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Lee Jae-myung's Pragmatism: From Ideology Wars to Trust Politics
이재명의 실용주의: 이념의 전쟁터에서 신뢰의 정치로
한 나라가 지치는 순간은 경제가 느려질 때만 오지 않습니다. 모든 공적 질문이 같은 진영의 언어로 끌려가고, 삶의 문제마저 먼저 편을 가르라는 요구를 받을 때 사회는 더 깊이 지칩니다. 공장 폐쇄, 병원 부족, 주거 불안, 청년 노동자의 막막함은 본래 수리를 요구하며 등장합니다. 그런데 한국 정치의 오래된 습관은 그것들을 금세 이념 대결의 경기장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이런 공기 속에서 이재명 대통령의 실용주의는 정치적 힘을 얻었습니다. 그 힘은 '실용'이라는 단어가 온건하게 들리기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닙니다. 온건함도 때로는 책임 회피의 정중한 말투가 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시민들이 이제 정치의 목소리 크기보다 정치가 실제 삶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지를 묻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오랫동안 정치를 지켜본 시민들은 이 피로를 압니다. 어떤 사안이든 충성심 검사로 바뀌고, 어떤 질문이든 적과 우리 편을 먼저 가르는 습관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재명의 실용주의를 둘러싼 핵심 질문은 이것입니다. 그것은 편리한 구호입니까, 아니면 권력이 명령하기 전에 듣고, 자랑하기 전에 검증하며, 박수보다 결과로 신뢰를 얻도록 만드는 민주주의의 훈련입니까?
실용주의는 이념의 공연 비용이 너무 커진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이재명 대통령(1964– )은 심각한 민주주의의 긴장 뒤에 권력을 맡았습니다. 2025년 조기 대선은 전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와 탄핵, 그리고 그 이후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치러졌습니다. 그 선거에서 시민들이 원한 것은 단순히 국가를 운영할 새 관리자를 고르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고함치는 정치 이후에 다시 작동하는 국가, 진영의 언어보다 삶의 문제를 먼저 듣는 정부, 그리고 즉각적인 용서를 요구하지 않으면서 무너진 신뢰를 천천히 복구할 공적 질서였습니다. 취임 1년을 앞둔 지금, 이재명의 실용주의는 박수를 기다리는 약속이 아닙니다. 검증 앞에 선 주장입니다.
이 맥락이 중요합니다. 실용주의는 자주 오해됩니다. 허약한 정치 언어 속에서 실용주의는 '되는 대로 하자'는 말로 축소됩니다. 권력자의 입에서는 더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일관성 부족을 유연성으로 포장하고, 원칙의 실종을 성과라는 이름으로 덮으며, 공적 윤리를 실적표처럼 다루는 방식 말입니다.
그러나 깊은 의미의 실용주의는 그런 기회주의가 아닙니다. 퍼스, 제임스, 듀이로 이어지는 실용주의 전통은 생각이 실제 경험 속에서 어떤 차이를 만드는지를 물었습니다. 신념은 머릿속 장식품이 아니라 행위 속에서 검증되는 약속입니다. 기회주의는 '지금 내게 무엇이 유리한가'를 묻습니다. 실용주의는 '이 결정의 결과를 살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무엇이 남는가'를 묻습니다.
이재명 대통령의 취임사는 이 차이를 정치적으로 드러냈습니다. 그는 통합과 유연한 실용 정부를 말했고, 낡은 이념은 역사의 박물관으로 보내자고 했습니다. 진보 의제와 보수 의제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의제와 대한민국의 의제가 있을 뿐이라는 취지였습니다. 문장은 깔끔합니다. 하지만 진짜 시험은 박수가 끝난 뒤 시작됩니다. 예산이 깎이고, 규제가 바뀌고, 누군가의 고통이 긴급한 문제인지 미룰 수 있는 문제인지 분류되는 그 조용한 방에서 말입니다.
실용주의가 민주주의가 되려면, 정책의 비용을 감당하는 사람들이 성과의 의미를 함께 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과는 위에서 내려오는 아름다운 말에 머뭅니다.
