치가 아닙니다. 언어라는 전류가 독자에게 흘러 들어가는 통로 그 자체입니다. 여덟 살의 그가 이름 붙인 금실이, 지금도 그렇게 자아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노벨 이후, 기억하기를 거부하는 나라에서
2024년 10월 10일, 스웨덴 한림원이 한강에게 노벨문학상을 수여했을 때 — 한국 작가 최초이자 아시아 여성 최초의 수상이었습니다 — 한국 사회의 반응이 한결같이 축하 일색은 아니었습니다. 며칠 만에 일부 보수 논객과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익숙한 문장들이 다시 회자되기 시작했습니다. 『소년이 온다』가 광주의 역사적 사실을 왜곡한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선전물이다, 이번 수상은 정치적이다. 5·18기념재단은 다시 고개를 든 폄훼 발언들을 공개적으로 규탄했습니다. 2025년 2월, 『작별하지 않는다』의 영문판 We Do Not Part가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 소설 부문을 수상했을 때에도 같은 패턴이 반복되었습니다.
한강의 문학세계는 바로 이런 맥락 속에서 다시 읽혀야 합니다. 그의 소설들은 평온한 문학 공화국에 도착한 것이 아닙니다. 누가 누구를 얼마나 오래 애도해도 되는지가 국가와 미디어와 알고리즘에 의해 여전히 적극적으로 다투어지는 사회 한복판에 도착한 것입니다. 그런 사회에서 죽은 자를 끝내 버리지 않겠다는 문장 하나를 쓰는 행위는, 작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그 자체로 정치적 입장이 됩니다.
한강은, 우리가 가진 모든 증거로 미루어 볼 때, 그것을 의도했습니다. 세계적 조명의 한가운데 선 스톡홀름의 강연은 조도를 낮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광주를 호명했습니다. 제주를 호명했습니다. 박용준을 호명했습니다. 문학이 마땅히 해야 하지만 갈수록 드물게만 행하는 일을, 그는 했습니다. 권력이 침묵 속에 두고 싶어 하는 이름들을 불러냈고, 목소리를 높이지 않은 채 그렇게 했습니다.
사랑이 거기에 무슨 상관이 있는가
강연에는 또 하나, 주목할 만한 대목이 있습니다. 마지막 부근에서 한강은 자기 자신의 작품 해석에 대해 최근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고 고백했습니다. 수십 년 동안 그는 자신의 핵심 질문이 폭력적인 세계와 아름다운 세계라는 두 문장이라고 믿어왔습니다. 그러나 수상 2~3년 전부터 그 아래에 다른 무엇이 있다는 의심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다시 구두 상자 속 여덟 살 아이의 시로 돌아갔습니다.
첫 소설부터 최근의 소설까지, 어쩌면 내 모든 질문들의 가장 깊은 겹은 언제나 사랑을 향하고 있었던 것 아닐까? 그것이 내 삶의 가장 오래고 근원적인 배음이었던 것은 아닐까?
— 한강, 『빛과 실』(2024)
이것은 보기보다 감상적인 발견이 아닙니다. 한강이 말하는 사랑은 다정함이 아닙니다. 그것은 고통을 가능하게 하는 실체입니다. “사랑에서 고통이 생겨나고, 어떤 고통은 사랑의 증거인 것일까?”라고 그는 묻습니다. 만약 그 대답이 그렇다라면 — 그리고 그의 작품 전체가 그렇다고 답하고 있다면 — 세상은 왜 이토록 고통스러운가라는 질문과 세상은 어떻게 이토록 아름다운가라는 질문은 사실 두 개의 질문이 아닙니다. 양면에서 동시에 던지는 하나의 질문입니다.
우리가 아파하는 것은 우리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애도하는 것은 우리가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여덟 살의 그가 사람과 사람의 가슴 사이를 잇는다고 본 그 금실은, 제주 바닷속에서 다음 심지로, 다음 심장으로 옮겨 타며 여행하는 촛불들의 그 실과 같은 실입니다. 한강을 읽는다는 것은, 현대적 삶의 구조가 우리에게 잊으라고 끊임없이 압박해 오는 그 실이, 아직 끊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떠올리는 일입니다.
이 페이지들을 따라 한강과 함께 걸어온 독자들이라면, 어느 지점에선가 책을 잠시 내려놓고서 처음 예정했던 속도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기 쉽습니다. 이것은 효율의 실패가 아닙니다. 그것은 실이 자기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문장들 앞에서 느끼는 통증은, 작가 자신이 시사하듯, 우리가 아직 그 이름으로 부르기를 결심하지 않은 어떤 것의 증거입니다.
세상은 여전히 폭력적입니다. 촛불은 여전히 켜져 있습니다. 둘 중 어느 쪽이 당신의 주의(注意)를 조직하도록 허락할 것인가 — 그의 문학이 강요 없이, 다만 가만히, 당신의 손에 쥐어주는 질문은 결국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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