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gogo Chimpanzee War and Chimpanzee Politics 2.0: Division and Human Society
은고고 침팬지 전쟁이 보여주는 침팬지 폴리틱스 2.0: 분열의 정치와 인간 사회
숲속의 침팬지 순찰대에는 깃발이 없습니다. 선언문도 없고, 외교부 대변인도 없고, 다음 공격이 왜 불가피한지 설명하는 생중계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간다 키발레 국립공원의 은고고 침팬지 전쟁을 오늘의 뉴스와 나란히 놓으면 묘한 기시감이 생깁니다. 우크라이나의 방공 사이렌, 이란과 이스라엘 사이의 미사일 경보, 미국 정치 집회장에서 울리는 “진짜 국민”의 구호가 한 장면 안으로 밀려 들어옵니다.
물론 조심해야 합니다. 침팬지가 우크라이나 전쟁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침팬지가 이스라엘-이란 전쟁을 낳은 것도 아닙니다. 대안우파와 트럼프 현상은 영장류 행동학으로 환원될 수 없습니다. 생물학은 역사의 면죄부가 아닙니다. 그러나 은고고 사건은 하나의 불편한 병치를 가능하게 합니다. 사회가 갈라지고, 경계가 굳어지고, 어제의 이웃이 오늘의 적으로 바뀌는 과정을 매우 원초적인 장면으로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은고고가 우리에게 묻는 것은 “인간도 침팬지일 뿐인가”가 아닙니다. 그런 문장은 쉽고 위험합니다. 더 아픈 질문은 이것입니다. 인간은 법, 언어, 외교, 재판, 인권, 기억의 제도를 가졌는데도 왜 자꾸 ‘우리와 그들’의 숲으로 되돌아가는가.
인간 정치의 비극은 동물성과 닮았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비극은 그 동물성을 제어할 장치를 가지고도, 분열을 팔아 권력을 얻는 자들에게 너무 자주 박수를 보낸다는 데 있습니다.
은고고의 충격은 전쟁의 발견이 아니라 소속의 파열입니다
2026년 Science에 실린 연구는 은고고 침팬지 공동체에서 드문 영구적 분열이 일어났다고 설명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것으로 알려진 야생 침팬지 집단이 2015년 무렵 응집 상태에서 양극화로 이동했고, 2018년에는 두 개의 뚜렷한 집단으로 갈라졌습니다. 이후 7년 동안 한쪽 집단은 다른 집단을 24차례 공격했고, 적어도 성체 수컷 7마리와 새끼 17마리가 죽었습니다.
그러나 숫자보다 더 무거운 것은 그 이전의 관계입니다. 이들은 언제나 낯선 적이 아니었습니다. 은고고 침팬지 프로젝트의 장기 관찰에 따르면, 이 침팬지들은 1998년부터 2014년까지 하나의 거대한 공동체로 지냈습니다. 같은 숲을 오갔고, 서로의 몸짓과 서열과 접촉의 기억을 공유했습니다.
그러다 흐름이 바뀌었습니다. 서부와 중앙 하위 집단 사이의 접촉은 줄고, 회피는 늘었습니다. 공동체 안의 거리는 점점 사회적 사실이 되었습니다. 2018년에는 일시적 분리가 아니라 별도의 집단과 영토가 나타났습니다. 어제까지 완전히 남이 아니었던 존재들이 오늘의 외부자가 된 것입니다.
침팬지 폭력 자체가 새로운 발견은 아닙니다. 제인 구달의 곰베 연구는 이미 1970년대에 침팬지 사이의 치명적 갈등을 학계 앞에 세웠습니다. 이후 연구들도 영토 순찰과 집단 공격을 다루었습니다. 은고고의 새로움은 더 좁고, 그래서 더 불편합니다. 그것은 과거의 소속이 어떻게 적대로 바뀌는지를 보여줍니다.
침팬지 폴리틱스 2.0은 동맹의 정치가 분열의 정치로 넘어가는 장면입니다
프란스 드 발(Frans de Waal, 1948–2024)의 『침팬지 폴리틱스』는 침팬지 사회를 단순한 힘의 세계로 보지 않았습니다. 우두머리는 몸집만으로 자리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동맹을 만들고, 관계를 고치고, 경쟁자를 살피고, 지지를 확보해야 했습니다. 권력은 근육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유지되었습니다.