경청의 정치는 부드러움이 아니라 제도의 지능입니다
경청을 감상적인 덕목으로 취급하려는 유혹이 있습니다. 정치인은 시장을 돌고, 간담회를 열고, 카메라가 포착할 수 있는 시간만큼 시민 옆에 앉으며 자신이 듣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 장면이 무의미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정치에서 경청은 민원을 들었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현실과 접촉한 뒤 제도가 자기 행동을 바꿀 수 있는 능력입니다.
듀이는 이 점을 누구보다 예민하게 보았습니다. 그는 『공중과 그 문제들』에서 민주주의가 홍보가 아니라 소통에 기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흩어진 시민들이 자신들이 함께 놓인 상황을 알아차리게 하는 조건이 바로 소통이라는 뜻입니다.
오직 소통만이 거대한 공동체를 만들 수 있습니다.
— 존 듀이, 『공중과 그 문제들』(1927)
이 문장은 모든 정부 홍보실을 긴장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민주주의는 결정을 크게 방송한다고 완성되지 않습니다. 소통은 국가가 시민에게 복종할 만큼 크게 말하는 일이 아닙니다. 경험, 증거, 반론, 수정이 오가는 어려운 과정입니다. 시민은 박수칠 타이밍을 기다리는 관객이 아닙니다. 시민은 정책 결과의 공동 소유자입니다.
그러므로 이재명 대통령이 말하는 경청과 통합은 무거운 철학적 부담을 집니다. 진심으로 듣는다면, 그것은 지지자만 편안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를 찍지 않은 사람, 진보 정부를 불안해하는 사람, 보수 권력 아래에서 다친 사람, 어느 진영의 구호에도 깔끔하게 들어맞지 않는 요구까지 들어야 합니다. 지지자의 확신만 되돌려주는 경청은 경청이 아닙니다. 선거 로고가 붙은 거울입니다.
이 요구의 사회적 배경은 선명합니다. OECD의 2024년 공공기관 신뢰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은 타인, 국제기구, 경찰보다 중앙정부를 덜 신뢰했습니다. 중앙정부에 대한 신뢰는 37퍼센트였습니다. 민주주의는 낮은 지지율을 견딜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민들이 공공기관이 구조적으로 귀가 어둡다고 느끼는 상태에서는 오래 건강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 신뢰의 정치의 더 날카로운 의미가 있습니다. 신뢰는 지도자에 대한 호감이 아닙니다. 성공적인 연설이 만든 따뜻한 기분도 아닙니다. 신뢰는 제도가 예측 가능하게 행동하고, 실수를 보이게 고치며, 부담을 시민이 납득할 수 있는 방식으로 나눌 때 생기는 공적 습관입니다. 만들기는 느리고, 깨지기는 빠르며, 오만함에는 알레르기처럼 반응합니다.
민생의 정치란 작아 보이지만 가장 어려운 정치입니다
'민생 정치'라는 말은 수수하게 들립니다. 행정 문서에서 막 걸어 나온 단어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바로 그래서 중요합니다. 현대 정치의 볼거리는 거대한 정체성 갈등을 좋아합니다. 임대료, 돌봄, 빚, 의료 접근성, 지역 쇠퇴, 노동 불안, 교육 격차를 해결하는 것보다 훨씬 싸게 먹히기 때문입니다. 이념 대결은 저녁 뉴스 전에 적을 만들어냅니다. 민생 정치는 버스 노선, 병원 당직, 어린이집 대기, 연금 불안을 고쳐야 합니다. 게다가 시민을 배경 인물로 세우지 않고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재명의 실용주의도 바로 이 수준에서 평가받을 것입니다. 좌우의 정책을 뷔페처럼 골라 담는다면, 그것은 곧 등뼈 없는 상표가 됩니다. 박정희 시대의 정책이든 김대중 시대의 정책이든, 대통령 책상 위에 함께 놓였다고 해서 곧바로 지혜가 되지는 않습니다. 정당성은 누가 이익을 얻고, 누가 비용을 치르며, 어떤 권리가 보호되고, 가장 약한 사람이 강한 사람이 말하는 유연성의 불확실성을 대신 떠안지 않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여기서 진보적 실용주의는 자기 절제를 보여야 합니다. 시장을 중립적 심판처럼 숭배해서는 안 됩니다. 시장은 대체로 더 많은 힘을 가지고 들어온 사람의 말을 더 선명하게 전달합니다. 그렇다고 국가를 숭배해서도 안 됩니다. 관료적 자신감은 자신이 보호한다고 말하는 삶을 도리어 납작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과제는 더 어렵습니다. 공공 권력은 시장의 잔인함을 고칠 만큼 반응적이어야 하고, 행정의 허영을 피할 만큼 절제되어야 하며, 때로는 시민이 공무원보다 문제의 질감을 더 잘 안다는 사실을 인정할 만큼 겸손해야 합니다.
