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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좀이란 무엇인가: 들뢰즈, 과타리, 그리고 다양체

리좀을 들뢰즈, 과타리, 다양체의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나무형 위계가 아닌 연결과 생성의 사유가 왜 오늘 필요한지, 디지털 네트워크와 사회적 관계, 지식의 배치까지 철학 입문자도 차근차근 따라올 수 있게 풀어냅니다.
리좀 - 들뢰즈, 과타리, 다양체 | 나무형 위계를 넘어서는 비위계적 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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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hizome Explained: Deleuze, Guattari, and Multiplicity

리좀이란 무엇인가: 들뢰즈, 과타리, 그리고 다양체

리좀이라는 말은 처음 들으면 조금 수상합니다. 철학 용어치고는 흙냄새가 나고, 식물 이름치고는 너무 정치적으로 들립니다. 실제로 리좀은 원래 식물학의 말입니다. 땅속줄기가 옆으로 뻗어가며 여기저기서 새순과 뿌리를 내는 식물의 성장 방식을 가리킵니다. 생강, 대나무, 잔디가 그런 식으로 자랍니다. 하나의 굵은 줄기가 위로 솟고 가지가 차례로 갈라지는 나무와는 다릅니다.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와 펠릭스 과타리(Félix Guattari, 1930–1992)는 이 식물학적 이미지를 철학 개념으로 바꾸었습니다. 두 사람은 1980년에 출간한 『천 개의 고원』 첫 장에서 리좀을 사유, 언어, 욕망, 정치, 책의 작동 방식을 설명하는 개념으로 제시합니다. 중요한 점은 이것입니다. 그들은 사회가 식물과 비슷하다고 예쁘게 말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너무 오래 나무처럼 생각해왔다는 사실을 문제 삼았습니다.

나무에는 뿌리, 줄기, 가지, 위계, 기원, 계보가 있습니다. 리좀에는 연결, 단절, 우회, 재접속, 옆으로 번지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이 대비가 개념의 입구입니다. 리좀은 어떤 관계가 중심의 허락을 받지 않고도 현실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유 방식입니다.

리좀은 중심 없는 연결의 개념입니다

들뢰즈와 과타리에게 리좀은 중앙 명령 없이 작동하는 연결의 모델입니다. 복잡한 현실을 설명할 때 반드시 최초의 원인, 가장 깊은 토대, 하나의 지배 원리를 찾아야 한다는 습관에 맞섭니다. 그들이 비판한 것은 나무형 사유입니다. 나무형 사유는 분류하고, 서열화하고, 기원을 추적하고, 각 요소를 제자리에 배치하려 합니다.

우리는 이런 방식에 익숙합니다. 학교 교과서는 지식을 과목으로 나누고, 과목을 장으로 나누고, 장을 다시 작은 항목으로 나눕니다. 회사 조직도는 맨 위에 최고책임자를 놓고, 그 아래 관리자와 실무자를 배치합니다. 가족관계는 가계도로 정리되고, 정당은 지도부에서 당원으로 내려가는 선을 상상합니다. 심지어 검색 결과의 순위도 우리에게 은근히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위에 있다고.

리좀은 위계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더 날카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왜 우리는 위계를 현실의 자연스러운 모양이라고 믿는가. 이 질문이 리좀의 비판적 힘입니다. 현대의 많은 제도는 질서가 위에서 아래로 내려와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 훈련 속에서 복수성은 혼란으로, 차이는 일탈로, 옆으로 난 관계는 권위에 대한 위협으로 보이기 쉽습니다.

다양체는 리좀의 심장입니다

리좀을 이해하려면 다양체라는 말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여기서 다양체는 여러 개가 모여 있다는 평범한 뜻이 아닙니다. 들뢰즈와 과타리에게 다양체는 하나의 원본에 덧붙은 여럿이 아니라, 그 자체로 작동하는 복수성입니다. 군중은 실패한 개인이 아닙니다. 언어는 순수한 문법의 손상된 복사본이 아닙니다. 도시는 질서가 무너진 설계도가 아닙니다. 한 사람의 삶도 하나의 상처나 하나의 원인으로 접히지 않습니다.