그것이 첫 번째 교훈이었다면, 은고고 사건은 두 번째 교훈을 제시합니다. 정치는 집단 안에서만 일어나지 않습니다. 정치는 누가 집단 밖으로 밀려나는가에서도 일어납니다. 공동체가 갈라지는 순간, 질문은 “누가 위에 서는가”에서 “누가 아직 우리인가”로 바뀝니다.
그래서 침팬지 폴리틱스 2.0이라는 말은 장난스러운 제목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그것은 분석의 이동을 뜻합니다. 집단 내부의 서열에서 집단 사이의 경계로, 동맹의 기술에서 배제의 정치로, 권력의 경쟁에서 적대의 생산으로 이동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합니다. 인간은 분열을 말로 꾸밉니다. 기록하고, 방송하고, 슬로건으로 만들고, 법률 문서와 역사 서사 속에 배치합니다. 침팬지는 적대를 수행하지만, 인간은 적대에게 품위 있는 이름을 붙입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인간 정치의 책임은 더 무거워집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경계 만들기가 제국의 언어가 될 때를 보여줍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침팬지의 싸움이 커진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명령 체계, 선전, 외교, 국제법, 전쟁범죄 책임이 얽힌 인간의 전쟁입니다. 브리태니커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침공과 병합에서 시작해, 2022년 2월 24일 전면 침공으로 확대된 전쟁으로 정리합니다.
여기서 은고고와 병치되는 것은 폭력의 규모가 아니라 재분류의 언어입니다. 우크라이나는 이웃 주권국가로 존중받기보다 제국적 기억, 안보 공포, 역사적 소유권의 말 속에서 다시 규정되었습니다. 러시아는 전면 침공을 “특별군사작전”으로 불렀고, “탈나치화”라는 표현으로 침략을 도덕적 임무처럼 포장했습니다.
이 대목에서 침팬지와 인간의 차이는 결정적입니다. 침팬지는 침공을 보호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영토 공격을 역사적 운명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웃을 이웃이 아니었다고 설득하기 위해 방송국과 교과서와 외교 문장을 동원하지 않습니다. 인간만이 그렇게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 전쟁은 더 많은 책임을 져야 합니다. 경계는 먼저 말 속에 생깁니다. 그다음 지도 위에 나타나고, 마지막에는 폐허와 난민과 무덤 속에 남습니다. UNHCR은 러시아의 전면 침공 이후 수백만 명의 우크라이나인이 피란과 국내 실향을 겪었다고 보고했습니다. 전쟁의 언어는 결국 집과 학교와 병원과 발전소에 도착합니다.
이스라엘-이란 전쟁은 공포와 보복이 첨단기술의 얼굴을 얻은 장면입니다
2025년 6월의 이스라엘-이란 전쟁은 또 다른 현대성을 보여줍니다. 브리태니커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2025년 6월 13일 이란의 핵시설, 군사시설, 정권 기반 시설을 겨냥한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미국은 포르도, 나탄즈, 이스파한의 핵 관련 시설을 공격했고, 6월 24일 휴전이 발표되었습니다. 국제원자력기구는 핵시설 공격이 핵 안전, 안보, 안전조치, 지역 평화에 중대한 위험을 줄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이 사건도 침팬지의 영토 순찰과 같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란 갈등에는 이란 혁명 이후의 적대, 핵 협상, 제재, 지역 동맹, 대리세력, 정권 생존 논리, 과거 전쟁의 기억이 겹쳐 있습니다. 인간의 역사와 제도가 촘촘히 얽혀 있습니다.
그럼에도 병치가 가능해지는 지점이 있습니다. 한쪽은 예방을 말하고, 다른 한쪽은 보복을 말합니다. 양쪽 모두 상대의 현재 행동뿐 아니라 미래의 가능성을 위험으로 제시합니다. 공포는 앞으로 당겨집니다. 아직 오지 않은 위협이 지금의 공격을 정당화합니다. 이것이 현대적 확전의 무서운 기술입니다. 미래의 적이 현재의 폭력을 부릅니다.