한국 정치에는 희극에 가까운 비극이 있습니다. 모든 진영이 서민을 대표한다고 말하지만, 서민은 자주 사진 속 배경으로만 등장합니다. 세금 이야기가 나오면 자영업자가 등장하고, 일자리 이야기가 나오면 청년 노동자가 등장합니다. 교육 이야기가 나오면 부모가, 복지 이야기가 나오면 장애인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카메라가 지나가면 제도는 다시 자기들만의 전문 용어로 말하기 시작합니다. 이재명의 실용주의가 의미를 가지려면, 그 삶들을 촬영 이후에도 회의실 안에 남겨두어야 합니다.
실용 정치의 기준은 덜 이념적으로 들리는가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 감수해야 하는 모멸의 양을 줄였는가입니다. 지표는 좋아졌는데 시민이 도움을 요청할 때마다 부끄러움을 느낀다면, 그것은 정의가 아니라 관리입니다.
위험도 있습니다, 책임 없는 실용주의는 세련된 통제가 됩니다
이재명 대통령을 낭만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민주주의적 글쓰기는 팬덤의 본능을 경계해야 합니다. 현대 정치사에는 이념의 경직성을 비판하며 등장했다가 결국 시민에게 자신의 판단을 믿으라고 요구한 지도자들이 많았습니다. 실용주의는 결과를 숙의에서 떼어낼 때 위험한 언어가 됩니다. 그때 지도자는 이렇게 말하는 셈입니다. 너무 많이 묻지 마십시오. 작동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편한 신발을 신은 행정 편의주의입니다.
위기 이후에는 이 위험이 더 커집니다. 큰 충격을 견딘 사회는 정상성을 그리워합니다. 시민은 고함이 멈추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고함이 멈춘 뒤의 조용함이 곧 신뢰는 아닙니다. 때로 그것은 피로입니다. 때로는 위기가 충분히 화제가 되지 않으면 기관이 듣지 않는다는 사실을 배운 사람들의 침묵입니다.
그래서 이재명 대통령의 실용주의는 인기에 기대지 않는 절차와 결박되어야 합니다. 공개 데이터, 투명한 평가, 필요한 영역의 참여 예산, 반대 의견을 내는 공무원 보호, 노동자와 소상공인에 대한 실질 협의, 다수의 기분에 좌우되지 않는 소수자 권리, 정책 전환의 명확한 기준은 장식용 개혁이 아닙니다. 그것은 경청하는 척과 공적 방법으로서의 경청을 가르는 차이입니다.
야당도 시험대 위에 있습니다. 모든 실용적 시도에 자동 반대만 한다면, 야당은 자신이 비판하는 전쟁터를 다시 만드는 데 기여하게 됩니다. 비판은 필요합니다. 방해가 정치의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민주적 야당은 약한 근거, 불공정한 부담, 숨은 수혜자, 권리 침해를 드러내야 합니다. 국가의 실패가 다음 선거의 자산이 되기를 은근히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시민의 고통이 상대 진영을 망가뜨릴 수 있다는 이유로 반가워하는 정치 계급만큼 품위 없는 장면도 드뭅니다.
신뢰의 정치는 그래서 두 방향의 전환을 요구합니다. 정부는 승리가 경청 중단 허가증이 아님을 배워야 합니다. 야당은 패배가 책임 포기 허가증이 아님을 배워야 합니다. 시민도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는 방 안에서 가장 분노한 문장에만 보상을 주는 습관을 멈추어야 합니다. 민주주의는 투표가 붙어 있는 고함 대회가 아닙니다.