다양체는 본질보다 관계를 먼저 보게 만듭니다. 질문이 바뀝니다. 이 모든 것 뒤에 있는 하나는 무엇인가가 아니라, 이 요소들은 어떻게 만나고 갈라지고 강해지고 서로를 바꾸는가가 됩니다. 첫 번째 질문은 종종 설명 속에 지배자를 몰래 들여옵니다. 두 번째 질문은 움직임을 따라갑니다.

연결과 이질성의 원리: 리좀의 어떤 점이든 다른 어떤 것과도 연결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 들뢰즈와 과타리, 『천 개의 고원』(1980/1987)

이 문장이 유명한 까닭은 리좀의 도발을 짧게 압축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점도 다른 어떤 점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정치 구호는 노래와 연결되고, 어린 시절의 기억은 노동 문제와 연결되며, 몸의 습관은 경제 구조와 연결됩니다. 지하철 노선은 외로움의 분포와 이어질 수 있고, 스마트폰 알림은 수면과 가족 대화의 질을 바꿀 수 있습니다. 리좀은 현실을 학과 사무실처럼 칸막이하지 않습니다.

이 지점에서 리좀은 철학 전공자만의 말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은 이미 리좀적으로 살고 있습니다. 다만 제도는 그 삶을 나무형으로 해석하려 합니다. 어떤 사람이 잠을 못 잡니다. 빚, 직장 압박, 가족 돌봄, 알고리즘, 건강 불안, 비교의 수치심이 한꺼번에 얽혀 있습니다. 제도는 묻습니다. 어느 항목입니까. 삶은 답합니다. 여러 선이 동시에 지나가고 있습니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왜 나무에 맞섰을까요

나무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나무는 우리에게 그늘과 열매를 줍니다. 문제는 나무가 사유의 이미지가 될 때입니다. 나무형 사유는 뿌리에서 시작해 줄기로 올라가고, 가지를 나누며, 모든 잎에 자리를 지정합니다. 철학에서는 이것이 토대, 체계, 기원, 본질, 동일성, 계보의 이름으로 나타납니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구조주의, 정신분석, 마르크스주의, 언어학, 사이버네틱스, 그리고 1968년 프랑스의 정치적 격동 이후에 글을 썼습니다. 그들이 마주한 20세기의 사상들은 인간을 깊은 구조로 설명하려 했습니다. 무의식, 계급, 언어, 친족, 생산, 기호 같은 말들이 세계를 읽는 강력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설명 자체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다만 설명이 어느새 명령의 자리로 올라앉는 순간을 의심했습니다.

그래서 『천 개의 고원』은 보통의 철학책처럼 한 줄로 전진하지 않습니다. 책은 여러 고원으로 구성됩니다. 고원은 어느 한 지점에서만 들어갈 수 있는 계단이 아니라, 여러 방향에서 진입 가능한 강도의 지대입니다. 책의 형식이 책의 주장을 직접 수행하는 셈입니다. 독자는 불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불편함도 배움의 일부입니다. 우리는 철학에 계단을 요구하는 데 길들여져 있습니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이미 길들이 교차하는 벌판을 내놓습니다.

리좀의 핵심 특징은 어렵지만 낯설 필요는 없습니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리좀의 특징으로 연결과 이질성, 다양체, 비의미적 단절, 그리고 복제가 아닌 지도 제작을 말합니다. 말만 들으면 제법 험상궂습니다. 그러나 뜻은 비교적 분명합니다.

연결은 같은 종류에 속하지 않는 것들도 서로 작동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질성은 연결되는 요소들이 말, 몸, 돈, 기술, 감정, 법, 날씨, 화면, 의례처럼 서로 다른 층위에 있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리좀은 같은 벽돌을 일렬로 쌓은 것이 아닙니다. 서로 다른 것들이 만나며 서로를 바꾸는 접촉면입니다.

다양체는 많은 것 뒤에 숨어 있는 하나의 주인을 찾지 않겠다는 태도입니다. 이것은 정치적으로도 중요합니다. 하나의 원인, 하나의 정체성, 하나의 지도자, 하나의 최종 해석을 찾는 습관은 세상을 관리하기 쉽게 만들지만, 동시에 지배하기도 쉽게 만듭니다.