침팬지는 핵시설을 공격하지 않습니다. 억지, 핵개발 시간, 정권 기반 시설, 지역 균형 같은 말을 쓰지도 않습니다. 인간은 그런 말을 씁니다. 그러므로 비교의 결론은 “인간도 동물이라 어쩔 수 없다”가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인간이 예측과 협상과 감시와 외교를 할 수 있다면, 확전을 막지 못한 실패는 더 무겁게 물어야 합니다.
대안우파와 트럼프 현상은 경계를 국가 안으로 끌고 들어옵니다
국제전이 국가 사이의 경계를 그린다면, 대안우파와 트럼프 현상은 정치 공동체 내부에 경계를 긋습니다. 물론 대안우파와 트럼프 지지층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모든 트럼프 지지자를 대안우파로 부를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트럼프 시대의 우파 포퓰리즘은 반복해서 비슷한 구조를 사용했습니다. 순수한 국민 대 부패한 엘리트, 진짜 시민 대 침입자, 애국적 진실 대 가짜뉴스, 전문가, 이민자, 페미니스트, 성소수자, 인종적 소수자, 도시 자유주의자를 위협으로 배치하는 방식입니다.
사회정체성 연구는 이런 정치의 매력을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우파 포퓰리즘과 공중보건 저항을 다룬 연구들은 집단 정체성이 때로 물질적 이익보다 강하게 작동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사람들은 자기 건강이나 공동체의 이익에 반하는 선택을 하면서도, 자신이 우월한 집단에 속해 있다는 감각을 얻을 수 있습니다. 보상은 정책 이익만이 아닙니다. 깨어 있는 사람, 충성스러운 사람, 속지 않은 사람이라는 감정적 보상이 작동합니다.
여기서 은고고의 장면은 이상하게 되돌아옵니다. 숲에서는 거리가 사회적 현실이 됩니다. 현대 정치에서는 미디어 환경이 거리를 생산합니다. 집회 구호, 밈, 음모론 채널, 분노를 파는 방송, 플랫폼 추천 시스템은 이빨도 발톱도 아닙니다. 그러나 시민이 누구를 더 이상 시민으로 알아보지 않을지 가르치는 장치가 될 수 있습니다.
이웃은 범주가 됩니다. 범주는 위협이 됩니다. 위협은 제거되어야 할 오염원처럼 말해집니다. 이 순서 속에서 민주주의는 제도가 무너지기 전에 이미 다칩니다. 선거는 계속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민들이 서로를 같은 세계의 구성원으로 상상하지 못한다면, 투표함은 부족 전쟁의 계산대가 됩니다.
분열은 폭력이 되기 전에 먼저 수익이 됩니다
은고고와 현대 정치의 가장 큰 차이 중 하나는 분열을 팔아 돈을 버는 구조입니다. 침팬지는 관심을 수익화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시스템은 그렇게 합니다. 분노는 팔립니다. 모욕은 짧은 영상으로 잘리고, 자막이 붙고, 공유됩니다. 정치적 정체성은 중독성이 생깁니다. 우리 편은 보고, 저들은 눈멀었다. 우리의 고통은 진짜이고, 저들의 고통은 연기다. 우리의 분노는 정의이고, 저들의 분노는 병이다.
그래서 대안우파적 정치를 볼 때 경제와 미디어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분노의 정치는 허공에서 생기지 않습니다. 산업의 붕괴, 불안정한 노동, 지역의 쇠퇴, 인종적 위계, 젠더 반발, 제도 불신에 달라붙습니다. 그리고 실제 고통을 편리한 표적으로 돌립니다.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는 이민자에게 분노하도록 유도됩니다. 빚진 시민은 학생운동가를 조롱하게 됩니다. 고립된 남성은 페미니즘이 자신의 미래를 훔쳤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이것은 자연이 아닙니다. 정치적 생산입니다. 고통으로 만든 분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맞설 수도 있습니다.