신뢰를 만드는 실용은 어떤 모습이어야 합니까
이재명의 실용주의가 구호에서 구조로 이동하려면 몇 가지 습관이 보여야 합니다. 첫째, 정책은 이념 딱지가 아니라 삶이 막히는 지점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주거 정책이라면 불안이 어디에 쌓이는지 물어야 합니다. 보증금, 월세, 통근 거리, 학교 접근성, 투기 수요, 노년 빈곤, 청년 부채가 모두 다르게 얽혀 있습니다. 당의 이름은 박수를 설명할 수는 있어도 문제를 설명하지는 못합니다.
둘째, 정부는 실패를 연극적 수치심 없이 보고해야 합니다. 성숙한 민주주의는 지도자가 오류 없는 존재이기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오류가 신념으로 굳어지기 전에 방향을 고치라고 요구합니다. 오류 가능성을 받아들이지 않는 실용주의는 더 세련된 고집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과는 약함이 아닙니다. 제대로 쓰일 때 사과는 공적 학습의 장치입니다.
셋째, 신뢰에는 공정한 고통이 필요합니다. 모든 전환은 손실을 만듭니다. 정직한 정치는 그 손실을 일찍 말합니다. 기후 정책, 산업 재편, 재정 개혁, 의료 개혁, 지역 발전 중 어느 것도 고통 없는 현대화로 팔 수 없습니다. 비용을 숨기면 그것은 원망으로 돌아옵니다. 투명하게 나누면 여전히 다툼은 남겠지만, 적어도 다툼은 더 단단한 토대 위에서 벌어집니다.
마지막으로 경청은 가장 잘 들리지 않는 사람들을 포함해야 합니다. 부유한 사람에게는 변호사, 협회, 자문가, 동문 네트워크, 정책 언어가 익숙한 식탁이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에게는 대기실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주민에게는 번역의 장벽이 있습니다. 장애 시민에게는 접근할 수 없는 사무실이 있습니다. 청년에게는 어른들이 기분을 채굴하면서도 판단으로 존중하지 않는 플랫폼이 있습니다. 이름값을 할 만한 신뢰의 정치는 공식 대화에 쉽게 들어오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통로를 설계해야 합니다.
실용주의는 권력의 자기 절제일 때 민주주의가 됩니다
이재명의 실용주의가 가장 좋은 형태를 얻는다면, 그것은 신념 없는 정치가 아닐 것입니다. 결과로 훈련된 신념의 정치가 될 것입니다. 평등은 제도 속에서 체감되어야 하고, 자유는 절차 속에서 보호되어야 하며, 성장은 보기 좋은 그래프가 아니라 넓어진 삶으로 평가되어야 합니다. 통합은 다친 사람에게 더 예의 있게 아프라고 요구하는 말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념의 전쟁터에서 신뢰의 정치로 이동하는 일이 어려운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념은 정체성을 줍니다. 신뢰는 기억을 요구합니다. 시민은 지난 개혁의 비용을 누가 냈는지, 위험을 경고했을 때 누가 조롱했는지, 상의 없이 희생을 요구받은 사람이 누구였는지 기억합니다. 정치적 신뢰는 대통령의 입에서 태어나지 않습니다. 공적 결정이 시민을 누군가의 역사적 임무를 위한 재료로 취급하지 않을 때 태어납니다.
이재명 대통령은 실용주의라는 언어로 하나의 문을 열었습니다. 그 문이 민주주의의 회복으로 이어질지, 더 효율적인 명령 방식으로 이어질지는 앞으로의 행동이 결정합니다. 가능성은 있습니다. 위험도 있습니다. 듣는 정치는 상처 입은 공화국을 다시 세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들었다'고 말하기만 하는 정치는 귀 어두움을 더 세련되게 만들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실용주의라는 단어를 칭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단어를 그 자신의 기준으로 붙드는 일입니다. 이재명의 실용주의가 이념 대결의 온도를 낮추고, 효율이라는 이름으로 약자를 희생시키지 않으며, 정부가 건드리는 삶 앞에서 책임지게 만든다면 그것은 진지한 민주주의의 실천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피로한 공화국에 하나 더 추가된 유창한 문장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신뢰의 정치는 권력이 경청을 선거용 몸짓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부과한 영구적 한계로 받아들일 때 시작됩니다. 시민이 요구해야 할 약속도, 이 정부를 평가해야 할 기준도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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