비의미적 단절은 리좀이 끊겨도 다시 시작될 수 있음을 뜻합니다. 중앙집중적 체계는 지휘점이 무너지면 전체가 흔들립니다. 그러나 리좀적 구성은 옆길로 살아남습니다. 금지된 노래가 다른 이름으로 돌고, 방치된 동네에서 돌봄의 연결이 생기며, 시위의 언어가 농담과 밈으로 되돌아오는 장면을 떠올리면 됩니다. 이름은 몰라도 원리는 이미 알고 계실 겁니다.

지도 제작은 현실과 접촉하며 관계를 그려가는 일입니다. 반대로 복제는 이미 주어진 틀에 현실을 맞추는 일입니다. 이 차이가 결정적입니다. 복제는 현실에게 모범답안에 맞추라고 요구합니다. 지도 제작은 아직 공식 언어가 알아보지 못한 선들까지 따라갑니다. 리좀은 결국 주의 깊게 보는 방법입니다. 허가받은 길만 길이라고 믿지 않는 태도입니다.

인터넷은 리좀적이지만 자동으로 해방적이지는 않습니다

인터넷은 리좀을 설명할 때 자주 등장하는 사례입니다. 링크, 노드, 플랫폼, 밈, 분산된 공동체, 예측하기 어려운 확산이 모두 있습니다. 서울의 청소년이 라고스에서 만들어진 소리를 리믹스하고, 환자가 대륙을 건너 낯선 사람에게서 정보를 얻으며, 지역의 부당한 사건이 국가의 공식 설명보다 먼저 세계에 알려집니다. 이런 움직임은 분명 리좀적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곧장 축배를 들면 곤란합니다. 네트워크는 저절로 자유가 되지 않습니다. 플랫폼은 관심을 중앙에 모으고, 관계를 수익으로 바꾸며, 보이지 않는 알고리즘으로 노출을 서열화합니다. 하나의 밈은 어느 위계를 빠져나오자마자 다른 위계에 붙잡힐 수 있습니다. 분산된 대화도 혐오, 음모론, 집단 압박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리좀에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리좀은 유행어보다 더 엄격한 개념입니다. 네트워크라는 말만으로 도덕적 우위를 얻을 수는 없습니다. 어떤 연결이 만들어지는지, 누가 그 연결에 들어갈 수 있는지, 누가 밀려나는지, 어떤 흐름이 증폭되는지, 어떤 몸이 비용을 치르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리좀은 기술 낙관론과 낡은 제도 향수를 동시에 의심하게 합니다.

리좀은 무질서의 다른 이름이 아닙니다

리좀을 아무 연결이나 찬양하는 말로 읽으면 곤란합니다. 사실 그런 오해는 지금 시대와 잘 맞습니다. 우리는 피드 속에서 하루를 보냅니다. 하나의 링크가 다른 링크로, 하나의 분노가 다른 분노로, 하나의 짧은 영상이 또 다른 영상으로 넘어갑니다. 많이 접촉했지만 깊이 붙잡은 것은 별로 없는 피로가 남습니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그렇게 느슨하지 않습니다. 리좀은 산만함의 허가증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까다로운 집중을 요구합니다. 서로 다른 선들이 어떻게 이어지고, 어디서 막히고, 어떤 지점에서 성격을 바꾸는지 따라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이주 문제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나무형 설명은 이주를 경제, 전쟁, 기후, 가족, 법 가운데 하나의 가지에 넣으려 합니다. 리좀적 설명은 이 선들이 어떻게 얽히는지 봅니다. 가뭄은 농업 노동을 바꾸고, 부채는 가족의 결정을 바꾸며, 국경 정책은 이동의 가격을 바꿉니다. 스마트폰은 경로와 기대를 바꾸고, 인종주의는 도착 이후의 삶을 바꿉니다. 하나의 줄기로 전체를 설명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형체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압력, 통로, 막힘, 문턱이 있습니다.

리좀적 사유의 윤리

리좀의 윤리적 힘은 너무 빠른 정리에 대한 의심에서 나옵니다. 많은 사람이 고통받는 이유는 제도가 그들의 삶을 너무 빨리 번역하기 때문입니다. 학생은 점수가 되고, 환자는 사례가 되며, 노동자는 생산성이 됩니다. 난민은 위험이 되고, 시민은 데이터가 됩니다. 나무형 사유는 이런 변환을 좋아합니다. 사람을 가지 위에 올려놓고 그것을 질서라고 부릅니다.