동물 비교를 도덕적 허가증으로 바꾸면 안 됩니다
은고고를 읽는 가장 나쁜 방식은 이렇습니다. 침팬지도 싸운다. 인간도 싸운다. 그러므로 폭력은 자연스럽고 정치는 원래 지배다. 이 결론은 과학이 아닙니다. 체념을 현실주의처럼 꾸민 말입니다.
자연은 윤리를 대신하지 않습니다. 침팬지 행동에 관한 사실은 인간 사회가 무엇을 정상으로 삼아야 하는지 말해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비교는 인간의 책임을 더 날카롭게 만듭니다. 침팬지는 국제법, 헌법, 소수자 권리, 전쟁범죄 재판, 독립 언론, 시민교육을 만들 수 없습니다. 인간은 만들 수 있습니다. 불완전하고 위선이 많아도, 그것들이 갈등과 말살적 적대 사이의 차이를 만듭니다.
문제는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침팬지보다 낫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실제 행동 속에서 더 나은 형식을 유지하는가에 있습니다. 지키지 않는 헌법은 종이입니다. 괴롭힘 속에 방치된 언론 자유는 소음이 됩니다. 파벌에 포획된 법원은 무대장치가 됩니다. 경쟁만 가르치고 민주적 불화를 가르치지 않는 학교는 야망에는 능숙하지만 공존에는 서툰 시민을 길러냅니다.
실천의 지평은 전체 적을 거부하는 정치에서 시작됩니다
대안은 갈등 없는 사회가 아닙니다. 그런 사회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서로 다른 이해관계, 상처, 역사, 희망을 가지고 삽니다. 민주주의는 분열을 없애는 제도가 아닙니다. 분열이 추방과 제거의 욕망으로 바뀌지 않도록 형식을 부여하는 제도입니다.
그 일은 언어에서 시작됩니다. 우리는 정권, 정당, 이념, 정책을 비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특정 집단 전체를 해충, 반역자, 침입자, 오염원으로 말하는 순간 정치는 위험한 문턱을 넘습니다. 사실을 다루는 제도도 지켜야 합니다. 전문가가 성인이라서가 아닙니다. 공유 현실이 무너지면 모든 집단이 자기만의 신성한 공포 속으로 철수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민주주의는 물질적 버림을 다루어야 합니다. 일자리, 주거, 건강, 지역 공동체, 미래를 잃은 사람들은 정체성을 보상으로 제공하는 운동에 쉽게 흔들립니다. 민주주의가 관리자의 언어로만 말하고, 포퓰리즘이 모멸감의 언어로 말한다면 후자가 감정의 영토를 차지합니다. 정의는 임금, 집, 치료, 존엄, 발언권 속에서 체감되어야 합니다.
은고고 침팬지들은 평화를 가르치지 못합니다. 그들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 뿐입니다. 이념 없이도 분열이 치명적일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인간은 거기에 이념, 기술, 시장, 기억을 더합니다. 그 추가분이 우리의 위험이지만, 동시에 우리의 가능성입니다.
숲과 화면은 같은 불안을 남깁니다
은고고 침팬지 전쟁, 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이란 충돌, 대안우파, 트럼프 현상은 하나의 설명으로 접을 수 없습니다. 서로 다른 역사와 책임과 제도를 가진 사건들입니다. 그러나 이 불편한 병치는 되풀이되는 정치적 위험을 드러냅니다. 적은 공격 직전에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미사일이나 투표보다 먼저, 서로를 알아보는 능력이 철회될 때 만들어집니다.
인간 사회는 숲을 반복하도록 선고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숲은 소속이 얼마나 빠르게 갈라질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현대 정치는 그 갈라짐이 얼마나 세련되게 말해지고, 투자되고, 방송되고, 환호받을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침팬지 폴리틱스 2.0은 우리를 자연 위의 왕좌에 앉혀주지 않습니다. 책임의 자리로 데려갑니다. 경계를 말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 경계를 의심할 수도 있습니다. 공포를 물려받을 수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중단할 수도 있습니다. 숲에는 헌법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남은 질문은 우리가 아직도 그것을 중요한 것으로 여기며 살 의지가 있는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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