리좀적 사유는 그 폭력을 늦춥니다. 한 사람을 이해 가능하게 만들기 위해 어떤 연결들이 잘려나갔는지 묻습니다. 승인된 줄기를 타고 오르지 않는 삶의 형식들이 왜 보이지 않게 되었는지 묻습니다. 사소한 언어, 비공식 돌봄, 작은 우회로, 허약하지만 끈질긴 실험들이 이미 다른 사회적 지능을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살핍니다.

물론 모든 뿌리를 버리자는 뜻은 아닙니다. 사람에게는 기억, 지속성, 제도, 함께 부를 이름이 필요합니다. 문제는 뿌리가 성장 전체를 독점하려 할 때 생깁니다. 지속적인 형식이 전혀 없는 공동체는 권력이 손대기도 전에 흩어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뿌리만 있는 공동체는 지키려는 삶을 질식시킬 수 있습니다. 관건은 식물끼리 편을 가르는 일이 아닙니다. 나무가 삶의 관료제가 되는 순간을 알아차리는 일입니다.

리좀 개념의 한계도 함께 보아야 합니다

리좀은 매력적인 개념이지만 남용되기 쉽습니다. 복잡해 보이는 모든 것을 리좀이라고 부르면 말의 힘이 사라집니다. 그때 리좀은 분석 개념이 아니라 어수선한 것에 붙이는 세련된 표지가 됩니다.

또 하나의 위험은 탈중심을 낭만화하는 태도입니다. 모든 중심이 억압적인 것은 아니며, 모든 수평적 관계가 해방적인 것도 아닙니다. 병원에는 조정이 필요합니다. 민주적 운동에도 책임 있는 조직이 필요합니다. 재난 현장에서는 누군가 기록하고, 물자를 나누고, 전화를 받아야 합니다. 문제는 중심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그 중심이 질문받지 않는 권위로 굳어지는가입니다.

마지막으로 리좀의 언어는 그것이 비판하려던 체계에 포획될 수 있습니다. 기업은 유연한 네트워크를 좋아합니다. 다만 그 유연성이 노동자에게 위험을 떠넘기고 자본에는 지휘권을 남겨둘 때도 많습니다. 창의성, 이동성, 연결이라는 말이 사무실 벽을 장식하는 동안 임금 체계의 줄기는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리좀은 주문이 아니라 실천적 분석으로 다루어야 합니다.

리좀은 오늘 왜 여전히 필요한가

리좀이 오늘 필요한 이유는 분명합니다. 우리는 중앙집중적 제도에 대한 신뢰가 약해지는 동시에, 네트워크화된 권력이 더 공격적으로 작동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오래된 나무는 금이 갔지만, 새 네트워크가 자동으로 선해진 것은 아닙니다. 둘을 동시에 읽을 개념이 필요합니다.

리좀은 권력이 공식 기관만이 아니라 옆으로 난 경로를 통해서도 움직인다는 사실을 보게 합니다. 또한 농담, 돌봄, 번역, 기억, 작은 기술적 요령을 통해 저항도 이동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동시에 지배 역시 유연하고 분산적이며 적응적으로 변할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권력도 옆으로 자라는 법을 배웠습니다.

처음 리좀을 만나는 독자라면 이렇게 시작해도 좋습니다. 어떤 현상의 기원만 묻지 말고, 그것이 무엇과 연결되는지 물으십시오. 누가 명령하는지만 보지 말고, 신호가 어떻게 이동하는지 보십시오. 한 사람이 어느 범주에 속하는지만 묻지 말고, 어떤 관계가 그 사람을 가능하게 하고, 보이게 하고, 취약하게 하고, 때로는 자유롭게 하는지 살피십시오.

리좀은 순진하지 않은 연결의 철학입니다. 네트워크를 숭배하지도 않고, 뿌리 앞에 무릎 꿇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삶이 분류를 빠져나가는 선과 권력이 새로운 모양으로 되돌아오는 선을 함께 따라가게 합니다. 그래서 리좀은 아직도 살아 있는 개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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